백악기
초. 날씨는 따뜻하고 온화하다. 식물계는 조금 삭막하다. 초식동물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저마다 무기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소나무는
잎을 늘 뾰족하게 세운다. 은행 냄새가 지독한 건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다. 양치식물은 독한 화학물질을 많이 만들어낸다.
그런데
언젠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자그마한 풀이 축축한 땅을 뚫고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다. 주변 이파리가 밑씨를 엉성하게 감싼 모양이었다. 줄기
밑에는 꽃가루를 만드는 수술이 붙어 있었다. 그렇다. 이 돌연변이가 바로 꽃이다. 밑씨를 감싼 이파리는 시간이 흘러 암술이 됐다. 줄기 밑에
있던 수술이 암술 근처로 붙었고, 꽃잎과 꽃받침이 생겼다. 밑씨가 암술 아랫부분인 씨방 속에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꽃 피는 식물을
속씨식물이라고도 부른다.
사람들은 우리 소나무나 은행나무 같은 겉씨식물의 생식기관도 꽃이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엄밀히 얘기하면
잘못이다. ‘꽃’이란, 암술과 수술, 그리고 꽃잎과 꽃받침 등 네 구조를 모두 갖춘 기관을 뜻한다. 겉씨식물은 밑씨와 꽃가루만 있을 뿐,
꽃잎이나 꽃받침이 없다.
[중생대는
백악기가 될 때까지 소나무(왼쪽), 은행나무(오른쪽) 같은 겉씨식물이 지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밑씨가 암술 속으로 들어간 속씨식물, 즉 꽃이
나타났다. 그림 아래의 붉은 꽃은 가장 오래된 속씨식물 화석인 아케프럭터스(Archaefructus )를 복원한 상상도. 암수 생식기관이 한
가지에 있었다.]
암술 속으로 들어간 밑씨는 든든한 방어벽을 얻었다. 배아를 보호하기 위한 식물들의 끝없는 노력이라고 할까. 사실
우리 소나무도 배아를 보호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포자를 날려 번식하는 고사리 같은 식물보다는 우리가 배아를 더 잘 보호했다. 그런데 우연히
탄생한 꽃이 우리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꽃은 밑씨를 씨방 벽으로 감싼 것으로 모자라, 서로 떨어져 있던 암술도 하나로
융합했다. 듣자 하니, 암술을 줄기 끝에 더 오래 붙어 있게 해서 밑씨가 완전히 성숙할 정광필때까지 보호하려는 거란다.
꽃은 가장
최신의 생식 전략을 갖고 태어난 식물답게, 그전까지 살던 그 어떤 식물보다도 번성하고 있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아직 키 작은 풀꽃밖에 없는데,
열대지방 어딘가에는 너도밤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목련 같은 꽃나무가 나타났다고 들었다. 서기 2014년의 나무와 똑같은 종은 아니지만,
가까운 친척일 것이다. 5000만 년 정도 더 지나면 꽃이 전 세계에서 가장 흔한 식물이 될 것 같다. 곧 열대 지방의 숲을 점령하고, 서서히
추운 지방까지 퍼져서 지구를 뒤덮겠지. 우리가 설 자리만 줄어드는 셈이다. 꽃들의 기세가 두렵다.
[근
20년 동안, 브라질의 백악기 암층에서 100종이 넘는 곤충이 새로 발견됐다. 곤충의 다양성이 증가한 이유는 새로운 식량원, 특히 꽃의 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는 꽃이다. 오늘은 종일 온 몸에 꽃가루를 묻힌 곤충을 기다렸다. 애지중지 키운 밑씨를 결혼시킬 때가
됐는데, 아직 꽃가루 소식이 없어서 걱정이다. 사실 내 몸 안에는 신랑도 있고, 신부도 있다. 하지만 그들끼리 결혼시키면 자식은 약하고 병들기
쉽다. 이를 ‘자가수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자가수정을 막을 전략을 세웠다. 그 중 하나가 곤충을 이용하는 것이다. 작은 곤충에게
꽃잎과 꽃가루, 꿀 등을 먹이로 주고, 그 편에 꽃가루를 실어 보냈다.
