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직업 외교관 중 '최장수(6년 5개월·단일 임기 기준) 대사' 기록을 가진 김하중(68) 전 주중 대사는 2009년 초
통일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은둔자'가 됐다.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주변이나 모임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09년 2월 12일 장관 퇴임식을 했고, 다음 날 수십 년간 만났던 사람들 전화번호를 전부 지웠다. 36년간 공직
생활을 했고 장관도 해봤다. 그만하면 사회생활 할 만큼 했다. 2월 12일까지 알았던 사람 중 99%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세상 사람들은 어쩌다 들려오는 신간(新刊) 뉴스를 통해서 접했다. 올 초에도 그런 소식이
있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으로 일하면서 가까이에서 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증언'이란 책을
냈다.
그와 연락하기는 마치 첩보원 비밀 접촉 같았다. 그는 평소 휴대전화 전원을 꺼놓았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놓고 연락을 기다렸다. 그는 "세 시간에 한 번 정도 메시지를 확인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지난 9일 오후 서울 이태원에 있는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공직을 떠난 지 햇수로 7년째다. 그동안 세상과 인연을 끊은 듯했다.
"교회 가는 것 이외에는
오로지 집에서 책 쓰는 일만 했다. 할 일이 참 많다. 사람 만나면 일을 못 하니까 모든 사회생활을 접었다. 앞으로도 책만 쓸 거다. 재작년 두
권짜리 '중국 이야기'를 썼는데, 그걸 시리즈로 쓰려 한다."
―최고 중국 전문가이고 엄청난 인맥도 있어 기업이나 각 기관이
영입하려고 난리였을 텐데.
"연락 많이 왔다. 하지만 국민 세금 받고 나라 위해 살았다. 세금으로 얻은 지식과 경험을 회사나 특정
조직을 위해 쓰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쪽으로는 눈을 딱 감았다."
"한·미 관계, 무엇과도 비교 안
돼"
김하중은 2001년 10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주중 대사를 지냈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장인이자 외무부장관을
지낸 고(故) 김동조 전 주미 대사가 갖고 있던 직업 외교관 '최장(6년 2개월) 대사 기록'을 3개월 경신했다.
―한·중 수교가
만 23년을 맞았다. 대(對)중국 교역량은 미국을 넘어섰다. 일각에선 한·중 관계 비중을 한·미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진부한 얘기 같은데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나라는 미국이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미국을 대신할 수 없다. 앞으로 상당 기간
변함이 없을 거다. 중국과 일본으로서도 제일 중요한 나라가 미국이다. 우리 내부에서 자꾸 한·중 관계를 말하는데 중국은 우리와 역사적 관계도
오래됐고 문화적 공유점도 많지만 이념 등 다른 점이 아직 많다.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중국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고
어떤 경우에도 중립을 지키려 한다. 한·중 관계 발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얘기를 대사 시절에는 못 했을 것
같다.
"공개적으로 했다. 한번은 대사 시절 4개국 대사가 출연하는 국내 TV 프로그램에 나갔다. 사회자가 '한·중 관계가 많이
발전했다. 한·미와 한·중 관계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느냐'고 묻길래 아직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사회자는
'주미 대사가 하는 말 같다'고 하더라. 이런 말을 주중 대사가 한다는 게 더 큰 의미가 있는 거다."
―중국에 가선 어떻게 얘길
했나.
"같은 취지로 얘기했다. 대사 시절 중국 국방대학원에서 강연을 했다. 장성과 대령급 수백 명이 모인 자리였다. 중국에 동맹이
있느냐, 우린 있다고 했다. 중국에 동맹이 있다면 동맹국이 중요하냐, 보통 국가가 중요하냐고 했다. 우리가 북한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중국이
미국처럼 우릴 지지해 줄 수 있느냐고도 했다. 강연이 끝난 뒤 대장 계급인 대학원장이 내게 '대단하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중국
친구도 많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게 신기하다.
"그게 사실이고 솔직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진심을 그들도
원했다."
