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한자공부 하지 말자’는 한국사회의 知的 수준

한글과 한자는 모두 國字”

⊙ “한글만 갖고 수준급의 책이나 논문을 쓴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
⊙ “우리의 《憲法典》에 나오는 수많은 한자는 외국어인가?”

선진국치고 말이 빈약한 나라는 없다. 말과 글은 생각의 바구니다. 말과 글의 바구니가 허술하면 좋은 사상을 담기 어렵다. 지난 43년 동안 지속해온 한글전용(專用) 정책의 득실(得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다만 우리나라 말의 70% 이상이 한자어(漢字語)인데, 한자를 추방하고 한국인은 글의 뜻도 모르고, 텅 빈 수수깡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탄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월간조선]‘한자공부 하지 말자’는 한국사회의 知的 수준
이한동(李漢東) 전 국무총리는 몇해 전 ‘어문(語文)정책 정상화 추진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 오고 있다. 이 추진회는 작년 7월 결성됐다. 참여 인사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출신의 김문희(金汶熙)·황도연(黃道淵) 변호사와 조부영(趙富英) 전 국회부의장, 최근덕(崔根德) 전 성균관 관장, 심재기(沈在箕)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김경수(金慶洙)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등이다. 이 전 총리의 말이다.

“한글전용이 단순 문맹률(文盲率)은 낮췄지만, 고급어휘, 문화어의 이해도는 낮아졌어요. 그러니까 실질적 문맹률은 더 높아졌다는 얘기입니다. 이해력이 떨어지니까 학문이나 문화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요. 편협한 애국과 국수주의로 광복 후 국어의 황폐화와 언어능력의 저하를 가져왔습니다.

한자가 한반도에 도래한 것은 2000년 전입니다. 상류사회에 국한된 얘기지만, 이후 한자만으로 우리말을 표기했어요. 세종(世宗)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세종 스스로 한자와 한글 혼용의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자는 외래문자가 아니라 우리 문자, 즉 국자(國字)입니다. 한글과 한자 모두 우리의 국자이죠. 근본적으로 한자어를 외래어로 규정하는 ‘국어기본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자도 국자라고 보시나요.
“그렇습니다. 국어는 고유어와 한자어·외래어로 이뤄져 있어요. 한자어의 한자는 국자이자 국어입니다. 국어는 수도나 국기·국가와 같이 관습(慣習)헌법의 사항이죠. 우리 《헌법전(憲法典)》을 보세요. 수많은 한자가 나오는데, 그럼 헌법에 나오는 한자는 외국어로 표기된 것인가요?”

世宗, 한글·한자 혼용의 모범을 보이다
‘한자 사망’이 낳은 한국사회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먼저 강원대 한국어문화원 원장인 국문학과 남기탁(南基卓) 교수에게 그 수준을 물어보았다. 그는 ‘초계함’인 천안함 폭침 사태 때의 일을 회상하며 수업 중 일화(逸話)를 들려주었다.

“학생들에게 초계함이 뭔지를 물었어요. 망볼 초(硝), 경계할 계(戒)라는 의미를 알면 쉽게 알 수 있는 말이잖아요. 어떤 일을 수행하는 배인지 아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학점을 5점이나 올려주겠다고 해도 답이 없었어요. 더 큰 문제는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양수업을 듣는 의예과 학생들에게 예(豫)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아도 아무도 몰라요. 미리 예 자거든요.

조기(早起·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뜻)축구회라고 할 때의 조를 아침 조(朝)로 알거나 조기(早期·이른 시기라는 뜻)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춘천의 한 태권도 도장 옆에 붙은 광고전단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어요. 전단에 ‘석기회원 모집’이라 적혀 있었거든요. 조기의 뜻을 모르다 보니 늦은 밤 운동하는 회원을 석기회원이라고 엉뚱하게 표기한 것이죠.”

1대와 2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한 법무법인 신촌의 김문희 대표변호사는 “한자를 국자(國字)에서 배제한 ‘국어기본법’은 위헌(違憲)”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현재 전원재판부에 회부된 상태다.

“한글전용의 어문정책과 교육정책이 우리말의 의미를 전달하는 기본수단인 한자를 배척 혹은 말살해, 우리 국민이 한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그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 기자는 그가 건네준 100쪽이 넘는 ‘헌법소원 심판청구서’를 읽어 보았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의 말이다.

