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5일 일요일

장욱진(張旭鎭) 폐허 속에서 다시 날아오르다




폐허 속에서 다시 날아오르다



 
부인 이순경 여사와 함께 한 화가. 장욱진
  

화가는 항상 이렇게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작업을 했다.

  
동경 유학생 출신의 모던 보이었지만 동양 정신에 충만한 작품 세계를 남긴 장욱진. 그는 인생은 소모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장욱진 연보
1918년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에서 아버지 결성 장씨 기용(基鏞)과 어머니 이기재(李基在)의 차남으로 출생하다.(음력 1917년 11월 26일)
1922년 (5세) 일가가 서울 당주동 한옥으로 이사
1923년 (6세) 부친 별세, 고모 옆집(내수동)으로 이사
1924년 (7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서울사대부초)입학하다. 공부보다 그림에 더 열중하여 다섯 살 위인 형에게 꾸지람을 자주 듣다. 까치를 많이 그리다.
1926년 (9세) 보통학교 3학년생인 그의 그림을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주최의 <전일본 소학교미전>에 출품, 일등상을 받다. 처음으로 유화를 시작하다. 이후 미쓰코시 백화점 주최.
1930년 (13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입학하다.
1932 (15세) 일본인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격렬히 항의한데 대한 징계로 경성 제2고보를 중퇴.
1933년 (16세) 중퇴 이후 집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성홍열을 앓아 충남 예산 수덕사(만공선사 선실)에서 6개월간 정양. 때마침 수덕사를 찾아왔던 화가 나혜석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다.
1936년 (19세) 체육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육상(높이뛰기)과 빙상선수로 활약.
1937년 (20세) 동아일보주최<학생미전>에서 가작상을 두 차례 수상.
1938년 (21세) 조선일보 주최<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공기놀이》를 출품하여 특선과 사장상을 수상하고 상금으로 100원을 받다. 이를 계기로 가족들은 그가 그림그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다.
1939년 (22세)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23회)하다. 4월,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학교)서양화과에 입학.
1940년 (23세)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소녀》로 입선.
1941년 (24세) 4월 12일, 이병도박사의 장녀 이순경과 결혼.
1942년 (25세) 장남 정순 출생.
1943년 (26세) 9월, 일본제국미술학교 졸업. <선전>에《언덕》이 입선.
1944년 (27세)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경기도 평택 비행장 건설작업에 동원. 이후 일본 관동군 해군본부(서울 회현동)의 경리요원으로 배속.
1945년 (28세) 장녀 경수 출생. 해방 후 국립박물관(진열과)에 취직하여 도안과 제도일. 박물관 내 관사에 거주.
1947년 (30세) 차녀 희순 출생. 국립박물관 사직. 덕수상업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김환기,유영국,이규상 등과 '신사실파'결성.
1948년 (31세) 12월, 동인전<제1회신사실파전>(화신백화점)에 출품.
1949년 (32세) 11월,<제2회신사실파전>(동화백화점)에 《독》,《조춘》, 《面》,《마을,》《까치》,《몽》,《방》,《원두막》,《점경》,《수하》,《아이》등 유화 13점 출품.
1950년 (33세) 6.25발발 후 바로 피난가지 못하고 가족이 먼저 부산으로 피난.
1951년 (34세) 1월 초 부산으로 피난. 여름에 종군화가단(중동부전선 제8사단)에서 그림을 그리고, 종군작가상 수상.
1952년 (35세) 제4회 종군화가단전<3.1절 기념 종군화가미술전>(부산 대도회 다방)에 출품.
1953년 (36세) 피난지 부산에서 어린이 동화책의 컷을 많이 그리다.《자동차 있는 풍경》을 제작. 5월 말<제3회 신사실파전.
1954년 (37세) 3월, <제6회 종군화가전>(부산국제구락부>에 출품. 7월, 대한미협전<한국현대회화 특별전>에 출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 교수 취임. 동료 미대교수 노수현과 친분. 4녀 윤미 출생.
1955년 (38세) 「문학예술」지에 "발상과 방법"기고.
1957년 (40세) <동양미술전>(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58년 (41세) 11월 20일, 동경제국미술학교 동문전인 <백우회 제1회전>(국립박물관 화랑)에《樹下》를 출품. <한국현대작가전>(미국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60년 (43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 사임. 명륜동(2가 22-2)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
1961년 (44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 출신의 동문화가들인 권옥연, 유영국, 이대원, 김창억, 임완규 등과 '2·9동인회' 조직, 그<제1회 2·9동인전>(국립도서관 화랑)에 《산수》등 유화 2점 출품.
1963년 (46세) "덕소시절"(1963-75).
1964년 (47세) 차남 홍순 출생하다. 제1회 개인전(반도화랑, 11월 2일-8일)을 개최.
1967년 (50세) <제5회 앙가주망전>에 출품하는 등 서울대 제자들과 그룹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에 자극을 받음.
1968년 (51세) <제6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69년 (52세) 3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의 「書舍餘話」란에 수필 발표. ("표현", "죄가 있다면", "발산", "저항", "나의 주변")
1970년 (53세) 정초에 명륜동집에 머물던 중 아내가 불경공부를 하는 모습에 착상, 덕소로 돌아온 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아내의 초상화《진진묘》. 이 그림을 그린 뒤, 명륜동에 돌아와 3개월간 앓아 눕다.
1972년 (55세) <한국근대미술 60년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에 《모기장》등 4점 출품.
1973년 (56세) <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과 <제11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74년 (57세) 제1회 개인전 이후 십년 만에 제2회 개인전(공간화랑, 4월12일-18일)을 열고, 근작 중심의 유화 32점 출품.
1975년 (58세) 5월, 덕소생활을 청산 "명륜동시절"(1975-79)시작.
1976년 (59세) 불교인 백성욱 박사와 함께 시골의 사찰을 많이 찾아다녔고, 그 영향으로 《팔상도》와 《사찰》등의 작품을 제작. 잡지,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산문집『강가의 아틀리에』(민음사)를 발간.
1977년 (60세)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스님(1892-1982)을 만나 법명 비공(非空)을 얻다.
1979년 (62세) 차남 홍순 사망. <화집발간 기념전시회>(현대화랑, 10월11일-17일)에 유화25점, 판화 13점, 먹그림 18점 출품.
1980년 (63세) 봄, 수안보의 농가를 고쳐 화실로 사용, "수안보시절" (1980-1985)시작.
1981년 (64세) 개인전 직전에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백내장 수술. <장욱진 개인전>(공간화랑, 10월 11일-17일)에 유화 20여점, 에칭판화 5점 출품. <앙가주망 20년>1,2부에 출품.
1982년 (65세) 7월 중순, 부인과 함께 여류화가들의 미국여행에 동행. 이때 가지고 간 유화, 실크스크린, 에칭판화, 먹그림으로 재미화가 김봉태의 갤러리스코프(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장욱진전>개최.
1983년 (66세) 3-4월, 부인과 함께 처음으로 유럽여행(스페인,영국,이태리,프랑스). 근작 석판화 4점과 함께 판화집 출간기념<장욱진 판화전>(연화랑, 10월 22일-29일)개최.
1985년 (68세) 엔티크 컬러 사용을 중지하다. 수안보 화실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 <한국 양화70년전>(호암갤러리)에 출품. 기관지염으로 술과 담배를 끊다.
1986년 (69세) 겨울동안(1월 중순-2월 말)부산 해운대에서 제작한 유화 8점과 먹그림, 소묘 등으로 개인전<장욱진 작품전>(국제화랑, 6월 12일-19일)개최.
1987년 (70세) 2월, 대만과 태국을 여행. 화집발간 기념 개인전<장욱진전>(두손갤러리, 5월 28일-6월 6일)개최하다. 유화 80여점 출품.
1988년 (71세) 1월에 딸, 며느리와 인도로 여행, 뉴델리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 12월, 발리섬으로 여행.
1989년 (72세) 7월, 경기도 신갈의 한옥 옆에 양옥을 짓고 입주. 가을, <한국현대화전>(미국 뉴저지주 버겐 예술·과학박물관)에 유화8점 출품. <1900년대 한국미술대표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
1990년 (73세) 가을, 고향의 생가 방문. 미국 '한정판 출판사'The Limited Editions Club)선정 수제작(水制作) 한국관련 도서의 그림을 맡기로 위촉. 12월 27일 점심식사 후 갑자기 발병, 오후 4시 한국병원에서 타계. 12월 29일 영결식(오후 1시 수원 시립장제장).
1991년 3월, 후학들이 유골을 모신 기념비 건립(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 - 열화당미술문고 211/ 김형국 지음 / 열화당 / 1997년 - "나는 화가 장욱진이란 사람, 그리고 그의 그림을 사랑한다. 이 글은 바로 그 체험적 사랑을 적고 있다. 그림에 관해 학문적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사람이 이 글을 적는 것은 사랑이 글로 적을 만한 대상이고, 그 사랑이 체험을 글로 옮겨야 한다는 용기를 줄 만큼 높기 때문이다." 가격이나 판형 모두 가장 적당한 책이다. 장욱진에 대해서 알고 싶은 이들에게 대중적으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이다. 도판의 상태나 사진, 해설 모두 좋은 편이다. 나는 장욱진에게 있어 동생 테오 역할을 김형국 선생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사람 장욱진』/ 김형국 지음 / 김영사 / 1993년 - 장욱진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의 지인들이 모여 그야마로 그 사람 장욱진을 논한 책이다. 현재는 절판되었다고 하는데 소설가 강석경을 비롯해 쟁쟁한 여러 인물들이 자신이 만나본 장욱진의 여러 면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김형국 엮음 / 열화당 / 1999년 - 이 책에는 다른 책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욱진의 매직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장욱진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의 회고가 담긴 뒷 부분이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장욱진에게 시집와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동안의 삶과 애환이 잘 녹아 있다. 애써 고상이나 교양을 가장하지 않아도 예술가의 아내는 고상하다.