―문제는 최근 사드(THAAD·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논란처럼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때이다.
"양측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이해를 시키고 협상해야 한다. 그게 외교관이다. 한·미 동맹을 중심에 놓고, 중국과도 좋은
관계를 끌고 나갈 수 있게 말이다."
중국과 북한, 만나도 대화가 잘 안 된다―최근 중국과 북한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이
나온다.
"1992년 한·중 수교와 1997년 황장엽 망명으로 북·중 관계가 완전히 변했다. 북한은 엄청 반발했다. 그래도 김일성이
살아있을 땐 괜찮았다. 또 김정일이 집권했을 땐 대화와 감정의 끈이라도 있었다. 근데 이젠 아니다. 중국은 나이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김정일은 후진타오 주석과 연배가 비슷했다. 현 중국 지도부는 대부분 1950년대에 태어났다. 6·25전쟁 이후 출생해 북한과 끈적끈적한 감정도
없다. 경제에 밝고 능률을 극대화하려 한다. 그들은 북한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을 것 같다. 중국과 북한은 혈맹이 아닌 보통 사이가
됐다."
―그렇게 되면 중국을 통한 북한 변화가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그럴 수 있다. 요즘 중국에선 '북한을 만나면
대화가 잘 안 된다'는 말이 나온다. 북한 사람들은 한자도, 중국 문화도 잘 모른다. 말이 통하겠나. 정이 안 가는 거다. 한국 사람들은
이태백도 알고 삼국지 얘기도 하는데…."
―북한 급변 사태 때 중국이 군사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중국은
출사유명(出師有名), 즉 명분이 있어야 전쟁에 나선다. 직접 공격받는 등의 정당한 이유가 아니면 군사 행동은 안 할 거다. 그들은 동북 3성으로
대규모 난민이 쏟아져 들어와 혼란이 생길 것을 걱정한다."
"이제 북미과장을 해보게."
1985년 가을 이원경 외무부 장관은 당시 장관 보좌관이던 김하중을 불렀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핵심 보직 중 하나인 북미과장 자리를 권했다. 그는 사양했다. 장관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외교부에 간 건 중국과 수교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북미과장을 맡으면 그 길이 바뀐다.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을 거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아니면 안 됐으니까. 몽골
등과 함께 중국을 담당하는 동북아2과장으로 갔다."
―스스로 출셋길을 걷어찬 셈이다. 그런 일이 또 있었나.
"3년 후
최광수 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교관들이 가장 선망하는 자리다. 그때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내게 중국은 양보할 수 없는 꿈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한·중 수교 직전인 1992년 초에 주(駐)베이징 무역대표부에 부임했다. 결국 소원을 이룬
셈인가.
"그렇다. 놀라운 건 부임 두 달 만에 한·중 수교 비밀 교섭이 시작됐다는 거다. 이런 게 꿈이 이뤄진다는 것 아닐까.
당시 이 교섭을 아는 사람은 대통령을 포함해서 10명 정도밖에 안 됐다. 베이징에서 양국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락관 역할을 했다. 아무도 몰래
중국 측 사람 만나 메시지 주고, 그쪽 메시지도 받아왔다. 그 보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일 하다 보면
상대방에게 각별한 정이 생길 것 같다.
"한·중 수교 협상 과정, 그리고 곧바로 주중 대사관 정무공사로 일하면서 친구가 많이
생겼다. 당시 중국 외교부 국장과 부국장급과 수시로 만났는데 그들이 나중에 차관도 되고 장관도 됐다. 양제츠 외교 담당 국무위원(부총리급)을
비롯해 외교부장과 부부장(차관), 홍콩 담당 장관 등이 모두 그때 만난 사람이다."
―그렇게 인맥이 화려하니 국내 기업들이
스카우트에 열을 올릴 만하다.
"그런가."
―1997년 황장엽 망명 때도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주중
정무공사를 마치고 본부 아·태국장을 지낸 뒤 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옮긴 지 12일 만에 사건이 터졌다. 황장엽이 우리 대사관에 들어와 망명을
신청했다. 중국 측 반응이 냉담했다. 우리 측 면담 신청도 거부했다. 다음 날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다."
