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누군가가 핵물리학과 상대성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면 결국은 별에도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 존 휠러 정보의 물리적 의미에 대해 관심이 많은 기자는 언젠가는 이 어려운 주제를 ‘과학동아’에서 다룰 생각으로 기본이 되는 책들을 조금씩 읽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국의 물리학자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가 쓴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라는 책이다. 이 책 서문에서 저자는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라는 저명한 물리학자의 90회 생일을 기념한 학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존 휠러를 두고 ‘물리학자 중의 물리학자’라고 극찬했다. 1911년생인 휠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와 함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교사와 교과서 저자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는 것. 그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이다. 휠러는 새로운 물리용어를 만드는데도 탁월한 감각을 보였는데 아이들도 호기심을 갖게 하는 단어인 웜홀(wormhole)과 블랙홀(black hole)도 그의 작품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설마 이분이 지금도 살아계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2003년 출간됐는데(한글판은 2007년 출간) 책에서 저자는 휠러가 여전히 정정하다고 말하고 있다. ●일반상대성이론 재조명에 공헌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보니 휠러는 2008년 4월 13일 97세로 영면했다. 오늘은 그의 사망 4주기인 날이다. 가장 대중적인 용어를 만들었음에도 ‘물리학계 외부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휠러의 삶과 그가 어떻게 블랙홀이라는 말을 고안하게 됐는지 궁금해진 기자는 인터넷 서점에서 휠러와 관련된 책을 검색해봤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다행히 한 대학 도서관에 1998년 출간된 그의 자서전 ‘Geons, Black Holes, and Quantum Foam’이 있기에 빌려봤다. 1911년 7월 9일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태어난 휠러는 1933년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노스캐롤라이나대를 거쳐 1938년부터 프린스턴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탁월한 연구업적을 내면서도 제자를 길러내는데도 열심이어서 프린스턴대 물리학과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대학원생을 지도했다고 한다. 리처드 파인만, 킵 손, 휴 에버렛, 제이콥 베켄슈타인 같은 탁월한 물리학자들이 그의 제자다. 제임스 글리크가 쓴 파인만의 전기 ‘천재’를 보면 1939년 대학원생으로 프린스턴에 도착한 파인만이 자신의 지도교수를 보고 너무 젊어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휠러는 28세로 파인만보다 불과 7살 연상이었다. 글리크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파인만의 천재성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데는 휠러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파인만과 전자의 양자역학적 본성을 고민하던 무렵 휠러는 동시에 닐스 보어와 핵분열 이론을 정립했고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른 많은 물리학자들처럼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1950년대에는 일반상대성이론에 관심을 돌려 아인슈타인의 말년 공동연구자가 된다. 1957년 시공의 가상의 터널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낸 휠러는 여기에 웜홀(wormhol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국에서 시들하던 일반상대성이론 연구에 다시 불을 붙인 그는 수년간 중력붕괴(gravitational collapse) 현상을 고민하다가 1967년 한 모임에서 블랙홀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펄서에 대한 틀린 해석 덕분 그의 자서전 ‘Geons, Black Holes, and Quantum Foam(지온, 블랙홀, 양자거품(모두 휠러가 만든 용어다))’ 가운데 13장의 제목이 블랙홀이다. 읽어보니 예상대로 그가 어떻게 블랙홀이란 용어를 쓰게 됐는지가 잘 나와 있었는데 뜻밖의 반전이었다. 휠러는 “내가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누군가가 핵물리학과 상대성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면 결국은 별에도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라며 자신은 동료 마틴 슈바르츠실트 때문에 천체의 세계로 들어섰다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휠러는 별의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핵연료를 다 소진한 뒤 차갑게 식은 별들의 최후가 궁금했다. 1958년 휠러와 그의 뛰어난 제자들은 별이 크기(질량)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걸 계산해냈는데 예를 들어 태양 크기의 별은 백색왜성으로 삶을 마감한다. 백색왜성은 작지만 극단적으로 작지는 않고 밀도가 높지만 역시 극단적으로 높지는 않다. 따라서 이 속의 원자는 여전히 통상적인 원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태양보다 좀 더 무거운 별들은 초신성폭발을 거쳐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중심에 중성자별을 남긴다. 극단적으로 높은 중력으로 원자의 전자와 양성자가 합쳐져 중성자가 되면서 중성자로 이뤄진 초고밀도 별이 되는 것이다. 휠러의 학생 마사미 와카노는 중성자별이 별의 안정한 최후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문제는 태양보다 아주 무거운 별의 최후. 계산 결과 이 별은 무한한 밀도의 한 점으로 붕괴해야 하는데 휠러는 이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수년 동안 이런 경로를 피하는 여러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중에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던 물리학자들이 붕괴의 불가피함을 입증하는 이론들을 정립하면서 결국 1960년대 초에 이르면 휠러도 이 이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1967년 가을 휠러는 NASA 고다드연구소로부터 당시 막 발견된 펄서(pulsar)에 대해 설명하는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펄서가 최근 수년간 고민해온 바로 그 붕괴된 물체라고 보고 강의 내내 ‘중력적으로 완전히 붕괴된 물체(gravitationally completely collapsed object)’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그랬더니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좀 더 짧은 용어가 필요할 것 같다며 “블랙홀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How about black hole?)”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 뒤 수개월동안 마땅한 용어를 찾아 고민하던 휠러는 이 용어가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내리고 그해 연말에 있었던 한 강연에서 블랙홀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 강연집에 처음 블랙홀이 활자화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뒤 펄서는 블랙홀이 아니라 빠르게 자전하는 중성자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고다드연구소 강의에서 휠러가 펄서를 중성자별로 제대로 추측했다면 ‘중력적으로 완전히 붕괴된 물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청중 가운데 누군가(아마도 고다드연구소의 연구원)가 그런 제안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블랙홀로 불리는 천체는 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고 십중팔구 블랙홀만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폰 베이어 교수는 그의 책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의 서문에서 왜 휠러 교수를 끌어들였을까. 물론 블랙홀 때문은 아니다. 휠러 교수는 1990년 물리학에서 정보가 기본임을 선언하고 유명한 ‘it from bit(비트에서 존재로)’라는 문구를 발표했다. 휠러는 “모든 존재, 즉 모든 입자와 역장, 심지어 시공 연속체까지도 그 기능이나 의미 그리고 바로 존재 그 자체를 ‘예-아니오’ 질문에 대한 답으로부터 즉 비트로부터 전적으로(상황에 따라 간접적으로라도) 얻는다”라고 말했다. 폰 베이어 교수가 이 책을 쓰게 된 출발점이 바로 ‘물질적인 세계(존재)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정보(비트)로부터 구성된다’는 휠러의 선언인 것이다. 휠러의 자서전 15장의 제목이 바로 ‘It from Bit’이다. 정보의 물리학 기사를 쓰려면 이 장도 꼭 읽어봐야겠다. 동아일보 |
2012년 9월 1일 토요일
‘블랙홀’은 이렇게 탄생했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