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명문가의 교육법 자식농사가 최고!

일본 속담에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 그만큼 그 집안의 분위기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특히 부모가 일군 터전을 가꿔야 하는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재계의 자녀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그들은 독특한 가풍으로 자녀들을 교육한다. 상위 0.1% 집안의 자녀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있을까?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배우게 하라
삼성가의 교육법


이건희 삼성 회장은 자신의 스승으로 두 명을 꼽는다. 첫 번째 스승은 삼성의 창업주이자 선친인 고 이병철 회장이고 두 번째는 장인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다.

창업주는 경영 일선에 항상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일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25년간 삼성그룹의 자문 역할을 맡은 이창우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다시 이병철에게 배워라》에서 “이병철 회장은 아들에게 교육시킬 때 2세 경영인으로서 상황 변화에 대처하는 ‘어떻게(HOW)’의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에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사고를 키워나갔다고 한다.


선친에게는 숲을 보는 눈을, 장인에게는 나무를 보는 능력을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의 독특한 교육방법은 이건희 회장에게는 쉽게 풀기 어려운 퍼즐과 같았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이병철 창업주는 현장에서 부딪히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는 교육방식을 묵묵히 지켜나갔다.

이건희 회장은 훗날 “어느덧 현장을 통해 경영을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선친으로부터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라는 경험적 교훈을 얻은 것이다. 때문인지 재계에서 이건희 회장만큼 앞날과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전략을 강구하는 경영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가 전체 흐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남보다 먼저 고민하고 큰 물줄기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선친의 ‘어떻게(HOW)’ 교육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친을 통해 숲을 보는 눈을 키웠다면, 행정계와 언론계의 거물이었던 장인 홍진기 회장에게는 숲속의 나무를 보는 능력을 배웠다. 홍 회장은 그에게 기업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풀어주곤 했다. 홍 회장의 가르침의 주요 골자는 ‘기업경영상의 모든 문제는 크든 작든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경영자로서 이런 얽히고설킨 문제들의 실마리를 풀어내려면 관련된 각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장인의 이론 중심 가르침을 통해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는 문제해결의 지혜를 배웠다.

이건희 회장은 선친과 장인에게서 기업경영에 필요한 다양한 전문지식과 그 활용방법을 배움으로써 기업경영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안목 두 가지를 모두 갖추게 됐다.


이건희 회장의 교육철학

이건희 회장도 자녀교육에 공을 많이 들였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탁구를 치는 등 취미생활을 함께했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라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늘 아이들과 뺨을 부빌 정도로 정이 많은 아버지였고, 아들이 대학 입학원서를 접수하는 날에는 종일 대학 주변을 서성거리는 보통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이 회장에게는 다른 아버지와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교육철학이 있다.

1 인성교육이 우선이다 - 풍부한 감수성이 경쟁력이다.
2 입체적 사고를 훈련하라 -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 연결 지어 해석하라.
3 과욕을 버리고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하라.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을 했다고 하자.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낚시를 하면 반드시 무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나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소중한 체험으로 살려가느냐에 있다.”
-호암 평전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중에서


밥상머리 교육부터 시작하라
현대가의 교육법

 
 
현대가의 자녀교육 원칙은 밥상머리 교육이다. 현대그룹을 설립한 고 정주영 회장은 따로 시간을 내거나 특별한 방법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다만, 아침식사만큼은 가족이 모여서 함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불호령을 내렸다. 항상 현장으로 뛰어다녔기에 자녀 교육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정 회장은 사업을 확장하느라 쉴 새 없이 바빴다. 1947년 당시 정 회장은 현대건설을 설립했으며 1957년에는 6·25때 파괴됐던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완공했다. 사업이 이처럼 바쁘다 보니 자녀들의 교육에 크게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은 아침에 밥상머리에서 보는 것이 전부였다.

정주영 회장의 밥상머리 교육 키워드는 근면과 성실이었다. 그는 생전 청운동 자택 1층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걸어 놓았다.