―중국 측이 다른 사람은
안 만나주고 당신은 만나주던가.
"중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 보자고 했다. 그는 당시 중국 외교부 핵심 간부였다. 그는
'오늘 만남은 정식 외교 협의가 아니며, 친구가 먼 곳에서 왔다기에 만나는 것'이라면서 일단 왔으니 서로 생각이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중국
측과 첫 대면 접촉을 했고, 대화 통로를 열었다. 이후 35일 동안 협상을 진행했다. 그때 상대가 지금의 왕이
외교부장이었다."
초등학교 때 "난 외교관 될 거다"김하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외교관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헤어지는 친구에게 주는 편지엔 언제나 "커서 외교관 될 거다. 그때 다시 만나자"고 썼다. "어릴 때 삼국지와 초한지 등을
10번, 20번씩 읽었다. 이렇게 대단한 나라에 언젠가는 꼭 가보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중문학과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인가.
"외교관이 꿈이었기에 1지망 외교학과, 2지망 중문학과를 썼다. 2지망은 좀 망설였다. 학교와 집에선 그 학과는 취직도
안 된다며 말렸다. 그런데 고3 때인 1964년 10월 중국이 핵실험을 했다. 신문에선 중국이 세계적 강국이 될 거라고 난리였다. 결국 1지망
떨어지고 2지망에 합격했다. 필연이라 생각했다."
―확신이 흔들린 적은 없나.
"대학 때 주변에선 과를 바꾸라고 했다.
그럴 땐 '우리와 중국 관계가 2000년이 넘는다. 지금 잠시 안 좋아도 20~30년 지나면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거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로부터 38년 후인 2003년 처음으로 대학 동창회에 갔다. 친구들이 깜짝 놀라더라. 내가 진짜 주중 대사가 돼
나타났으니까."
―중국 사람들도 김 대사가 오래 재직하는 걸 환영하는 분위기였나.
"그 사람들이 나를 신뢰했다. 우선
대학 진학 때 중국문학과에 간 걸 듣고 놀라더라.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년) 직전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북미과장 등을 마다하고 오로지
중국만 보고 달려왔다는 점, 수교 협상 때 공헌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해줬다."
―중국 사람과 우정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중국어를 잘하고 문화를 잘 알아야 한다. 특히 그 사람들이 실리에 밝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실리가 있어야 한다. 결정적 도움을 줘야 한다. 술, 밥, 선물이 아니다. 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줬다. 중국은 정보가 빠르지 않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얘기를 해줬다. 특히 정책 결정에 참고가 되는 얘기를 해줬다."
―중국 고위층과 실제로 어느 정도로
친했나.
"우다웨이 차관이 우리 청와대 인사에게 그러더라. '우리 집에 밤 12시, 새벽에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내 밑의
아주국장과 한국과장, 그리고 김 대사뿐이다. 내가 집에서만 쓰는 휴대전화가 있는데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은 내 아내와 몇 사람 뿐이고 거기에 김
대사도 포함된다'라고."
DJ와 청와대'외길'만 보던 김하중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인연은
결정적이었다. 그는 주중 정무공사 때 DJ를 처음 만났고, DJ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꼼꼼한 일처리를 눈여겨봤다. DJ는 대통령이 되자 그를
의전비서관에 앉혔다. 그 후 외교안보수석 등을 거치며 3년 8개월 동안 청와대에서 일한 뒤 주중 대사가 됐다.
―윗사람을 잘 모시는
비결이 있나.
"정직하게 보고하고 말했다. 내가 모셨던 분이 훌륭하게 돼서, 그런 훌륭한 분을 내가 모셨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다.
남들에게 욕먹는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윗사람에게 욕먹을까 봐, 자리 놓칠까 봐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걸 내려놔야
한다."