“한자를 모르면 동음이의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어느 지방의 ‘김치 축제’를 알리는 유인물에서 충장사(忠壯祠)라고 해야 할 사당(祠堂)의 영문표기를 충장사(忠壯寺)’라는 절로 알고 ‘Temple’로 썼다고 해요. 향교(鄕校)를 교량(橋梁)의 뜻인 ‘Bridge’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또 어느 대학에서는 ‘000 絞首(교살한다는 의미) 정년퇴임’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린 적도 있습니다. 영자신문(英字新聞)에서는 주간 교수(主幹敎授)를 ‘Weekly Professor’로 표기한 적도 있어요. 또 어느 대학의 신학(神學)선언문에 ‘세계선교사에 유례(類例)가 없는’이라는 뜻의 영문을 ‘유래(由來)가 없는’으로 이해해 ‘unprecedented; unexampled’라고 표기해야 할 것을 ‘without origin’으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현재 김문희 변호사는 다른 사건은 맡지 않고 오직 이 소송에만 매달리고 있다. 위헌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국어와 관련된 연구서적과 문헌, 학자들을 만나고 있다. 열정이 놀라웠다.

“언어는 원래 우리가 생각한 바를 표현하는 수단이었으나 지금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사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사고력은 언어의 구사능력에 비례하는 것이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는 자는 올바른 사고도 할 수 없어요. 언어의 기능은 그것이 구두어(口頭語)이든, 문장어(文章語)이든 ‘의사의 전달’에 있고,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들은 의사를 표현하는 기본단위가 됩니다. 문자를 배우는 목적은 주로 쓰여 있는 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요. 국어는 그 어휘의 태반이 한자어이고 한자어는 한자로 쓰여야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자로 공부할 때 뇌가 활성화돼
세계적인 뇌(腦)과학자로 알려진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조장희(趙長熙) 소장은 “40년 넘게 해외에 있다가 들어왔더니 사람들이 한자를 안 써 한국인이 문맹(文盲)이 되어 있더라”는 말부터 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양전자 단층촬영기(PET)를 개발, 한국인 가운데 노벨상 수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학자로 거론되고 있다.

“서로 얘기들은 하지만 뜻을 전혀 몰라요. 뜻을 모르니 응용을 못해요. 왜 한자를 안 쓸까요. 아마 일본 식민지였다는 콤플렉스가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한자는 라틴어처럼 중국의 글자가 아니라 동양의 글자입니다. 과학기술 서적은 한문을 안 쓰면 이해를 못해요.”

조 소장은 한자교육과 뇌의 활성화에 대한 연구를 수년간 진행하고 있다. 그가 말한 바로는, 평균 나이 27세인 남녀 대학생 12명을 대상으로 2음절짜리 한자 단어와 한글 단어를 소리 내지 않고 읽도록 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뇌 영상으로 찍어 보니, 한글로 읽을 때보다 한자로 읽을 때가 뇌의 많은 부분에서 활성화가 이뤄졌다. 조 소장의 말이다.

“한자를 읽을 때는 방추상회(紡錘狀回·fusiform gyrus) 부분과 중심전회(中心前回·precentral gyrus) 부분, 그리고 양측 두정엽(頭頂葉·parietal cortex)과 브로카 영역(broca’s area)에서 더 증가한 활성화를 관찰할 수 있었어요. 이런 차이는 한자의 형태적 특성과 철자의 특성이 한글과 다르기 때문(방추상회 부분과 중심전회 부분)이며, 의미의 인출 및 사용 빈도와도 관련(브로카 영역과 두정엽)이 있을 것으로 여겨져요.
또 한자문자와 한글문자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뇌의 부위가 상대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결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이러한 결과는 한자교육에 대한 뇌과학적 연구의 초석이 될 것으로 사료돼요.”

조 소장은 이 실험 외에도 한자로 쓴 단어와 한글로 쓴 단어 중 어느 쪽을 더 많이 기억하는지를 실험했다고 한다.

“뇌 영상으로 보니, 단어를 한문으로 기억했을 때는 뇌의 여러 군데에서 활성화가 이뤄졌지만, 한글로만 기억할 때는 뇌의 한군데만 활성화되었어요.”

뇌의 활성화란 말을 풀어서 설명해 주세요.

“커피를 떠올려 보세요. 커피 하면, 그 맛과 향기, 거무칙칙한 원두, 커피잔 등 오만가지가 다 떠오르는데, 이처럼 떠오르는 것이 많을수록 기억이 잘됩니다. 한문을 읽은 사람은 뇌의 여러 군데가 활성화돼요. 그러니 한문으로 공부하고 익히는 것이 기억과 이해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자를 쓰는 중국인들은 머리가 좋겠네요. 게다가 중국어에는 고저장단(高低長短)도 있잖아요.

“훨씬 좋죠. 이해도, 기억도 잘합니다. 사성(四聲)은 뇌 자극을 더 잘 받겠죠. 그렇게 되면 중국과의 국제경쟁에서 우리가 지는 겁니다. 그러니 한자를 배우는 것이 국가 존폐와도 관련이 있어요. 비록 뇌과학자이지만 일부 쇄국적(鎖國的)인 언어학자들이 한글전용을 만든 것 같아요.”