『장욱진 카탈로그 레조네 - 양장본』/ 정영목 지음 / 학고재 / 2001년 - '레조네(raisonne)'라는 것은 어느 작가의 '전작도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그리 흔한 개념이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진품인가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철저하게 제작되는데 반해서 그동안 우리 미술계는 너무 영세한 탓도 있었겠지만 주먹구구식의 작품 관리로 레조네는 엄두도 못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해 나온 장욱진의 레조네는 매우 의미있다. 게다가 그림 하나하나마다 제법 충실한 해설이 덧붙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당한 금전적 출혈이 있어야만 소장할 수 있는 책이다.
『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 장욱진 지음 / 민음사 / 1999년 - 장욱진 스스로가 쓴 글과 먹그림들이 녹아 있는 매우 고졸한 맛이 있는 산문집이다. 동심의 천진난만한 모습인 듯하면서도 치열한 예술혼으로 세상과 대결했던 화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쟁을 겪으면서 장욱진은 폭주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장욱진에게 술은 고통을 외면하는 방법이거나 잊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그림을 그리다 잠깐 동안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화가 장욱진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살았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장욱진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술을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간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때로는 식음을 전폐한 채로) 그림만 그렸다.
  그의 피난살이는 그의 자화상인 <보리밭>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가족을 찾아 텅빈 길을 걸어간다. 그가 걸어가는 길은 화면을 좌우로 나누고 구획짓듯 나뉘어 있고, 피난길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한 사내가 걸어간다. 그러나 길은 붉다. 장욱진이 피난에서 돌아와 집을 찾으니 살던 집은 죄다 부서지고, 화가의 그림들은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전쟁통에 오랫동안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장욱진과 부인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해야 했다. 화가는 잡지에 삽화를 그렸고, 부인은 조그만 책방을 차려 살림을 꾸려나간다. 전쟁을 통해 화가 장욱진에게 집이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되었다. 장욱진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도 장욱진은 화백이나 교수보다는 집 가(家)자가 붙은 화가로 불리기를 항상 희망했다. 그에게 그림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고 집은 그의 마음에 들어앉은 하나의 완성체였는지 모른다.
  화가와 가족들은 어려운 살림이기는 했지만 한데 모여 살게 되었고, 장욱진은 매우 행복해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의 모습을 작은 화폭에 옮겨놓기를 즐겨했다. 이 무렵 그린 작품 중 유명한 것이 <가족도>이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옹기종기 둘러 앉은 모습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교수라는 신분과 직업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미술이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고 몹시 따랐지만 장욱진은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그 자신의 감정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안주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이 무렵 장욱진의 동료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화가 이중섭이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병들어 먼저 세상을 떠난다. 장욱진은 그로부터 몇 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 때마침 4.19혁명을 앞둔 무렵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자주 시위를 했는데, 제자들이 매일같이 장욱진 곁에 모여들자 학교 당국은 그가 시위를 부추긴 것으로 추측했는데, 학교에서 불편해 한 탓보다는 그 자신이 떠나고 싶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족, 캔버스에 유채,17.5×20.0㎝, 1973 - 장욱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주제들이 거의 다 등장한 그림이다. 네 마리의 새, 집과 나무, 길과 가족. 뒤의 붉은 해와 산은 어찌보면 십장생도 같기도 하다.
강가의 아뜰리에
  청해서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몇 년 뒤 자신의 화실을 덕소에 꾸리게 된다.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사할 무렵만 하더라도 덕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다. 화가의 작업실인 아뜰리에에 이르는 동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곤 면장집 하나뿐인 시골,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 하는 오지에서 장욱진은 혼자 살았다. 화가는 훗날 회상하며 말하길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장욱진은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낭떠러지 같은 한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이곳 덕소의 비와 달, 바람 그리고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해길 즐겨했다.
  그는 스스로 입버릇처럼 늘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거짓으로 겸손한 척 하기보다는 정직한 교만 쪽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생각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거짓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페인의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와 화풍의 변모를 가리켜 사람들은 청색 시대니 장밋빛 시대니 하고 구분하듯이, 나무가 사시사철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모해가듯이 화가 장욱진의 작품 세계도 여러 차례 변해갔다. 그런데 장욱진의 변화가 다른 화가들과 좀 특이한 것은 사는 집이 달라질 때마다 그 세계가 조금씩 변해갔다는 것이다.
  앞서 장욱진에게 있어 집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지만, 그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자, 사람의 영혼이 깃드는 곳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살 집에 대해서 끊임없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화가에게는 자신이 살 집을 짓는 일도 곧 예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욱진은 집을 짓는 동안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만큼 집에 대해 애정을 보였다(그에게는 집도 작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보존상태가 매우 나쁜 형국이다). 화가 장욱진은 덕소에서, 서울 명륜동으로, 다시 수안보로, 용인으로 이사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화가는 덕소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그림이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고민했다. 화가는 동경 유학 시절, 서양화풍을 모방하는 일본 화풍을 따르지 않았고, 외국의 미술을 직접 살펴보면서 자신의 세계,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려고 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기도 수도도 없는 덕소에 갔지만, 덕소에서 그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이무렵 우리 화단의 유행이었던 모더니즘과 비교해서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기 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치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 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럴때 나는 물이 주는 푸른 영상에 실려 막걸리를 사랑해 본다.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
   그렇다, 취하여 걷는 나의 인생의 긴 여로는 결코 삭막하지 않다. 그 길은 험하고 가시덤불에 쌓여 있지만 대기의 들장미의 향기가 충만하다. 새벽 이슬을 들이마시며 피어나는 들장미를 꺾어들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인생의 벌판을 방황하는 자유는 얼마나 아프고도 감미로운가! 의식의 밑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는 허무의 서글픈 반주에 맞춰 나는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 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강가의 아뜰리에 전문, <1965. 8. 현대문학>  
그림을 통한 구도자와 동반자 진진묘
  욱진은 덕소가 예전의 풍경을 잃게 되자 결국 정들었던 강가의 아뜰리에를 떠나 다시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화가는 틈만 나면 시골의 자연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장욱진은 산 속의 사찰과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구했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부부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장욱진은 부인 이순경에게 옛날 만공선사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들려주곤 했다고 하는데 "머리를 깍여 불자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네가 하는 공부나 우리가 하는 공부나 모두 같은 길이니라.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 고 말이다. 장욱진은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늘 그리기만 하고, 전시회를 열어도 작품을 팔기보다는 정말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거저 달라고 하면 그냥 집어주길 좋아했다.