근면, 성실만이 살길이다

一勤天下無難事(일근천하무난사), 즉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 자식들에게 근면과 성실을 유난히 강조했다. 청운동 자택에서 새벽 다섯 시면 자식들을 집합시켜 아침을 같이 먹고 자식들을 이끌고 계동 현대그룹 본사 사옥으로 출근했다. 새벽 네다섯 시쯤 일어나 아침을 드는 아버지를 따르려면 자녀들 역시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한 습관이 몸에 배는 건 당연했다. 아침을 일찍 먹으면 그만큼 시간 활용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정 회장의 생각이었다.

또 정 회장은 “부모라면 자식 앞에서 자식 키우는 공(功)을 내세우지 말고, 공부하라는 말보다는 정서에 호소하는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자녀교육의 원칙은 자녀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것. 그리고 좋은 부모로서 자녀에게 먼저 모범을 보이고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다. 정 회장은 자녀들을 가르치면서도 특별히 원칙을 내세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큰 줄기만 잡아놓고 알아서 크도록 하는 자유방임형에 가까웠다.

이런 정 회장도 영어공부만큼은 고집스럽게 강조했다. 정몽구 회장을 필두로 몽헌, 몽준, 몽우 등 정씨 집안의 ‘몽’ 자 항렬이 대부분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것도 정 회장의 영어에 대한 집착과 무관하지 않다. 정 회장은 미국인 바이어와 사업을 벌이면서 곁에서 유창한 영어로 비즈니스 계약을 맺고 있는 동생을 보며 크게 깨달았다. 지금이야 영어는 필수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그는 사업현장을 통해 미래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파악한 후 자식들에게 전수하는 식으로 모든 교육을 했다.


정주영 회장의 교육철학

정 회장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경영자로 유명하다. 자녀교육도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따라 했다.

1 언행일치의 사고 - 자녀에게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라.
2 선견지명의 역할이 중요하다 - 미래를 내다보고 방향을 제시하라.
3 엄격한 아버지의 위상을 세워라 - 벤치마킹의 대상이자 라이벌이 되어라.
4 습관이 인생을 좌우한다 -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라.

“시간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평등한 자본금. 한강에 기적은 없다.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여름철 서늘한 나무 그늘에 앉아 노래만 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없어지는 매미는 한겨울 펑펑 쏟아지는 눈을 알 수 없다.”
-정주영 회장사람 다스리는 법을 배워라
LG가의 교육법


구본무 LG 회장 일가는 한마디로 가족 간의 인화를 강조한다. 특히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교적 가풍이 녹아 있는 LG가의 자녀교육은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 위치한 구본무 회장 가문의 집성촌 승산마을을 찾아가면 이런 유교적 규범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다. 이곳엔 구 회장의 고조부인 만화공이 선비들 간의 학문 교류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은 창강재, 후손들이 학문을 닦던 양정재, 부인 춘강 재서공을 추모하기 위한 모춘당도 세워져 있다. 특히 방산전 바로 옆에 위치한 모춘당은 구씨 가문의 자녀교육에 있어 최고의 규범으로 자리 잡은 인화교육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가훈을 새기고 가풍을 숭상하라

고 구인회 LG 창업주의 자녀는 6남4녀로 장남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다. 구 명예회장은 선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LG그룹의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물론 3대 회장은 구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본무 LG그룹 회장이다.

모춘당은 구본무 회장의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6·25전쟁 당시 불타 없어진 생가가 있던 자리에 조부를 추모하고 자녀들의 교육과 가풍을 익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새로 건립한 사당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모춘당 완공 후 친자교육 외에도 집안에 며느리나 사위를 새로 맞으면 1년에 한 번 그들과 함께 묵으며 가훈을 새기고 가풍을 숭상하는 것이 몸에 배도록 했다. 구 명예회장의 숨은 뜻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웬 구닥다리 같은 유교적 규범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구자경 명예회장에 이어 구본무 회장도 이런 10계의 덕목들이 구씨 가문을 이제까지 별다른 말썽 없이 단합하게 한 단단한 울타리로 보고 있다. 실제로 구인회 회장은 허을수 씨와 슬하에 6남4녀를 둘 정도로 자손이 번성했다. 특히 아들이 많은데 ‘회(會)’ 자 돌림만 6명, ‘자(滋)’ 자 돌림은 23명에 달한다. ‘본(本)’ 자 돌림은 구인회 회장 직계로만 11명이다. 구자경 회장은 선친에 못지않게 4남2녀를 낳아 다산의 전통을 이었다. 자손이 워낙 많다 보니 가족 구성원 간의 화합과 인화가 필수교육이 됐다.


