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김모(47)씨는 새 학기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이 다닐 수학 학원을 찾다 ‘의대반’이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서울 대치동의 한 수학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초6 커리큘럼이 ‘의대반’과 ‘SKY(서울·고려·연세대)반’ ‘일반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씨가 “아이를 의대에 보내고 싶다”고 하자 “너무 늦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원 관계자는 “요즘은 의대에 보내려면 최소 초등 4학년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초등 6학년 커리큘럼의 경우 중학교 1~2학년 과정은 여러 번 공부하고 중3 기본 개념까지 공부한 학생들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4년 치 선행 학습이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6 수학만 예습했던 김씨 딸은 테스트 결과 일반반 대상이었다.
의대 선호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의대 열풍’이 초등학생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최근 학원가에선 ‘초등부 의대 준비반’이 성행하고 있다. 이 같은 초등부 의대 준비반엔 최소 1년 이상의 선행 학습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입학 고사’를 치르는데 경쟁률이 높게는 10대1까지 올라간다.
초등 의대반이 생겨나는 것은 의대를 가려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미적분과 기하 등 높은 난이도의 수학 과목에서 ‘초고득점’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의 초3 학부모는 “아이를 의대에 보내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부모들 사이에서는 초등학생 때 빠른 선행 학습으로 기본을 다지고 중·고등학생 땐 심화 문제 중심으로 실력을 다지는 게 정해진 코스로 통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수학 학원에선 ‘의대 합격과 수능 1등급’을 목표로 하는 8명 소수 정예 ‘의대반’을 운영하고 있다. 무학년제라 초등 4학년에서 중3 학생까지 입학 가능하다. 매달 중1~2 교과 내용을 바탕으로 입학 시험을 치르는데, 가장 최근 시험엔 50명이 응시했다. 경쟁률이 6대1에 이르는 것이다. 이 학원 원장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의대반은 중1~2 아이들을 중심으로 채워졌는데 최근 2년 새 초등 5~6학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며 “적성과 관계없이 무조건 의대부터 도전해보는 추세라 응시생들이 많이 몰리면서 입학 커트라인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학원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학원들이 ‘초등학생부터 학원 커리큘럼을 따라가면 의대에 갈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경기도 김포에서 15명 정원으로 초등 의대반을 모집하는 한 수학 학원의 홍보 문구는 “의대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등부”다. 이 학원 의대반 초6 학생들은 고교 1학년 과정을 공부한다. 경북 포항의 한 학원도 “의학 계열 진학을 목표로 두고 ‘완벽한 성공 로드맵’을 제공해주겠다”는 광고로 초6 의대반을 상시 모집한다. 이외에도 17일 본지가 검색해보니 서울·경기·부산·경북 등 전국에서 인터넷으로 ‘초등 의대반’을 홍보하고 있는 학원만 20곳이 넘었다. 이들 학원은 하나같이 “최근 2년 새 초등학교 학부모 문의가 2~5배는 늘었다”고 했다. 사교육을 통해 의대를 준비하는 단계가 중·고교생에서 초등학생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렇게 초등생 사이에 부는 ‘의대 열풍’은 학원들의 ‘불안 마케팅’이 한몫하고 있다. 한 살이라도 어린 나이에 입시 전선에 뛰어들지 않으면 아이가 의대에 못 갈 수 있다는 학부모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지나친 선행 학습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만기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 소장은 “몇 년 전까지 ‘영재 열풍’이 불면서 영재고·영재교육원 등을 목표로 자녀 교육을 하던 엄마들의 관심사가 의대로 바뀌자 학원들도 전부 ‘영재반’에서 ‘의대반’으로 간판을 바꿔 붙인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일부 학원에선 초등학생보다 더 어린 유아도 의대 준비를 미리 할 수 있다고 홍보한다. 지난해 말 부산의 한 학원에선 ‘이것만 알면? 우리 아이 쉽게 의대 간다! 이것만 알면? 우리 아이도 공부 잘하는 아이 된다!’는 홍보 문구로 유아~초3 학부모 대상의 학부모 설명회를 열었다.
이렇게 선행 학습을 해야 의대에 갈 수 있다고 광고하는 학원들은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 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일명 선행 학습 금지법) 위반 소지가 있다. 박근혜 정부 때 만든 이 법은 학원들이 선행 학습을 유발하는 광고나 선전을 못하게 금지한다. 하지만 처벌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대부분 학원들이 선행 교육을 하는 상황에서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다.
높아진 의대 선호도는 올해 대학 입시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17일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3학년도 대학 정시모집에서 고려대·서강대·연세대·한양대 4개 대학의 반도체 계약학과에 합격하고도 등록을 포기한 수험생 수는 73명으로 전체 모집 인원인 47명보다 많았다. 최초 합격자인 47명이 모두 빠져나가 그 숫자만큼 다시 뽑았는데 이 중 26명이 또다시 등록을 포기했다는 의미다. 입시 업계에선 의약학 계열에 중복 합격한 학생들이 대거 이탈한 결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 계약학과인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10명 모집에 23명 추가 모집)나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인 고려대 반도체공학과(정원 11명에 19명 추가 모집)도 인재 이탈을 막지 못했다. 이 중 상당수는 대기업 취직이나 ‘대학 간판’보다 지방대 의대를 나와서라도 의사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걸 선호하는 것이다. 이공계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설립된 영재고 졸업생들이 의대에 진학할 경우 각종 불이익을 주고 있지만 의대행을 막지 못하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몇 년 새 의대를 준비를 하는 학생들의 연령대가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본인의 적성을 제대로 찾아볼 새도 없이 부모의 희망에 따라 의대에 가는 현상은 사회적 문제”라고 말했다. 또 지나친 선행 학습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줄 뿐 아니라 학습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