  화가로 생활해 나가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였기에 아내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던 장욱진은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던 만공선사의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어 미안함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장욱진은 불기 하나 없는 한 겨울의 덕소 화실에서 일주일간 밥을 굶어가며 아내 이순경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아내의 법명을 따서 제목을 정한 <진진묘(眞眞妙)>였다. 그림을 완성하고 화가는 3개월간 앓아 누웠다고 한다.
  장욱진이 평생을 두고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었다. 슬하에 2남 4녀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예술 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라고 말했던 그에게 가족은 더할 나위 없는 방패였고, 버팀목이었다. 아내가 그러했고, 그의 자녀들이 그랬다. 장욱진의 가족은 화목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 오십이 다 될 무렵 얻은 막내 아들은 화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만들었다. 뒤늦게 얻은 맏둥이 자식인지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석달이 지날 무렵 아이가 정신지체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자식이 병을 앓기 시작하자 화가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더욱 불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날 여름 통도사를 찾았다가 불력이 높은 것으로 이름난 경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경봉이 대뜸 화가에게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장욱진은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 답한다. 그러자 스님은 "입산을 했더라면 진짜 도꾼이 됐을 것인데"라 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은 길"이라 답한다. 그 대답을 듣자 스님은 "쾌(快)하다"라며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준다. 그리고 장욱진에게 선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장비공거사. 까악까악.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면 모든 진리를 자유롭게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며,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데서 부처의 모습을 본다"는 내용의 한시(漢詩)였다.
마음의 눈을 얻은 화가
  들이 병을 앓을 무렵 화가는 연이어서 가족과 아이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자식을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화가 부부는 아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5살 되던 1979년 결국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즈음 안국동 거리에서 미술사학자 김철순이 화가 내외를 만났다. 어딜 가느냐는 물음에 화가는 아무런 내색없이 태연자약하게 죽은 아이 사망 신고하러 간다고 말하더라고 회상하며, 하도 태연하게 말하길래, 역시 달관한 사람은 자식의 죽음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화가 역시 자식의 죽음을 몹시 가슴 아파했던 것이다. 장욱진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야 자신이 죽으면 아들을 화장해 뿌린 곳에 함께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승에서 못다한 부자간의 정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은 장욱진에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화가에게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 백내장이란 병이 생기면서 점점 시력을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마치 베토벤이 난청으로 결국 귀가 멀었던 것처럼 화가는 눈에 백내장이 생기면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전시회를 앞둔 장욱진은 자신이 제대로 점을 찍고, 바르게 선을 그었는지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력이 약화되는 와중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화가의 염려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수 십 년을 그림만 그려왔던 그의 손은 시력의 장애를 극복했던 것이다. 화가는 몸의 눈이 아니라 늘 마음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아왔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새처럼 살다 훌훌 떠나간 화가
  안보에서 용인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화가는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마치 다 자란 새가 자리를 털고 둥지를 떠나는 것처럼 훌훌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만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당신 성질처럼 푸드득,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다"고 회고한다. 푸드득, 그렇게 말이다. 화가는 생전에 "난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을 줄일 수는 없는 거고, 기능 없으면 죽어 버리는 게 좋아.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라고 말해 왔다. 그의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자연 속에서 나고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의 한 고리일 뿐 특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장욱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하루 전에 해묵은 종이 뭉치 속에서 먹그림을 가려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무런 미련없이 태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유골은 화장해서 앞서 간 자식이 있는 곳에 뿌려달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특별히 정리할 만한 짐이나 세간이 없는 단촐한 그의 방이었는데도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늘 깔끔하게 정리해두길 좋아했다. 그런 성정 탓인지 아니면 정말 고승대덕들이 그러했다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탓인지 그는 자신의 그림들과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훌훌 떠났다. 하지만 장욱진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전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차마 그의 유골을 뿌릴 수가 없어서 고향 마을에 탑비를 세우고 그 안에 유골을 모시게 했다. 그 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실일년 사월.
동심의 시선으로 발견한 우리의 아름다움
  가 장욱진은 생전에 불교의 세계와 좀더 가까운 사람이긴 했지만 늘 기독교의 진리와 불교의 진리는 다르지 않다는 말을 했다. 예수는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화가는 늘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화가는 늘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일곱 살이라고 말하며 살았다. 그런 화가였기 때문에 장욱진의 그림은 작고 소박한 화폭에 단순한 주제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그는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 며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이나 회화와 도자기, 판화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다만 예술과 생활 안에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화가는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와 가족을 그렸다. 우리 미술에서 나무를 즐겨 그린 화가는 장욱진 말고 박수근도 있었다. 박수근이 캔버스에 여러 번 유화물감을 덧칠하는 마티에르 기법이란 것을 사용해 나무를 그린 것과 달리 장욱진은 이미 칠해 논 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법으로 나무를 그렸다. 하지만 박수근의 나무들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헐벗은 나무였던 것과 달리 장욱진의 나무들은 풍성한 잎사귀로 넘치는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다른 화가 이중섭과 장욱진은 모두 가족을 즐겨 그렸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했지만 이중섭의 아내는 일본인이었고, 그런 탓에 이중섭은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가족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장욱진은 이중섭보다는 행운아였다.
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채, 41x32cm, 개인소장 -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장욱진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과 다르다. 1951년에 그려진 작품인 자화상 <보리밭>에서 서양식 모던한 신사 복장을 하고 있던 화가는 그후 40여년이 흐른 뒤 74세가 된 화가는 집과 아이, 까치와 나무를 저 밑으로 한 채 신선처럼 부유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길을 걷고 있는 듯이 보인다.
  새를 즐겨 그린 화가로는 장욱진 말고도 오윤이 있다. 장욱진의 후배격인 오윤은 판화를 즐겨 하는 화가였다. 오윤의 새도, 장욱진의 새와 비슷한 의미를 담았지만 장욱진의 새는 좀더 밝고 희망적이었다. 장욱진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늘상 보고, 만질 수 있었던 자연과 사람을 풍성한 생명과 밝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그가 보았던 현실일 수도 있고, 그가 염원했던 세상일 수도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숲 속 작은 오솔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까치를 보면서 저 새 한 마리가 담고 있는 우리 네 삶의 가치와 존엄한 생명과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러 온 메신저였을 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 하늘과 인간, 세상과 나라는 존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말이다. 