―그렇게 입바른 소리만 하면 오히려 미운털이 박히지 않을까.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윗사람이 물어보기 전에
보고하고, 일 시키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 대통령이 물어보고 전화하면 즉시 대답하고 보고를 올려야 한다. '알아보겠습니다'라는 말은 안 된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다. 대면보고도 시간이 없을 때는 핵심만 추려 단 몇 분 내로 마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한가.
"많이 읽어야 한다. 주요 내용을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또 직접 써봐야 한다. 남 시켜서 보고서 만들면
시간만 낭비한다. 난 평생 중요한 보고서는 직접 썼다. 외교관이 된 직후 3개월 동안 학원에서 타자를 배웠다."
―평생 바쁘고,
깨어 있어야 했겠다.
"과장 때는 세계 어딜 가든 단파 라디오를 갖고 다녔다. BBC와 NHK, 한국 방송 뉴스를 항상 들었다.
최신 국내외 이슈를 항상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도 중요하지 않나.
"참모는 입이 무겁고
겸손해야 한다. 말 함부로 하거나 교만하면 금방 신임을 잃는다. 대통령 측근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말 때문이다. 무협지에서 고수들은 장풍만
대봐도 서로 내공을 안다. 마찬가지로 높은 사람들은 밑의 직원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만 봐도 모든 걸 다 안다."
―권력 핵심에
있을수록 올바르게 사는 게 더 힘들 것 같다.
"청와대 있는 동안 업무가 아닌 한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대통령 측근이라는
사람들도 만난 적이 없었다. 밥은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사무실에서 해결했다."
―너무 유난을 떤 것은 아닌가.
"권력이
무서웠다. 청와대 들어갈 때 무사히 임무를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힘 있는 곳에 갔다가 패가망신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권부의
핵심에 있으니까 그게 더 두려웠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주중 대사를 했고, 이명박 정부 땐 통일부 장관을 했다.
관운(官運)이 좋은 것인가.
"욕심이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살았다. 대신 엄청 노력했다. 확고한 실력을 가지려 했다.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외교란, 50대 50의 승부―남북통일에 대한 중국의 속마음은
무엇인가.
"남북이 원한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협력하다 적당한 때에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거
환영한다고 한다. 삼국지 첫 장에 '나라가 분열된 지 오래되면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되면 분열한다(分久必合 合久必分)고 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를 '천하대세'라고 한다."
―중국에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
"중국 정부는 한국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의
대중 무역과 투자가 전 세계 국가 중 3~4위다. 인적 교류는 연 1000만명을 향해 가고 있다. 한국은 중국이 미국과 어려운 상태일 때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는 국가라는 걸 중국도 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국인의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난득호도(難得糊塗). 남을 호도하는 게 어렵다는 뜻인데,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을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표현하는
기술을 갖추는 게 지도자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할 때 절대로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1 더하기 1을
2라고 단박에 말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다. 명쾌하게 말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거나 실무자일 것이다. 높은 사람은 한참 얘기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천안함 폭침 때도 그랬다."
―무슨 뜻인가.
"중국은 계속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지하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이게 정말 헷갈리는 말이다. 남한을 지지하는 건지 북한 편을 드는 건지. 그러나 친한 중국
친구에게 조용히 물어본다면 '남한을 지지하는 거지'라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사람과 상대하려면 술도 많이 마셔야
했겠다.
"진짜 중국의 리더들은 술을 잘 안 한다. 그 나라에도 우리 식의'술 상무'가 있다. 식사 자리에 10명 나오면 그중
3~4명 젊은 사람, 술 대표가 있다. 높은 사람은 고량주 한두 잔만 마시고, 술 대표들이 상대를 한다."
―외교관으로 36년 일해
보니, 외교는 무엇이던가.
"국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상대도 국익을 위해 싸운다. 외교는 말로 승리하면 안 된다. 내가
승리했다, 이번에 외교를 잘했다고 떠들면 안 된다. 상대방이 외교를 못했다는 얘기가 되지 않나. 외교는 승부가 50대50이 돼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51대49로 이겼다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외교를 너무 과하게 선전하고 과장해 말하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