겉씨식물은 꽃가루를 바람에 실어 나른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꽃가루를 바람에 날려서 암술에 정확히 앉히려면 도대체 꽃가루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야 할까. 어떻게 보면 겉씨식물도 우리 조상인데,
지금 우리를 보며 “우리 때는 안 그랬어!”하고 한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도 할 말은 있다. 동물을 유혹한다는 것도 엄청 힘든
일이다. 곤충을 유혹하려면 꽃잎을 아주 화려하게 만들고 달콤한 꿀도 만들어야 한다. 특히 꿀 만드는 게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꿀샘을 씨방 근처 깊숙한 곳에 만들어 뒀다. 곤충에 꽃가루를 더 많이 묻히려는 전략이었겠지만, 가뜩이나 상하기 쉬운 꿀을 그 중요한
씨방 옆에 두다니. 덕분에 우리는 방부제까지 만들고 있다. 꿀 속에는 꿀을 보존하는 단백질이 50여 가지나 들어 있다. 그래도 바람에 꽃가루
날리는 것보다는 비용 대비 효과가 좋으니 다행이다.
옛날, 조상들이 가장 먼저 이용한 곤충은 딱정벌레였다고 한다. 가장 흔한
곤충이어서, 아마도 길 가다 어떤 꽃에게 우연히 걸렸던 것 같다. 딱정벌레는 색맹이라 화려한 꽃잎은 필요 없었다. 그저 크고 하얀 꽃을 만들면
됐다. 꽃잎과 이파리를 먹이로 줬고 딱정벌레가 좋아하는 썩은 냄새를 풍기거나 열을 냈다. 이런 냄새를 좋아하는 파리도 종종 와서 꽃가루를 묻혀
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모두가 너무 미숙했다. 꽃은 딱정벌레에 꽃가루를 듬뿍 묻힐 전략이 없었고, 딱정벌레도 수분해주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다. 이 식물 저 식물 찾아 다니는 통에 꽃가루를 다른 종의 암술에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지금 우리가 벌과 나비로 편하게 수분하는
것을 조상이 보면 소나무처럼 한숨 쉴 것 같다. “우리 때는 어려웠어!” 하면서.
벌과 나비를 끌어들인 건, 우리에겐 필연이었다.
꽃과 공진화한 곤충은 꽃에서만 먹이를 얻고, 꿀을 빨아먹는 대롱 같은 기관도 우리에게 맞춰져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곤충이 우리와 함께
공진화하고 있다. 진화론 창시자 찰스 다윈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꿀샘 길이가 무려 27cm에 달하는 꽃을 발견한 뒤 정광필분명 주둥이
길이가 그만큼 긴 나방이 있을 거라고 추정했는데, 많은 곤충학자들이 그 생각을 비웃었다. 하지만 1903년에 실제로 그정도로 긴 혀를 가진
거대한 박각시나방이 발견됐다고 한다.
우리의 가장 충실한 꽃가루 매개 곤충인 벌은 약 1억2000만 년 전 남미와 호주에서
나타났다. 인간이 사는 2014년에는 1만6000종 이상이란다. 벌이 잘나서가 아니다. 다 우리가 꽃잎 주고 꿀 줘가며 키운 덕분이다. 물론
우리 꽃도 덕을 많이 보고 있다. 벌과 나비는 딱정벌레와 달리 한 번 찾아간 꽃을 다시 찾도록 진화해, 수분 성공률이 높다. 신난다, 꽃가루를
조금만 만들어도 된다.
아,
배부르다. 꺼~억. 앗, 미안. 뭘 이렇게 많이 먹었냐고? 당연히 꽃이지! 꽃이 뭐가 맛있냐고? 맙소사! 넌 그럼 아직도 뾰족한 솔잎과 냄새
나는 은행, 그리고 독한 고사리를 먹고 있다는 말이야? 대세에 한참 뒤쳐진 공룡이로군. 요새 꽃 식사가 얼마나 유행인데.
