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노벨문학상 못 타는 게 '번역' 책임일까?

최근 몇 년째 이맘때마다 낯익은 풍경이 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시인의 집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다가, 결과 발표가 나자마자 허탈하게 철수하는 기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이 '번역 책임론'이다. 우수한 작품은 많은데, 번역 역량이 못 미쳐 해외에서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당일 한 종편에서도 "한국어를 아름답게, 유려하게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그런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질타가 나왔다.

하지만 이는 많은 번역자에게 상당한 실례가 되며, 사기를 떨어뜨리는 주장이다. 한국에는 수많은 번역자가 있으며 정부도 외국 출신 번역자까지 선발, 양성해 가며 나름대로 힘을 쏟고 있다. 언론은 매번 번역의 책임을 거론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번역자가 뛰어나도 원전(原典)이 부족하면 좋은 반응을 얻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물론 양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룰 때 최고의 번역이 탄생하겠지만, 모든 걸 번역자의 역량 문제로 돌리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라고 본다. 원본이 해외의 정서에도 통하는지, 세계문학의 흐름과도 통하는지에 대한 성찰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국내와 똑같은 평가를 해외 독자들로부터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벨 문학상도 어느 정도 지역·언어·장르의 안배가 고려되고, 보석처럼 뛰어난 작품이라도 발굴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조건 많이 팔리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완벽한 번역본을 낸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타이밍과 운도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매년 언론이 조장하는 '조바심'은 오히려 작가와 번역자들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 노벨문학상은 좋은 작품과 좋은 번역이 꾸준히 이루어지면 언젠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선물'이어야 하는데, "프랑스에서 인정을 받아야 수상이 유력하다"는 식의 보도를 하며, 스펙 쌓듯 유리한 조건만 채워 나가는 식으로 조장하는 것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21세기에 들어 13년간 영국은 무려 3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지만, 같은 영어를 쓰는 미국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것도 '번역'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단지 최근 미국에서 역량 있는 작가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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