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8일 일요일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1900년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 프롬은 다양한 삶의 편린을 겪은 학자다. 프롬은 프랑크푸르트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법학, 사회학, 철학을 전공했다. 당시 스승이 알프레트 베버, 카를 야스퍼스, 하인리히 리케르트 등이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프리다 라이히만 밑에 들어가 다시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다음 그 유명한 프랑크푸르트연구소에 들어간다. 아도르노, 마르쿠제, 벤야민, 노이만 등이 연구소 동료였다. 프롬은 2차대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교수생활을 했고, 멕시코를 거쳐 말년에는 스위스에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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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국가와 전공, 스승 및 동료들과 조우하며 살았지만 그의 본질적 스승은 두 명뿐이었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다. 프롬은 프로이트에게서 인간의 심연을 배웠고, 마르크스에게서는 사회구조를 배웠다. 이 둘을 바탕으로 프롬이 제시한 것이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이었다. 이른바 성격이라고 말하는 개인 특징에는 그 사람이 해당되는 사회의 공통된 특질이 담겨 있다는 개념이다.

프롬은 현대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성격, 즉 `소유지향`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소유`라는 개념은 인류 전체 역사로 봤을 때는 오히려 낯선 개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프롬의 이 생각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인류가 가장 존경하는 정신적 `교사`인 부처와 예수를 보자. 부처는 인간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 `소유를 갈망하지 말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사람이 온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망치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설파했다.

모든 걸 다 가진 재벌가의 딸이나 수백 억 재산에 연봉이 수억 원에 이르는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소유냐 삶이냐`의 명제는 영원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롬은 `소유적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일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한다. 소유를 중시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고, 소유욕이라는 것은 무한증식하는 속성이 있어 영원한 만족이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적 인간`은 더 높은 완성을 이루기 위해 살기 때문에 평화롭고, 소유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매사에 당당하며, 삶을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덜하다.

대중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프롬의 주장은 언제 봐도 매력적인 구석이 많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에게서 프롬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프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외우고 싶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하지만 지적 창조력이나 이성, 사랑 같은 존재적 가치는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증대된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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