북한과 일본의 경우
중앙대 국문학과 김경수(金慶洙) 명예교수는 북한과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김 교수는 “2차대전 이후 패전국 일본도 우리처럼 문자정책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는데, 한자혼용을 하자는 주장과 일본의 고유어(假名·가나)로만 표기하자는 주장이 팽팽했다”며 “패전을 의식한 많은 지식인이 고유문자인 가나만 쓰자는 주장이 많았다”고 했다.

당시 도쿄대 교수인 구라이시 다케시로(倉石武四郞)는 “중국도 문자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터에 우리가 한자를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장차 한자는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이런 분위기에 맞서 이시이 이사오(石井勳)라는 교육학자가 가나문자만으로는 일본문화 발전을 가져올 수 없으니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맞섰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그럼에도 한자폐지 주장은 집요했어요. 애국을 앞세운 일본 고유어 가나 쓰기 운동은 식을 줄을 몰랐어요. 이런 와중에 일본 언론들이 이 논란을 주시했고 그 중심에 일본 공영방송인 NHK와 아사히(朝日)신문과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있었습니다. 이들 언론사의 편집자들은 이시이의 한자정책을 택했어요. 결국 일본의 문자정책 수립에 언론의 힘이 컸던 셈입니다.”

그는 “현재 일본은 유치원, 초등, 중등학교에서 1945자의 한자를 필수적으로 배우고 지금은 다시 2136자로 상용한자를 늘렸다”고 했다.

“일본은 유치원생에게도 600자의 한자를 가르치고 있으니 일본 문자정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고유어인 가나문자와 한자를 혼용해 2세 교육을 하는 셈이지요.”

북한의 어문정책은 어떨까. 김 교수는 “북한의 어문정책은 한국보다 훨씬 일관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1949년부터 지금까지 교과서는 물론 신문, 잡지까지 한글전용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64년과 1966년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 연두 교시(敎示)를 통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더니 1970년에 2000자(초·중·고)와 1000자(대학)를 지정해 누구나 한자를 학습하도록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김일성의 교시에는 ‘통일에 대비해 남조선이 쓰는 문자를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김경수 교수의 말이다.

“현재 북한은 인민학교(우리나라 초등1~4학년)에서는 한문을 가르치지 않지만 고등중학(우리나라 초등5~고등1)에서는 한자 1500자를 가르치고 있어요. 기술학교용 500자는 별도이므로 사실상 2000자를 중등과정에서 가르칩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1000자를 더 가르쳐 모두 3000자를 배우고 있어요. 북한이 우리보다 먼저 《리조실록》을 완역 출간해 우리나라에 역(逆)수출한 것도 이와 같은 한문교육의 강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漢字가 아니라 韓字다!
1970년 이후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교육의 부활을 주장하는 수없이 많은 주장과 청원이 있었다. 김문희 변호사는 “1970년부터 작년까지 학술단체와 개인 등이 정부 등 관계기관에 제출한 청원·건의·성명서가 무려 119건에 이르고, 지난 2008년 9월에는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 등 생존 중인 역대 국무총리 20인이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을 촉진하는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한 일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2009년 교과부는 개정 교육과정을 발표하며 ‘초등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중점’ 사항으로 ‘학교장 재량으로 한자교육을 관련 교과(군)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학교마다 천차만별이어서 ‘국민교육’으로 전혀 기능을 못하고 있다.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한자(漢字)를 ‘한자(韓字)’라고 이름을 붙인다. “20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쓰는 한자(漢字)는 한국의 사상·정서를 고스란히 담아 한자화(韓字化) 됐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자(韓字)는 중국의 한자(漢字)와는 그 의미, 그리고 독음(讀音)에서, 또 소리에서 전혀 다른 한국식 한자입니다. 사실, 한자(韓字)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2000년이 넘게 이 땅에서 만들어져 학술어·추상어·고급개념어가 역사·전통·정신 속에 융해돼 있어요. 이제 우리의 뜻과 정신이 깃든 우리의 국자를 한자(漢字)에서 독립시켜 한자(韓字)로 지칭하고, 구분하여 표기해야 합니다. 한자의 범위는 우리의 국어사전에 수록된 어휘를 기준으로 모두 한자(韓字)로 규정해야 합니다.” 그는 “한국식 한자 역시 우리글인 만큼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자로 된 한국학 연구, 해독하기 어려워 외면”