구본무 회장의 교육철학

생전에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이 자손들에게 중요하게 가르친 것 중 하나가 ‘한번 사귄 사람과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마라’였다. 이런 가르침은 70년 이상 지속됐던 허씨 가문과 동업관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렇기에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은 양가에선 맞지 않았다. 심각한 불협화음 없이 양 가문은 순탄하게 기업을 이끌었다.

1 인화 최우선주의 - 한번 사귄 사람은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마라.
2 근검절약의 독립심 - 부는 인간의 노력으로 일궈 사회로 흘러간다.
3 귀할수록 혹독하게 해야 한다 -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것을 밑천으로 삼게 하라.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제간의 종속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LG의 가훈인 ‘10계의 덕목’ 중에서


치밀하게 파고들어라
SK가의 교육법



고 최종현 SK 회장은 두 아들에게 평소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장남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차남인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은 모두가 대학 학부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했다. 선친인 고 최종현 회장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경영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잘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물리나 화학 등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최태원 회장은 고려대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도 고려대 물리학과에 들어간 후 재료공학으로 전공을 바꿨지만, 자연과학을 전공하긴 매한가지였다.

최종현 회장이 이처럼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자식들에게 강조하게 된 배경은 최 회장 스스로가 화학을 전공하면서 얻은 체험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위스콘신대학 화학과를 나온 후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최 회장이 직접 집필해 현재는 ‘SK그룹의 경국대전’으로 불리는 <SK MS(SK Management System)>에서 모든 임직원에게 고교 수준 이상의 물리, 화학, 생물 실력을 갖출 것을 요구했던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자연과학을 배우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최 회장은 자녀들에게 언제나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를 독려했다. 그는 “철학은 그릇된 경험을 통해 쌓은 편견, 선입견이기 쉽다. 따라서 기업가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파고들도록

최 회장의 자서전 《나는 한없이 살았다》에는 두 아들에게 훌륭한 기업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책에서 그는 “기업가는 항상 신선한 사고력과 투시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백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지론 아래 최 회장은 자식들이 어떤 일에 의문을 갖게 되면 그것을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파고들도록 했다. 끝까지 문제를 쫓아 결국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탐구하는 과학적 사고와 호기심을 키우기 위해서다.

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의 길을 선택할 때도 “어떤 직업을 갖든 반드시 합리적으로 논리를 펴나가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힘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수학이든 물리이든 과학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학과를 택해야 한다”며 자연과학을 전공할 것을 반강제적으로 권유했다고 한다. 실제로 최태원 회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친의 자연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문과와 이과로 나뉘지 않습니까? 저는 문과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절대 문과는 안 된다는 겁니다. 독특한 논리가 있으셨어요. 젊었을 때 자연과학을 공부 안 하면 다시는 할 수 없다. 인문과학은 서른이 되어서도 할 수 있지만, 자연과학은 그게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결국 선친의 뜻에 따라 대학은 공대나 이공계 중에 선택해야 했습니다.”


최종현 회장의 교육철학

최종현 회장은 평소에도 “내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물적 재산이 아니라 재산이 만들어지는 방법”이라며 “지식이 있으면 재물은 절로 따라온다”는 말을 자주했다.

1 소박한 생활과 화합 - 늘 부족한 듯 생활하라.
2 사상누각 이치의 깨달음 -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능력껏 찾아 먹어라.
3 철저한 실용주의 - 겉치레에 얽매여 앞일을 놓치지 마라.
4 글로벌 인재로서의 자질 - 토론과 기록, 분석하는 것을 즐겨라.

