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이 인체를 모방한 기술이라는데, 왜 그런가요?” 얼마 전, 어느 대학생에게서 받은 질문이다. 지금은 에펠탑이 없는 파리를 생각할 수 없지만, 에펠탑이 처음 등장할 때는 달랐다. 사람들은 앙상한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듯한 에펠탑의 모습에 경악했다. 에펠탑이 인체의 골격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공대 교수가 우연히 방문한 의대 해부학 교실에서였다. 이처럼 생명체에 영감을 얻어 형태와 구조를 모방하는 것을 생체모방(Biomimetics) 또는 자연모사기술(Nature Inspired Technology)이라고 부른다. 이는 과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돌파구였다.
1849년 28세의 철도 엔지니어 카를 쿨만(Carl Culmann)은 회사를 휴직하고 미국과 영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토목 구조물을 접하게 된다. 특히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증기기관차가 등장하자 수요가 급증하던 교량에 주목했다. 당시 철도 교량에 널리 쓰이던 ‘트러스(truss)’는 철제 막대기들을 X 혹은 삼각형 모양으로 조합했는데, 어떤 조합이 하중을 제대로 지지할지 쉽지 않았다. 쿨만은 여행에서 본 수많은 트러스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효과적인 설계법을 개발한다. 이 업적으로 1855년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이 개교하며 그를 교수로 초빙했다. 이후 26년간 쿨만이 종신으로 근무한 이 대학은 흔히 ETH(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로 불리며 나중에 아인슈타인과 뢴트겐 등 노벨상 수상자 30여 명을 배출하게 된다.
더욱 획기적인 트러스 구조에 목말라 하던 쿨만은 1866년 저명한 해부학자였던 동료 의대 교수 마이어(Georg Hermann von Meyer)의 연구실에서 실마리를 발견한다. 마이어가 절단한 인체의 뼈 단면에서 특이한 점을 본 것이다. 뼈 구조는 대개 외곽이 치밀하고, 중심이 성글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인체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받는 넓적다리를 분석했다. 놀랍게도 밀고 당기는 힘이 반복되며 가해지는 하중들은 연약한 뼈의 중심부를 피해 단단한 외곽부로 분산되고 있었다. 해면골(海綿骨)이라 불리는 중심부의 엉성해 보이는 조직이 이 분산을 담당한 것이다. 이렇게 외부와 내부로 강약이 구분되면, 뼈 전체가 튼튼할 필요가 없어 무게도 줄이고 하중도 잘 버틸 수 있다.
쿨만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철제 트러스에 도입한다. 힘을 크게 받는 부위는 외부로 돌려 굵게 만들고, 그 사이를 잇는 내부는 가늘게 만들어 힘을 분산하는 역할을 맡게 했다. 여기에 감명을 받은 제자 쾨클랭(Maurice Koechlin)은 쿨만의 가르침을 인류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에 적용하게 된다. 에펠의 회사에 입사한 쾨클랭의 첫 도전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 항구에 들어서게 될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높이 46m의 거대한 동상(銅像)을 내부까지 구리로 채울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자유의 여신상이 왼손에 든 미국독립선언서만 해도 길이 7.2m, 너비 4.1m, 두께 0.6m였다. 세제곱미터당 9t 정도인 구리의 비중을 생각하면 독립선언서 무게만 무려 159t이니, 자유의 여신상 전체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질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청동 주조상은 대개 내부를 비워 주조한다.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은 훨씬 과감한 방식이 필요했다. 불과 2.4㎜ 두께의 구리판을 망치로 다듬어가며 외곽을 만들어 전체 구리 무게를 31t으로 줄였다. 문제는 내부였다. 거대한 구조물이 강한 바닷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내부 뼈대가 필요했다. 쾨클랭은 여기에 쿨만의 아이디어를 적용한다. 마치 인체와 같이, 얇은 구리로 만들어진 피부 내부에 철재로 만든 125t 무게의 강력한 골격이 결합했다. 구리 피부와 철제 골격의 합은 불과 156t으로, 구리로 가득 채울 경우의 독립선언서보다 가벼웠다. 상식을 뛰어넘는 혁신이었다. 이렇게 1886년 자유의 여신상이 성공하자, 확신에 찬 에펠은 쿨만과 쾨클랭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야심작 에펠탑으로 확장하게 된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추진된 에펠탑은 한 변의 길이가 125m인 정사각형 위에 높이 324m로 세워진 거대한 건축이다. 여기에 쾨클랭의 설계로 사용된 철재의 전체 무게는 7700t. 이는 한 변의 길이가 10m인 정육면체를 채운 철(철의 비중은 세제곱미터당 7.8t)의 무게인 7800t보다 가볍다. 이는 거대한 에펠탑을 녹이면 이 정육면체에 모두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에펠탑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원통을 생각하면, 그 공간이 차지하는 ‘공기’의 무게는 9540t으로 에펠탑보다 무겁다. 이처럼 에펠탑이 큰 규모에 비해 무게를 대폭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인체의 뼈 구조를 참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대형 구조물은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구리 피부를 가진 자유의 여신상과 달리 구멍이 숭숭 뚫린 에펠탑은 훨씬 안전했다.
하지만 예술의 도시 파리 도심에 솟아오른 거대한 구조물에 수많은 예술가가 들고일어났다. 마치 뼈가 그대로 노출된 듯한 에펠탑의 모습에 흉측한 건축물이라며 비난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에펠탑과 같은 구조물을 ‘철로 만든 뼈대’라는 뜻으로 ‘철골(鐵骨)’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빗발치는 비난에 에펠은 보란듯이 에펠탑의 4면에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72명의 과학자를 금빛으로 새겼다. 시대를 앞서갔던 이 철골 구조물은 세월이 지나며 서서히 진가를 인정받았고, 이제는 파리에서 가장 예술적인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처럼 인류 건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