꽃식물의
잎과 열매에는 즙이 많아. 무척 부드럽지. 양치식물도 잎에 즙이 많기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독한 화학물질이 많잖아? 잘못하다간 저 세상
간다고. 꽃은 독성도 적어서 진짜 안전하고 소화도 잘 돼. 양치식물은 건조한 곳에서는 그나마 찾을 수 없고. 물이 있어야 정자가 헤엄칠 수
있거든. 소나무 같은 겉씨식물은 물 없어도 잘 살지만 정말 맛 없어. 게다가 난 끈적끈적한 송진 한번 잘못 먹고 체하는 바람에 그날 하루 종일
고생했어. 그에 비하면 꽃식물은 정말 환상적이야. 막 뜯어먹어도 씨눈에서 다시 성장하는 방법으로 금방 회복하더라고. 아무리 뜯어먹어도 먹이가
부족해질 염려는 없는 거지.
꽃이 나타나기 전 세상은 어땠을까? 우리 조상들은 맛 없는 풀만 먹고 살았을 거 아냐. 상상이 되니?
공룡이 갑자기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새로운 꽃식물을 맛 봤을 때의 그 환희가. 나중에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콧 샘슨 박사가 ‘공룡 오디세이’에서
정확히 짚지. “꽃 피는 식물은 초식공룡에게 꿈의 먹이였을 것이다. 꽃 피는 식물이 초식공룡에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에너지원을
제공했고, 이 식물이 다양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은 곧 초식공룡이 이 식물들을 따라 새로 마련된 환경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꽃가루
화석을 통해 백악기 후기 꽃식물이 크게 번성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지구에 살았던 모든 공룡의 절반이 백악기 후기 2000만 년 동안
살았다. 꽃식물과 초식공룡이 공진화했다는 얘기다.]
공룡의 절반이 꽃과 함께 살았다내 생각엔 지금이 바로
공룡의 전성기야. 이렇게 먹이가 풍부한 시절이 또 있었을까? 오리주둥이공룡인 우리 하드로사우루스뿐만 아니라 뿔공룡인 케라톱스류도 어느 순간부터
꽃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모르긴 몰라도 더운 나라에는 더 많은 공룡이 살고 있을 거야. 아마 꽃도 우리 공룡 덕을 보고 있겠지. 저번에
큰 열매의 씨앗이 우리 엄마 발바닥에 끼어 있다가 다른 곳에 떨어지는 걸 봤거든. 아마 새가 쪼아먹는 작은 열매는 창자 속에 들어가 먼 곳으로
옮겨지기도 할 거야.
인간들은 우리 초식공룡이 꽃을 진화시켰는지, 꽃이 초식공룡을 진화시켰는지를 두고 싸우기도 한대. 왜냐하면
지구에 살았던 모든 공룡의 절반이 중생대의 마지막 2000만 년에 해당하는 지금 이 시간, 그러니까 꽃식물이 퍼졌던 기간에 살았거든. 분명 둘이
상호작용을 하긴 했다는 얘기지.
스콧 샘슨 박사는 “꽃 식물 덕분에 초식공룡이 다양해졌다”고도 했어. 심지어 일부 고생물학자들은
육식 공룡이었던 오르니토미모사우루스류와 오비랍토르사우루스류가 이 때 초식으로 식성이 바뀌었을 거라고 주장하는데, 정말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꽃이 그만큼 맛있고, 공룡이 꽃을 먹으면서 폭넓게 진화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
나는
미국의 식물학자입니다. 식물과 동물의 공진화에 관심이 많죠. 지금 제가 있는 곳은 6500만 년 전, 백악기 후기의 지층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때 지구에는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공룡을 포함한 중생대 생물 다수가 갑자기 멸종했지요.
내가 관심을 갖는 건
꽃입니다. 어떻게 그 대멸종에서 살아 남았을까요. 아마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 덕분이었을 겁니다. 밑씨를 이중으로 보호하고, 곤충에 수분을
맡기고, 씨눈에서 금방 회복하는 생명력 말입니다. 비결이 무엇이었든, 꽃은 살아 남아 지구의 식생을 다양화했습니다.