“경제의 기본 원칙은 합리다. 따라서 경제를 잘 알려면 ‘理’, 즉 물리나 화학, 생물 가운데 하나를 공부해야 한다.”
-최종현 회장가족이 화목해야 한다
한화가의 교육법




고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생전 별명은 ‘다이너마이트 김’이다.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며 기업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런 별칭이 붙었다. 그는 자식을 가르칠 때도 이런 특성처럼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의 방식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기보다는 향후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야 할지 본인 스스로 느끼게 하는 체험식 교육에 치중했다. 그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특히 장남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차남 김호연 빙그레 회장에게는 평소 특유의 대장부론을 강조했다. 생전에 “남자는 술도 좀 마시고 담배도 피워보며 단맛 쓴맛 다 맛봐야 한다”며 “무엇을 하든 간에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면서 호연지기를 키울 것을 권했다.


남자는 넓고 크게 볼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장남인 김승연 회장을, 당시로는 단어조차 생경했던 조기유학을 보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찍이 해외 견문을 보낸 것은 혼자서 자립심을 키우라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김승연 회장이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경기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1974년 캘리포니아 멘로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다시 시카고 바울종합대학으로 옮겨 정치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그가 경영학을 전공한 뒤 정치학을 전공한 것도 보다 많은 식견을 쌓아서 훗날 아버지 못지않은 기업인이 되어야 한다는 각오 때문이었다.

김승연 회장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부터 꿈이 사장이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그룹 내의 안 돌아본 공장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유학을 가기 전에도 아버지의 지시로 각 공장을 돌아보았고, 방학을 이용해 귀국할 때마다 매번 공장을 둘러보고 다녔다. 그래서일까. 장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역시 한때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통했다. 아버지의 스타일을 쏙 빼닮은 점이 크게 작용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비즈니스를 다이너마이트 같은 뚝심과 추진력으로 성공시킨 것이 한두 건이 아니다.

김승연 회장이 한국화약그룹을 승계받았을 때는 고작 29세에 불과했다. 그동안 아버지를 보좌해오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대기업의 사령탑을 맡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결국 한화그룹 회장에 오른 김 회장은 업무추진력이 있고 카리스마 있는 총수로의 변신에 성공해 대한생명을 인수하고 유화와 화약을 중심으로 한 제조 부문, 대한생명과 한화증권을 중심으로 한 금융, 유통과 레저 위주의 신성장 등 3대 축을 완성했다.


김종희 창업주의 교육철학

김종희 창업주의 자녀교육 원칙 중 하나는 재테크를 하듯 ‘자녀테크’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사교육비를 어떻게 지출하느냐가 아니다. 즉, 남들이 다 가는 학원에 보내고 남들도 다 보는 교재를 사주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자녀교육을 과감히 버리라는 것이다.

1 자녀의 꿈과 희망에 눈높이를 맞춰라.
2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3 자녀들의 재능을 일찍 파악해 지원하고 격려하라.


“눈에 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고, 그곳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없다.”
-김종희 창업주


부지런한 자가 성공한다
두산가의 교육법



1대(박두식), 2대(박두병)에 이어 현재 3대(박용곤·용성·용현·용만)까지 이어온 두산가의 경영철학이자 자녀교육의 제1원칙은 근면과 성실이다. 또 다른 교육철학은 가족 간의 우애와 인화다. 두산가의 후계자 교육은 고지식한 학문이나 지식 습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경영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만큼 기업의 앞날을 위한 전문성, 조직을 이끌기 위한 우애와 인화의 정신 육성이야말로 두산가 자녀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박승식 창업주는 “가정이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고 지아비는 화하고 지어미는 순해야 한다”며 “이럴 때 재산 한 푼이 없어도 그 가정은 언제나 평화롭다”고 강조했다.