Fine Art

세속도시에서 신선으로 살다 간 화가. 장욱진



세속도시에서 신선으로 살다 간 화가. 장욱진



만공 선사
나혜석
김은호
김환기
앙투완느 부르델
이중섭
오윤
권진규
마르크 샤갈
하비 콕스
   끔 동양의 '신선(神仙)'이란 개념을 서양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상상해본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좀더 다양한 의미와 진폭을 가진 개념일 '사부'나 '스승'이 그들에게는 'My Master' 정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면 분명 '신선'의 개념은 애니미즘의 일종이나 샤머니즘의 한 부류, 도가(道家)적인 느낌의 말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한국인으로 교육받지 않은 이들)에게 우리의 '신선'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신선'이란 '조선의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마을 뒷산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툇마루 한켠에서 곶감 이야기에 놀라 달아나는 친숙하고 어리숙한 대상이자 동시에 산을 수호하는 신령스러운 짐승인 것처럼 매우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마찬가지로 화가 장욱진을 설명한다거나 설명하려는 시도가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장욱진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화가들과 비교하자면 행복한 화가였다. 시대는 그에게 좀더 긴 삶을 허락했다. 장욱진에게는 이중섭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아내가 있었고, 박수근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살아 생전의 명예가 있었고, 김환기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고국에서의 삶이, 추상도, 구상도 아닌 동양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있었다. 장욱진은 생전에 아내와 가족은 물론 그를 사랑하는 제자, 친구, 수많은 지인들이 곁에 있었다. 그 점만 놓고 보자면 그는 우리의 시대적 한계와 주변의 무시 속에 숨쉴 공간을 얻지 못하고 사라져 간 조각가. 권진규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평안함이 있다.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라는 개념은 미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에 의한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기독교가 신학적, 교회적 편견(이를테면 세상을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으로 단정하고, 교회와 신학을 성서와 교회 내의 문제만을 다루도록 하는 태도 등)에 젖어 보수화되어 버린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그 대안 개념의 하나로 '교회의 세속화'를 부르짖은 인물이다(나중에 차차 다루겠지만).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콕스의 이런 주장은 '해방신학'에도 영향을 준다. 장욱진이 태어나 살아갔던 시대는 소위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 민족이 5,000년 역사를 일구며 살아왔던 이 땅에서 호랑이의 씨가 마르고, 까치가 동네 어귀의 나무에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메신저의 위치에서 쫓겨나 아파트 인근 공원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시기였다. 콕스에게 있어 '세속도시'란 신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다시 신에게 다가설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성립하는 '인간의 도시'란 점에서 긍정적이었지만 장욱진이 살아야 했던 시대는 까치 한 마리로 신의 세계, 인간의 영과 혼이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세속도시화였던 셈이다.
ch-005.gif
수하(樹下), 1954, 캔버스에 유채, 33x24.7cm, 개인소장 - 장욱진은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 가족을 즐겨 그렸다. 위 그림을 보면 풍성한 잎사귀가 매달린 나무와 그 나뭇가지에 앉은 네 마리 새 그리고 그 나무 밑에서 편하게 누워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을 관찰하면서 나무가 지닌 신비한 생명력에 감동하곤 했다. 그래서 나무가 자라는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 사는 민족들은 저마다 나무에 대한 전설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도 신단수라는 신령스러운 나무가 등장하는 것과 같다. 나무는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이자 사시사철 변치 않는 상록수는 영원한 생명을, 철마다 변화하는 나무들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장욱진은 이런 나무와 새를 통해 생명에 대한 애정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그린 화가이기도 했다. 위의 그림에서처럼 사람은 나무 밑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오랜 명상 끝에 도를 깨우쳐 부처님이 되었다. 어찌보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벌거벗고 드러누워 그의 시선으로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는 것같고, 어찌보면 석가모니 부처가 득도한 뒤 득의만면한 미소를 띄운 채 잠시 쉬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저 하늘은 과연 어떤 것일런지.







진진묘, 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 - 1970년 1월 3일 불경을 외우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덕소로 돌아가 7일 낮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그렸다는 아내의 초상화 그림이다. 아내의 모습에서 불성을 발견한 것이겠지만 그냥 보아서는 불화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림이 참 묘하다. 표정하며 자세하며 아내같기도 하고, 보살같기도 하고.....그래서인지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화가는 몇 개월동안 앓아 누웠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화가의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긴 화가는 이를 두고두고 아까워했다고 한다. 화가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되는 작품이다.







ch-003.gif
부엌과 방, 캔버스에 유채, 22.0×27.0㎝, 1973 - 마치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한 부분을 보는 것처럼 단순화된 그림이다. 이 그림이 내게는 꼭 남편과 아이는 밥달라고 보채는데 부엌에는 더 이상 먹을 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아 시름에 젖은 아내의 모습 같다.








ch-004.gif
노인, 1988, 캔버스에 유채, 35x35cm - 해와 달과 소와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노인이 각기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ch-001.gif
자화상(일명 보리밭) 종이에 유채 14.8x10.8cm 1951 
 

 
자화상(自畵像)의 변(辯)
" 일명「보리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자상自像이다.
1950년대 피난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되었다. 나의 일생에서 붓을 못들은 때가 두 번 있었는데 바로 이때가 그중의 한번이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한되들이)을 들고 용두산을 새벽부터 헤매던 때가 그때이기도 하다.
고향에선 노모님이 손자녀를 거두시며 계시었다. 내려오라시는 권고에 못이겨 내려가니 오랜만에 농촌자연환경에 접할 기회가 된 셈이다. 방랑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감 몇 개 뿐이지만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 「나룻터」,「장날」,「배주네집」. 이「자상自像」은 그중 하나이다. 많은 그림들이 그 역경 속에서 태어났니 동네사람들이 가인이라 말하도록 두문불출, 그리기만 했던 것이다. 간간이 쉴 때에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들러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 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畵廊 1979년 여름호>
 