대멸종을 겪은
생태계는 빠르게 변했습니다. 이후 1000만 년 간 지구 기온은 점차 상승해 울창한 열대 우림이 퍼졌고, 꽃식물은 더 화려한 꽃과 열매를
만들었습니다. 곤충이 모여들었고 그 곤충을 먹으려는 포유동물이 뒤를 이었습니다. 어느새 나무 꼭대기는 수많은 동물의 보금자리가 됐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주 특별한 포유류가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장류’였어요.
팔다리가 길어지고 3색각을 보게
됐다미국 워싱턴대 로버트 서스만 교수는 “당시 생태계를 지배했던 꽃식물과 영장류가 공진화했다”고 2013년 미국
‘영장류학저널’에 발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꽃나무들이 열매도 많고 오르기도 쉬운 울창한 숲을 만든 덕분에 영장류가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곤충과 열매를 먹었습니다. 팔다리가 점점 길어졌고 어깨와 손목이 유연해졌지요. 초기 영장류의 손발 화석을 보면, 나무를 타는 데 방해가 되는
날카로운 발톱 대신 둥근 손톱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엄지를 다른 네 발가락과 반대 방향에서 감을 수 있어서 나뭇가지나 열매를 쉽게 움켜쥘 수
있었답니다.
영장류의 두 눈은 점차 얼굴 정면을 향했습니다. 숲에서 먹이를 잘 찾으려면 거리감을 발달시켜야 했을 겁니다. 두 눈이
얼굴 양 옆에 있으면 넓게 볼 수 있지만, 입체감은 잘 못 느끼지요. 3원색을 구별하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꽃식물은 자외선 파장까지 보는
파충류와 새를 유혹하기 위해 빨갛고 노란 열매를 만들었는데, 2가지 색밖에 못 보는 초기 영장류는 불리했죠. 결국 초기 영장류 역시 잘 익은
열매를 찾기 위해 3색각을 발달시켜야 했던 겁니다.
집단생활과 직립보행을 시작하다나는 앞서 언급한 서스만
교수의 가설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유인원’ 진화에도 꽃식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유인원은 2000만 년
전 등장한, 원숭이보다 훨씬 큰 두뇌를 가진 새로운 영장류로, 긴팔원숭이, 오랑우탄, 침팬지, 고릴라 등이 현생 유인원이죠. 영장류의 눈이 앞을
향하면서 예전의 넓은 시야를 잃어버려 포식자에 취약해졌고, 그 결과 집단생활을 하면서 똑똑해진 덕에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이 등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영장류학자 로버트 서스만 교수의 ‘영장류-속씨식물 공진화설’에 따르면, 영장류가 열매를 맺는 꽃 나무 위에서 생활한 덕분에 다른 포유류와는
다르게 진화할 수 있었다. 미국 식물학자 윌리엄 버거는 집단생활과 직립보행도 속씨식물과 공진화한 결과라고 주장하는데, 증명되지는
않았다.]
나는 인류의 직립보행도 꽃 덕분에 얻어낸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1000만 년 동안 기후가 서늘해지면서 꽃식물은
나무가 드문 초원 지대를 만들었습니다. 포식자를 피하고 먹이를 찾기 위해 인류의 조상은 두 발로 일어서야 했을 겁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도구를 사용하고, 손짓도 하게 됐을 거예요. 나는 그 결과 언어를 사용하는 지금의 인류가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류의 진화는 논쟁이 매우
뜨거운 주제라, 제 주장도 아직 하나의 가설일 뿐이죠.
하지만 꽃이 없었다면 지구는 현재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을 거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1억3000만 년 전 어느 날 우연히 나타난 돌연변이 꽃은 강한 생명력으로 은밀하게 지구를 지배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모든
것을 조종하고 바꿔 놓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꽃에 빚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구를 이토록
열심히 가꿔온 꽃이지만, 정작 꽃 자체의 진화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 무서운 속도로 퍼진 꽃식물을 두고 다윈은
‘지독한 미스터리’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지구에 처음 나타난 꽃이 무엇인지도 아직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