 정정길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정정길 한국학중앙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정길(鄭正佶) 원장은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의 학문 전체가 10여년 전부터 왜곡되고 있어 이를 시급히 바로잡지 않으면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게 된다”고 우려했다. 서울대 대학원장과 울산대 총장, 대통령실장을 역임한 정 원장은 “역사학 분야의 연구나 국문학 분야의 연구가 근현대사에 과도하게 집중되고 있는데, 과거의 역사는 자료가 부족하거나 없다는 이유로, 자료를 찾았다고 해도 한문으로만 쓰인 내용을 해독하기가 쉽지 않아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작년부터 우리나라 과학적 창의성의 뿌리를 찾는 ‘한국학 방향잡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정 원장은 “일부 중국과 일본 지식인들이 한국이 지금의 국제경쟁력을 갖춘 것을 그저 일본 기술을 모방하거나 전수받아 가능했다고 폄훼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단순히 기분 나쁜 문제를 떠나 한국의 역사에서 과학적 창의성이 가장 꽃을 피운 시대를 찾아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 독일 등과 비교하면 그런 편견을 반박할 수 있고, 우리의 문화적 뿌리나 정체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적어도 “상고시대는 모르겠지만 고려시대나 세종대왕시대까지는 우리가 일본의 과학기술을 능가했다는 기대에서 나온 발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그의 말이다.

“서울대 인문대, 자연대, 공대가 연합한 ‘과학사 협동과정’을 20년간 맡아온 김영식 교수를 찾아갔어요. 그에게 ‘신라, 백제,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각 시대별 과학기술사 전공자를 골라 달라’고 제안했어요. 20년간 과학사 협동과정을 끌어 왔으니 각 대학에 흩어진 제자만도 수백 명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김 교수 말이 ‘전공자가 없다’는 겁니다. 기가 막혀서 ‘도대체 그동안 뭘 했느냐’고 물으니 ‘과학사 연구가 주로 근대부터 이뤄졌다’는 거예요.”

대개의 연구가 갑오경장(甲午更張) 전후를 중심으로 이뤄져 그 이전의 과학사 연구는 전공자 수가 많지 않은 데다 단편적인 연구조차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정 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은 시대별로 과학기술사만 따로 연구하는 전공자가 많이 있는데 우리는 단편적인 연구마저도 전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그 숫자가 극히 적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가 언제입니까. 갑오경장부터 일제식민지 시절이 아닌가요? 그 시기에 과학기술의 유입경로 연구라는 게 이런 것 아닐까요? 대부분 일본을 통해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구한말 조선의 꽉 막힌 선비들이 반대를 해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입했다는 식 말입니다.

세종의 한글창제, 신라 에밀레종의 금속공학적 특성, 고려의 수준 높은 도자기공예 기술, 직지심경을 낳은 활판인쇄술 등등 세계에 내놓을 만한 유산(遺産)이 어떻게 만들어졌나에 대한 것을 밝혀내 후세대에게 자존심을 키워 주고 본받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찾기 쉬운 자료, 논문 쓰기 쉬운 세부 분야로 몰려들어
대체로 근현대사를 중심으로만 연구가 이뤄지는 까닭은 뭘까.

“일단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자료의 부족, 자료 획득의 어려움이 연구를 크게 왜곡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설령 자료를 어디서 발견한다고 해도 한문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교수들은 한 해 논문을 몇 편 쓰느냐에 따라 연구비와 성과급이 달라지고 승진이 달라집니다. 그런 판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한문공부를 하겠어요?”

그런데 한문 구사가 가능하다고 해도 자연과학 등의 이론이나 방법론, 문제의식 등을 파악하고 있는 학자도 드물다. 한문 텍스트를 읽고 번역은 할 수 있다 해도 한문 문장의 맥락이나 사회적 의미, 역사적 가치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연구 결과가 확산될 수 없다.

“우리의 학문풍토는 세태에 따라, 인기에 따라, 연구비의 액수에 따라 연구의 세부 분야를 이것저것으로 바꾸어 가면서 손을 댑니다. 심지어 찾기 쉬운 자료, 논문 쓰기 쉬운 세부 분야로 우루루 몰려들고 있어요.”

정 원장은 “자료가 부족하거나 없더라도, 그래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없더라도, 중요한 사회현상은 학자들이 매달려서 연구를 할 수 있는 풍조여야 한다”며 “논문 편수보다는 질이 중요하며, 덜 중요하다고 해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분야는 적지만 적절한 숫자의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상태를 10여년 더 방치하면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연구내용이 문화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대학의 새로운 주도집단으로 등장하는 학문 후속세대들이 모두 편향된 연구에 매달리고, 그렇게 연구된 내용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겁니다. 우리나라만이 이렇게 기괴한 학문풍토가 지배하면 국가경쟁력이 약화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 원장은 “과거 지나치게 한자와 한문에 압도당한 경험 때문에 역설적으로 한글전용으로 가게 되었으나 우리의 전통문화가 모두 한문으로 표현돼 있다”며 “정확하게 알려면 한자를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한자와 한문공부를 사대주의와 결부시키거나 민족 자존심의 문제로 접근하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서구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어(死語)인 라틴어를 배웠어요. 그렇다고 ‘로마 식민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자는 동아시아 여러 국가가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미래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학문적 보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자과 한자공부가 필요합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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