 Fin

  그렇다면 과연 장욱진은 신선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기원과 소원 성취라는 방식으로 상호교감하며 소통해왔던 개념, 인간과 자연이 강제로 구분되지 않던 시대의 인간으로서 세속도시에서 행복할 수 있었겠는가를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은 다소 불경스럽긴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작품 <헤이세이 너구리대전쟁 폼포코>에서 인간에게 자연을 빼앗겨 도시로 숨어들어 살아야 하는 너구리들을 상상해보시길. 음, 아무리 생각해도 불경스럽긴 하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경험하다 - 아버지의 죽음
  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백두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다 양 갈래로 금북정맥과 한남금북정맥으로 나뉘는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 전통적인 한옥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가 있었다. 앞으로는 부용산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이어지는 미호천이 흐르고, 안채 뒤로는 높다랗게 솟아난 나무 위로 까치집이 있는 이 한옥은 장기용, 이기재 부부의 살림집이었다. 장욱진은 이들 부부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은 선친 때부터 제법 재산을 모은 부유한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의 농사 일을 거드는 틈틈이 스스로 병풍을 만들고, 거기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장욱진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에게도 틈틈이 습자를 하게 했고, 그 가운데 잘된 것이 있으면 벽에 걸어두고 이를 지켜보며 흐뭇해했던 자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아버지가 시서화를 즐겼고, 또한 멋쟁이었다고 회상하며, '흰 구두에 중절모 차림으로 마실 나가는 아버지의 저고리 한쪽으로 번쩍이는 회중 시계가 보일 때면 아버지의 모습이 참말로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어린 장욱진의 집에는 종종 이름있는 승려들의 내왕이 있었을 만큼 불교와의 인연이 깊었다. 그것은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의 집안이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의 집안이 비교적 재산도 넉넉한 편이라 인근 사찰에 물질적인 시주도 종종했기 때문이다. 단지 물질적인 시주뿐 아니라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지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은 고향 마을 부근의 명사찰인 수덕사의 이름높은 선승인 만공 스님의 제일 가는 신도 중 한 사람이었다. 화가의 아버지는 자녀의 신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시집 간 누이의 설득에 따라 일가족으로 모두 서울로 이사하게 했다. 이때가 장욱진의 나이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데 화가가 일곱 살 나던 해인 1923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염병에 걸린 친척 문병을 갔다가 거기서 병에 옮아 고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젊은 나이에 혼자된 어머니와 장욱진의 가족은 서울에서 고모의 돌봄을 받아야 했는데, 막내 동생 시진은 유복자였다. 장욱진의 형제는 모두 4명이었다. 둘째로 태어난 장욱진은 아버지가 안 계신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맏형을 아주 어려워하고 따랐다. 그리고 밑으로 동생 성진, 시진이 있었다.
  그가 까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인류는 원형상징  체계에서 새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고가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어린 장욱진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징이라는 것이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경험 이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까치 혹은 새가 훨훨 날아오르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여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장욱진에게 까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나무 가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였거나 자신을 세상에서 훨훨 자유롭게 만드는 존재였을 것이다.
호랑이 큰 고모와 화가로서의 입문 과정
  버지의 죽음 뒤 장욱진 가족의 살림살이는 고향의 둘째 큰아버지가 보내주는 살림과 호랑이같은 고모의 돌봄이 컸다. 큰 고모는 이들 형제의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장욱진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자식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을 만큼 강한 분이었지만 시누이인 고모 앞에서는 늘 시집살이하듯 살아야 했다. 남편 없이 아들 사 형제를 교육시키고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장욱진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낼 무렵 우리나라는 아직 일본의 식민지였다.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장욱진은 이때에도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하지만 그림이라면 당연히 그리는 대상과 꼭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일본인 교사들은 장욱진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그의 미술 성적은 늘 병(丙)에 머물렀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늘 그림을 그리던 장욱진이었지만 호랑이 같은 고모는 공부는 안하고 늘 그림에만 몰두하는 어린 장욱진을 야단치곤 했다. 그런 탓에 장욱진은 고모 몰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치 바흐가 그러했듯이 방문을 잠그고 몰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에서 새로운 미술 선생이 부임해 왔다. 그는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해온 선생님이었다. 그는 장욱진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비범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하는 '전국 소학생 미전'에 내보내도록 해주었다. 전국 소학생 미전이라는 것은 당연히 일본과 조선을 통틀어 미술에 재능있는 초등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회였다. 장욱진은 이 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았고,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상장을 수여받는 행사를 치렀다. 그는 훗날 상에 대해서 '어린 나이에 상을 주어 칭찬해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은 좋지만 상이란 것이 예술가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런 수상 실적은 미술에 대해 그다지 조예가 없는 교사들도 그의 그림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는지 이후 그의 미술 성적은 거의 갑(甲)이었다.
 장욱진은 14살이 되어서 경성제2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장욱진은 그다지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올바르지 못한 일은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3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일본인 역사 선생이 공정치 못한 일을 하자 여기에 대들어 따지다가 결국 이 일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역시 그 선생도 문제가 있었던지 만주로 쫓겨가게 되는데 나중에 감옥에 가고 말았다고 한다. 어쨌든 학교에서 쫓겨난 장욱진은 주변의 화가, 조각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의 아뜰리에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장욱진의 고모는 그가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그림만 그린다고 장욱진의 종아리를 때렸다. 고모는 "세상에서 첫째, 둘째가는 화가가 되면 모를까"하면서 때렸지만 장욱진은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좀 더 큰 세계와의 만남 - 만공선사
  연의 일치이긴 했지만 호랑이 같은 큰 고모에게 종아리를 맞은 얼마 뒤 장욱진은 전염병인 성홍열을 앓게 되었다. 요양을 위해 장욱진은 가족들과 떨어져 예산 수덕사로 떠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가 열일곱살 때였다. 그곳에는 옛날 그의 아버지와도 인연이 깊었던 만공 선사가 있었다. 만공선사는 경허의 제자로 일제 시대 때 조선불교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분이었다. 만공은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불교 회의에서 당시 일제의 불교 정책에 반대하며 데라우치 총독이 듣는 앞에서 "전 총독 미나미는 한국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고 말할 만큼 민족의식과 기개가 높은 이였다. 장욱진은 수덕사에서 요양하는 동안 만공선사의 방에서 머물면서 때마침 그곳을 찾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나혜석은 한때 함께 활동했던 일엽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던 차였다. 일엽은 본명이 김원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인 <신여자>를 만들었던 이로 기독교 집안 출신의 신여성이었지만 뜻한 바가 있어 출가한 이였다. 만공은 나혜석으로 하여금 경내에는 머물지 못하게 하고 일이 있을 때만 오가도록 했다고 한다.
  장욱진이 수덕사의 아름다운 대웅전(혹자는 몬드리안의 그림보다 더욱 아름다운 면구획이라고 평했다지만 보면 그 평과는 상관없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건축물이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만공과 나혜석을 통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나혜석은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자신이 그린 그림보다 좋다고 칭찬해주었다고 한다. 만공은 장욱진을 출가시키려고 했지만 그의 뜻과 재능이 불도보다는 그림에 있음을 알고 "네가 하는 일과 불도에서 하는 일이 똑같다"는 말을 하며 출가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반년간의 수덕사 요양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936년 봄 양정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양정고등학교) 3학년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양정고등학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동양인 최초로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 선수의 출신 학교였다. 장욱진은 당시로서는 키도 컸고, 체격이 좋아서 높이 뛰기와 빙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장욱진은 운동보다는 그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양정고보 4학년 때인 1937년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학생 미전에서 그의 작품 두 점이 가작상을 받았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때 심사위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고희동을 비롯해 조각가 김복진, 이당 김은호 등이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상이란 것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남의 평가보다는 자기 자신의 만족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받은 상을 누구보다 내심 기뻐했던 사람은 그의 고모와 가족들이었다. 상금 백원을 받은 장욱진은 그 돈으로 고모에게 비단 옷감을 끊어 드렸다. 조카 장욱진이 최고상을 받아오자 결국 고모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세계에서 첫째 가는 화가가 되려면 모를까"라며 이때부터 화가가 되려는 장욱진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장욱진의 노력과 재능이 완고했던 가족의 반대를 무너뜨리고 일본 유학까지 후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동경유학생 장욱진의 조국
  1939년 양정고보를 졸업한 장욱진은 먼저 일본 유학을 다녀 온 형의 도움을 얻어 그 해 4월에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우리 민족 정신을 없애기 위해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의 이름과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제했다. 장욱진의 집안도 결국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욱진은 일본에 가서는 오히려 창씨개명 전의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에 유명한 미술학교는 동경미술학교를 비롯해 몇 군데가 있었지만 장욱진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들은 대개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왜냐하면 이 학교는 일본 역사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학생들은 민족 의식의 발로로 일본 국사를 무시해 공부하지 않았고, 그림에 학력이 무슨 관계냐는 생각에서 일부러 제국 미술 학교를 찾았다. 더군다나 제국 미술 학교는 신진 학교였기 때문에 교풍이 다른 학교들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예술은 자유로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학생들은 이 학교를 선호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장욱진에게는 제국미술학교의 교육 역시 답답했다. 이 무렵 일본은 자신들의 중국 침략 행위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로 인해 서구 제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이들과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점차 강화되는 군국주의 기운은 국수주의를 불러 일으켜 모든 일본적인 것이 가장 애국적인 것이라고 강요했다. 때문에 일본풍을 따르지 않는 장욱진의 그림은 일본인 교수들에게 늘 꾸지람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당시 일본은 서양에 수많은 유학생들을 보내며 그들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본은 서구의 정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들의 화풍과 사조를 따라가는 데 더 급급했고, 어떤 것은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이 자랑하는 서양화가들의 상당수가 오늘날엔 다만 서구 화풍의 아류로 분류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그것은 우리 미술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새의 세계와 고향의 야트막한 언덕들과 군더더기 없는 우리의 건축 양식을 보면서 서양의 것이 아닌 우리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한 장욱진에게 꽉 막힌 것 같은 일제 시대의 대학 생활은 매우 고달픈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장욱진은 이런 괴로움을 나중에 자신의 제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을 멋대로 그린다고 일본에서 공부할 때 선생들이 지적했다. 그때 주위에서 내 그림에 일본풍이 안 보인다고 싫어했다."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 장욱진과 그의 친구들인 조선인 유학생들은 민족 감정 때문에 일본 학생들과 자주 다투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늘 조선인 학생들만 경찰에 잡혀가야 했고, 심지어는 일본인 경찰들이 조선인 유학생들의 하숙방까지 수색하거나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서 무얼 그리고 읽는지 감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장욱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일본인 교수와 동료 학생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조각가 앙투완느 부르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와 기우치 요시 같은 이들은 장욱진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며 제자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장욱진은 이런 일본인 선생님들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앞서 자신의 제자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멋과 그림을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혀 나간다. 그는 유명한 누군가의 제자로, 누군가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걸어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매우 힘들고 고독한 길이었다.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가야하는 선구자에 대한 사회의 처벌.
전쟁의 슬픔에 취하고, 술로 휴식을 얻은 화가
  욱진은 일본 유학 중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맏딸 이순경과 결혼했다. 이병도는 우리 역사학의 태두이자 우리 역사를 실증사학(어찌보면 싫증사학이지만)이라는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고정시킨(더욱 큰 문제는 사관이 없다는) 책임이 있다고 비판을 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사관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할 때, 우리 학자들이 모여 이에 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것이 '진단학회'였다. 한국어 사용조차 금지당하는 시대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학회를 이끌고 '진단학회보'를 만든 업적은 후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해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긍정적이었다. 어쨌든 장욱진은 이순경과 결혼한 뒤 평생토록 변치 않는 사랑을 함께 했다. 늘 혼자였던 까치에게 가족이 생긴 것이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장욱진은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일제 징용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그가 징용에 끌려간 지 9개월만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에 대한 장욱진의 반감은 매우 컸다. 그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외국 여행 중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해야할 때라도 자신은 일본말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은 찾아왔지만 아직 나라의 꼴이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고, 화가가 할 만한 일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이제 여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장욱진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였을 것이다. 때마침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장욱진은 박물관 직원으로 개성과 경주의 고분 발굴 작업에 참여하며 우리의 옛날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이건 순전히 추측이지만 그의 특징적인 회화 기법 중 하나인 캔버스에 밑칠을 해놓고, 그림을 그린 뒤 유화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식의 유화들에서는 어쩐지 고분 벽화의 느낌이 든다. 벽화가 프레스코 기법이랄 수 있는 회칠된 벽이 채 마르기 전에 색채 물감을 이용해 채색이 벽 안쪽까지 침투해 들어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캔버스에 밑칠을 한다는 것이 그렇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 캔버스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만드는 것은 고분의 채색이 떨어져 나간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음, 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읽은 그와 관련된 서적이나 논문에서는 그가 고분 벽화 발굴 작업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해석을 가한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추어 감상자인 입장에서 다만 추측이라고 단서를 달아둔다. 누군가 미술평론을 전공하는 이가 있다면 한 번 연구해 주었으면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 선조들의 공예품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감상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든 무능하다는 혹평을 들었기 때문이든 얼마 안가 자의로 박물관을 그만두었다. 그의 천성이 조직생활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일을 그만둔 장욱진은 동료 화가들과 모임을 만들어 열심히 작업에만 몰두했다. 일본의 식민지를 막 벗어난 신생공화국의 활기는 모두에게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이때 그와 함께 활동한 화가들은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으로 이제는 모두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었다. 장욱진은 좌우이념의 혹독한 대립 속에서 좌, 우 모두로부터도 손짓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을 먼저 피난보냈지만 자신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장욱진은 혼자 피난을 떠나기 전에 잠시 인공 치하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넥타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더 이상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이것이 장욱진에게 해당하는 일은 아니지만 당시 남한 사회의 문화·예술계 인사들 중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았던 일부는 북에 대해서 혹은 북의 체제에 대한 호기심에서 부러 피난을 늦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화가는 피난 시절 한동안 교편을 잡기도 하고, 전쟁 그림을 그리는 종군화가단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장욱진은 그때 종군화가상을 받았는데 상장은 버리고, 상금만 들고 와서 술이나 마시자고 외쳤다고 한다.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전쟁을 그리고 받은 상장과 상금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던 것이다. 화가 장욱진의 일생은 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그토록 폭주(爆酒)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부터의 일이었다.

  Fine Art

2017년 6월 18일 일요일

자사고·외고 폐지에 브레이크 걸리나.."폐지 명분 없다" 반발

외고·자사고 폐지에 대해 국내 대표적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5곳이 18일 폐지 반대 입장을 밝혔다.
민족사관학교와 광양제철고, 상산고, 포항제철고, 현대청운고는 이날 '자사고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자사고 진학 준비가 사교육 유발 요인이라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며 “운영상 문제점은 개선하고 미비점을 보완해 제도를 발전적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찾아야지 일부 문제를 침소봉대해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보도자료를 낸 학교들은 전국 46개의 자사고 중 2001년 김대중 정부가 자립형 사립고 정책을 발표한 뒤 탄생한 원조 자사고들이다.
자사고가 중학교 학생들의 사교육비 부담을 늘린다는 주장에 대해 이들은 “자사고는 중학교 내신과 상관없이 선지원 후 정원의 1.5배수를 추첨으로 선발한 뒤 면접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며 오히려 “자사고는 입학전형에서 지필평가와 교과지식 질문을 금지해 전형 준비를 위한 과외 등 사교육 유발 요인을 오히려 낮췄다”고 설명했다.
자사고가 대입 준비학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명문대 합격률이 높다고 입시준비 기관으로 폄하하는 것은 사실 왜곡”이라며 “실력 편차가 크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내실 있는 수업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 성과”라고 반박했다.
이어 "고교평준화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수월성 교육을통해 평등성 교육에서 오는 문제점을 보완해야만 미래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다”며 “자사고 폐지 시 조기 해외유학에 따른 외화유출, 중·소도시 자사고 폐지에 따른 지방교육 황폐화 등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사고들의 반발이 가시화함에 따라 당장 재지정 시기를 맞은 학교들의 움직임에 귀추가 주목된다. 외고와 자사고는 5년마다 학교 운영평가결과를 바탕으로 교육감이 재지정 여부를 결정하며, 기준 점수에 미달하면 지정을 취소할 수 있다.
올해는 서울의 서울외고와 장훈고·경문고·세화여고, 대전의 대신고가 등 5개의 외고·자사고가 재지정 발표를 앞두고 있으며, 서울시교육청은 오는 28일 외고·자사고 폐지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다. 시교육청은 같은 날 서울외고와 자사고인 장훈고·경문고·세화여고, 특성화중학교인 영훈국제중 등 5개 학교의 운영성과 평가 결과도 발표한다. 이들 학교는 지난 2015년 평가에서 기준 점수(60점) 미달로 이번에 재평가 결정을 받게 된 곳으로, 이번 평가에서도 60점 미만을 받으면 지정이 취소될 수 있다. 내년에는 세종의 세종국제고와 충남 삼성고가 재지정 대상이다.
박삼옥 상산고 교장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자사고 5곳이 의견을 모았다”며 “ 수월성 교육을통해 평등성 교육에서 오는 문제점을 보완해온 자사고는 고교 교육 전반과 국가균형발전에 크게 공헌해왔다”고 전했다. 
세계일보 

민사고 등 5곳 "자사고 폐지 명분 없다" 본격 반발

게티이미지뱅크
국내 대표 자율형사립고 5곳이 문재인 정부가 공약하고 일부 시ㆍ도교육감이 추진하는 외국어고ㆍ자사고 폐지 정책 반대 입장을 밝혔다.
민족사관학교와 광양제철고, 상산고, 포항제철고, 현대청운고는 18일 ‘자사고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자사고 폐지를 논하는 이들의 명분은 자사고가 사교육을 부추기고 대입 준비 기관으로서 학교를 서열화한다는 것이지만, 자사고 본질을 터무니없이 왜곡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밝혔다.
이들은 자사고는 중학교 내신과 상관없이 선지원 후 정원의 1.5배수를 추첨으로 선발한 뒤 면접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 때문에 자사고 진학 준비가 사교육 유발 요인이라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설명했다. 또 “명문대 합격률이 높은 것만으로 입시준비 기관으로 폄하하는 것은 사실 왜곡”이라며 “실력에 큰 편차가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내실 있는 수업과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한 성과”라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운영상 문제점이 있다면 개선하고 미비점을 보완해 제도를 발전적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자사고가 없어질 경우 조기 해외유학에 따른 외화유출, 중ㆍ소도시 지방교육 황폐화 등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도자료를 내놓은 학교들은 2001년 김대중 정부가 자립형 사립고 정책을 발표한 뒤 탄생한 대표 자사고들이다. 특히 5개 학교는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하는 곳으로, 대학입시에서 국내 상위권 대학 진학률 및 외국 대학 진학률이 높은 곳이다.
박삼옥 상산고 교장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자사고 5곳이 의견을 모았고, 다른 학교와는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지만 폐지 반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으며 대부분 비슷한 입장일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일보

2017년 6월 7일 수요일

"써야 생각한다"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이라는 게 있다.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글솜씨를 발휘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1993년 미국 록펠러대학이 제정했다. 역대 수상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네 명이나 됐다. 아인슈타인도 글을 잘 썼다. 우연이 아니다. 생각을 체계적·합리적·논리적으로 펼치는 것은 무엇을 하든 필수다. 미국 의대 시험에서도 에세이를 중시하는 이유다.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서구 고등교육의 근간은 수사학(修辭學)이다. 글로든 말로든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방송을 보면 길 가는 아무한테나 마이크를 들이대도 자기 생각을 풍부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그저 "너무, 너무" "… 같아요"만 연발한다. 앞뒤가 뒤죽박죽이어서 글로 옮겨 놓으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도 없다. 때론 한국어를 배운 지 3~4년 된 외국인이 우리보다 더 조리 있게 한국말을 하기도 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우리도 예부터 글을 잘 쓰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걸 강조했다. 이런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다 한국에 들어온 사람 불만 중 상당 부분이 글쓰기 교육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식 문제 한두 개 맞히는 데 목숨 거는 세상에선 글쓰기 교육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이상해진다.
▶올해 초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신입생 글쓰기 평가를 했더니 39%가 70점 미만을 받았다. 주제를 벗어난 데다 비문(非文)에 맞춤법도 엉망이다. 채점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나 제대로 평가하면 점수는 훨씬 더 떨어질 것이다. "거시기하다"는 등 비속어, 인터넷식(式) 엉터리 문체가 과제물에 넘쳐난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요즘 신입 사원은 영어보다 국어 실력이 문제"라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20년간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한 낸시 소머스 교수가 그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프로가 되려면 글쓰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라. 그래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신입생은 한 학기 적어도 세 편 에세이를 쓴다. 교수가 일일이 첨삭 지도한다. 사회에서 리더가 된 졸업생에게 '성공 요인이 뭐냐'고 물었더니 가장 많은 답이 '글쓰기'였다. '능력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이란 질문에 대한 답도 단연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다. 생각의 근력(筋力)을 키우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이 없는 사회는 주관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냄비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갈등도 빈발한다.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우리 모습 아닌가.
조선일보

학교 운동장이 이렇게 비어갑니다

이토록 심각했나… 인구절벽의 현장

고교 신입생 매년 10% 이상 줄어

1980년 1440만명이던 학령인구, 올 846만명으로 거의 반토막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끌어왔던 인적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조회 시간에 '양팔 간격으로 벌려'를 못 했습니다. 그러면 운동장 맨 가 학생들이 교문 바깥으로 밀려나니까요. 운동회 때는 운동장이 장터보다 혼잡해 부모를 잃어버리기 일쑤였지요."

1967년 충북 보은군 삼산초등학교를 졸업한 김학부(63)씨는 "당시 삼산초는 한 반 70여 명씩 전교생이 2500명이 넘어 보은군에서 가장 컸다"고 회상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양팔간격'땐 교문밖으로 밀려났던 삼산초등학교… 지금은 사람 모자라 축구도 제대로 못해요 - 충북 보은군 삼산초등학교는 1960년대 전교생이 3000명 가까이 됐지만 지금은 16분의 1 수준인 180여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1966년 운동회 때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운 풍경〈왼쪽〉과, 지난 2일 등교한 학생들이 모두 모였어도 운동장이 빈 듯한 모습이 대조된다. 1966년 당시와 같은 각도에서 찍었다. 올해 학령인구(846만명)는 1980년(1440만명)의 59% 정도로,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의‘인구 동력(動力)’이 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신현종 기자
그러나 이 학교 풍경은 50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지난달 18일 삼산초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하던 1학년 2반 학생들은 전원이 14명에 불과했다. 대여섯명이 운동장 한쪽 골대에서만 공 차며 놀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는 담임교사까지 가세해서야 겨우 3명을 채웠다. 한때 3000명에 가깝던 전교생이 180여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대한민국의 '인구 동력(動力)'이 꺼져가고 있다. 1980년 1440만명이던 학령인구(6~21세)는 올해 846만명으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2040년 640만명, 2060년엔 480만명으로 급락한다는 게 통계청 전망이다. 전체 인구 중 학령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1970년 39.1%에서 올해 16.4%로 감소했다. '미니 학교'도 속출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신입생이 '0명'인 초등학교는 113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는 7개교였다. 김재철 한국교총 대변인은 "인적 자원으로 성장해온 대한민국이 학생 감소로 '무(無)자원 국가'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학령 인구 추이
올해 삼산초 신입생은 30명이다. 그나마 이 학생들을 유치하느라 교장·교감이 읍내 유치원을 찾아다니며 입학 설명회까지 열었다. 동문회도 4000여 장 홍보 전단을 찍고 "108년 전통 삼산초는 선배들이 든든하게 받쳐줍니다"라며 거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이 학교 박인자 교장은 "어떻게든 12학급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상황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학령인구 감소는 고교→중학교→초등학교로 갈수록 심각한 후유증을 낳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전국 초·중·고 가운데 신입생 10명 이하인 '미니 학교'는 고교(전체 2360곳)는 24곳(1%), 중학교(3237곳) 376곳(11.6%), 초등학교(6177곳)는 1475곳(24%)이다. 신입생이 1명 이하인 곳은 고교 8곳(0.3%), 중학교 27곳(0.8%), 초등학교 225곳(3.6%)이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중·고교도 2001년부터 시작된 초저출산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전북 익산시 함열고 송갑석 교장은 지난 3월 신입생 입학식 때 운동장에 학년별로 선 학생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3학년 91명, 2학년 96명인데 신입생은 31명에 불과했다. 송 교장은 "익산시내 26개 중학교 3학년생이 올해 500명이 줄었는데, 내년엔 올해보다 300명이나 또 준다니 내년이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2001년(올해 고1)부터 시작된 초저출산(합계출산율 1.3명 이하) 현상이 16년째 이어지면서 빚어졌다. 현재 고2인 2000년생(63만명)은 '밀레니엄 베이비'로 1999년생(61만명)보다 2만명 더 태어났지만, 2001년생이 55만명으로 떨어진 뒤 2002·2003년생 각각 49만명, 2004년생 47만명, 2005년생 43만명 등 신생아가 크게 줄었다. 현재 고2는 신생아 60만명 세대의 마지막, 고1과 중3은 각각 50만명 세대와 40만명 세대의 첫 주자가 된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줄어드는 학생들… 고2는 '밀레니엄 베이비' 반짝 늘어 - 전북 익산 함열고등학교는 3학년 91명, 2학년 96명, 1학년 31명 등 전교생이 218명이다. 지난 2000년‘밀레니엄 베이비’로 태어난 2학년이 3학년보다 조금 더 많지만, 올해 입학한 1학년(2001년생) 학생들은 선배들의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줄었다. 우리나라는 2001년부터‘초저출산’이 시작돼 16년째 진행 중이다. 지난달 23일 등교한 함열고 학생 대부분이 운동장에 나와 줄지어 섰다. /이진한 기자

본지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을 통해 올해 고교 신입생 입학 현황을 조사한 결과, 신입생이 2학년보다 5만7000명이나 줄어든 52만4500명이었다. 경기(1만4100명), 서울(1만1100명), 부산(3628명), 대구(3198명) 순으로 대도시 학교의 감소 폭이 컸다. 내년엔 예상 신입생이 올해보다 6만3000여 명이나 줄면서 상황 악화가 불가피하다. 서울과 경기는 모두 1만2000명씩 더 줄어들 상황이다. 일부 전문가는 "학급 수와 학급 인원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초저출산 세대들이 고교를 졸업하면 도미노가 무너지듯 대학과 군 입대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재 고1이 대학에 진학하는 2020년에는 졸업생 수(52만명)가 현재 대학 정원(51만명·전문대 포함)과 비슷해진다. 2024년에는 고교 졸업생 수가 42만명으로 뚝 떨어진다. 대학진학률(69.8%)을 따지면 실제 대학 진학자가 29만명 수준으로 4년제 대학 정원(32만명)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또 군대에 갈 20세 남성(1997년생)은 현재 35만명인데 2002년생은 25만명으로 10만명이나 줄어든다. 조선일보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알파고, 그다음은… 의료·법률·과학 등 인간이 찾을 수 없는 해법까지 도전한다

새로운 알파고엔…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전용 반도체칩 텐서 프로세싱 유닛 TPU
학습 속도·데이터 처리 수십 배 높아져 스스로 데이터 만들어내는 수준까지

"더 이상 바둑을 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박수 칠 때 떠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렇다. 하지만 인터넷 기업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는 달랐다. 지난달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전(烏鎭)에서 열린 '바둑의 미래 서밋'에서 세계 최강의 프로 기사 커제 9단을 꺾은 알파고는 곧바로 바둑계 은퇴를 선언했다.

바둑계를 정복한 인공지능 알파고가 의료·법률·과학·금융 등 산업계 전반으로 활동 무대를 넓힌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CEO는 “알파고를 이용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
바둑계를 정복한 인공지능 알파고가 의료·법률·과학·금융 등 산업계 전반으로 활동 무대를 넓힌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CEO는 “알파고를 이용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 /Getty Images Bank

처음부터 바둑은 알파고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파고의 아버지'인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는 "바둑은 인공지능에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시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을 뿐"이라며 "이제 알파고를 이용해 인류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 알파고가 바둑 정복과 동시에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선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르치는 알파고


데이비드 실버 딥마인드 수석 과학자는 지난 25일 기자간담회에서 "알파고는 업그레이드를 통해 바둑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범용(汎用) 인공지능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 서울에서 이세돌 9단과 대국한 알파고와 지난달 커제 9단과 겨룬 알파고는 전혀 다른 인공지능이라는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문제를 배우고 답을 찾는 방식이다. 기존 알파고는 사람이 둔 바둑 기보(棋譜)를 모범 답안으로 삼아 연습하면서 실력을 쌓았다. 새 알파고는 추가로 기보를 배우지 않고 자기 자신과 수백만 건 이상의 대국을 거듭한 끝에 인간의 바둑에는 없던 신수(新手)를 찾아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알파고가 인간 대신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허사비스는 "아예 인간의 기보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알파고 버전도 만들었고 만족할 만한 실력을 보여줬다"면서 "이 버전의 알파고에 대한 내용은 올해 국제학술지 논문으로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알파고가 이전과 달라진 비결은 두 가지이다. 먼저 알고리즘 개선이다. 실버 수석 과학자는 "단순히 컴퓨터의 용량을 늘리고 학습을 계속 시킨다고 해서 알파고의 성능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쳐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추론하고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었다"고 했다. 새로운 알파고에는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전용 반도체 칩 '텐서 프로세싱 유닛(TPU·Tensor Processing Unit)'을 탑재했다. TPU를 장착하면서 알파고는 학습 속도와 데이터 처리 능력이 기존보다 수십 배 개선됐다. TPU는 CPU(중앙처리장치)와 GPU(그래픽처리장치)와 같은 기존 반도체 칩보다 월등히 많은 데이터를 동시에 분석하고 반복 학습할 수 있다. 이식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실장은 "알고리즘을 바꾼 것이 알파고의 뇌 구조를 바꾼 것이라면 TPU는 알파고의 육체를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이세돌 9단과 대결에 사용했던 알파고는 1202개의 CPU와 176개의 GPU를 장착한 수퍼컴퓨터급 서버와 연결돼 작동했다. 하지만 새로운 알파고는 200개의 CPU와 4개의 TPU만 장착했다. 크기는 냉장고 정도로 줄었고, 에너지는 이전 버전의 10분의 1만 사용한다. 특히 TPU를 장착하면서 알파고는 바둑뿐 아니라 어떤 분야의 데이터든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구글 개발자 대회 '구글 IO'에서 "TPU를 구글 클라우드(서버 임대) 서비스에 도입해 기업과 개발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기업이든 구글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면 알파고 수준의 계산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의학·과학 분야에서 활약

전문가들은 스스로 배우기 시작한 알파고가 의료·법률·과학 연구·소재 개발·에너지 효율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식 실장은 "인공지능은 입력하는 데이터의 양과 질에 따라 성능이 달라진다는 것이 기존 상식이었다"면서 "하지만 새 알파고는 스스로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르면서 이런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말했다. 정보가 제한돼 있는 경우에도 여러 상황을 가정해보며 인간은 찾을 수 없는 해법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알파고는 이미 바둑 이외의 영역에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허사비스는 “막대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구글의 데이터센터에 알파고를 적용한 결과 전력 소모량을 40% 줄이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영국 국립보건서비스(NHS) 등과 함께 인공지능 진단 서비스도 시작했다. 이상 증세를 스마트폰에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3억 건의 의료 기록을 비롯한 수많은 정보를 토대로 진단을 한다. 서비스 시행을 앞두고 이뤄진 정확도 평가에서 의사는 73.5%, 인공지능은 90.2%를 기록했다. 진단 시간도 의사는 평균 3분 12초, 인공지능은 1분 7초였다. 알파고가 의료 정보를 기반으로 학습을 반복하면 인간 의사의 고정관념도 뛰어넘을 수 있다. 전혀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하면서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가능성도 높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자율주행차가 실제 도로에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을 알파고가 만들어내 각각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하거나 지구온난화 같은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낼 수도 있다”면서 “실제 실험을 하지 않고도 특정 질환에 맞는 신약 후보 물질을 만들거나, 신소재를 설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알파고는 2015년 처음 만들어진 뒤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며 불과 2년 만에 3000년 역사의 인간 바둑을 뛰어넘었다. 이런 인공지능이 여러 분야에 적용되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언젠가 인간을 지배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허사비스는 “알파고를 개발한 목적은 과학자, 의사, 간호사 등 수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을 돕고 인간이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인공지능을 만들려는 것”이라며 “알파고는 인간을 위한 도구이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알파고는 인간이 시킨 일만 잘하는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