장자를 중심으로 인화해라

평소 부친의 이 같은 가르침을 물려받은 박두병 초대회장도 그룹 사시를 인화로 잡을 정도로 중요시 여겼다. 특히 박두병 회장은 슬하에 6남1녀를 둔 만큼 형제들 간의 상속권 다툼이나 알력을 막기 위해 가족 간의 우애와 인화의 정신을 나누도록 했다. 박 회장은 매주 일요일이면 직계가족을 다 모이게 했다. 가족 모임을 통해 우애를 다지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는 자녀들이 어렸을 적부터 형제들 간 사소한 말다툼이 일어나면 매우 엄격하게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장자인 박용곤 명예회장을 앉혀 놓고 심하게 혼을 낼 때가 많았다.
이럴 때면 항상 “집안의 화목은 장자에게 달렸다. 형이 조금 덜 가지고 동생에게 먼저 줄 때 형제간 우애와 존경이 생겨나는 법”이라고 타일렀다. 장자를 중심으로 한 두산가의 인화라는 유훈은 세대에 걸쳐 철저하게 가슴속에 새기는 교육철학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는 직접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였지만, 보통은 회사경영으로 바쁜 와중에도 자녀들과 산과 들로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가르쳐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교육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4남 1녀를 조양유치원을 거쳐 서울사대 부속 초등학교(전 관립 경성사범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지만. 반드시 일류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하되 아이의 능력에 따라 알맞은 학교를 선택해 진학하도록 했다.

박승식 창업주의 교육철학
‘두산’이라는 이름은 박승식 창업주가 직접 지었다. 그는 아들에게 “네 이름 가운데 두와 뫼 산을 붙여 두산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두산이라는 사명처럼 한 말 한 말 끊임없이 차근차근 쌓아 올려 산처럼 커지라는 숨은 뜻이다.
1 소박하게 살아라.
2 자녀교육이라면 회초리도 마다하지 마라.
3 노동, 금융, 유학, 외국어의 키워드를 잊지 마라.

“부지런한 것은 착한 것의 으뜸가는 것으로, 모든 선의 으뜸이다. 그렇지만 한 번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나쁜 것 중에서도 으뜸이다.”
-박승식 창업주겉치레를 삼가고 실질을 추구한다
롯데가의 교육법

롯데그룹은 재계에서 실속파로 통한다. 가식을 부리지 않고 내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거화취실(화려함은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한다). 이는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자녀교육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겉치레를 삼가고 실질을 추구하는 거화취실의 철학은 최근 열린 신격호 총괄회장의 구순 잔치에서 엿볼 수 있다. 2011년 10월 30일 신 회장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가족들과 구순 잔치를 치렀다. 이 자리에는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와 큰딸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 장남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가족과 친척 60여 명이 참석해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하쓰코 여사와 신동주 부사장 가족 등은 모임을 위해 일본에서 입국했다.

화려한 생일보다는 주민들 위한 마을잔치를
신 총괄회장은 평소 가족끼리 모이는 생일잔치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년 5월 고향인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여는 마을잔치는 성대하게 한다. 1970년 대암댐이 건설되며 고향이 수몰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이듬해부터 열어 왔다. 지난해 5월 1일 열린 41회 잔치에는 그의 가족과 마을 주민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자신의 구순 잔치는 재벌 회장답지 않게 단출한 가족모임으로 그쳤지만, 고향 사람들에겐 매년 마을잔치를 열어주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인 신동빈 회장도 부친의 거화취실 철학을 그대로 물려받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 5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 때 신 회장이 내놓은 와인만 봐도 이 같은 성향이 잘 드러난다. 전경련 회장단 만찬은 대개 회장단 멤버들이 돌아가며 초청하는 형식을 띠는데, 이날은 신 회장이 맡았다. 롯데호텔 내 최고급 식당인 피에르 가니에르에서 열린 이날 만찬에 신 회장은 비교적 저렴한 와인을 준비했다. 와인들은 신 회장이 직접 골랐다. 이번 와인 선택을 두고 신동빈 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부친의 거화취실을 체화한 덕에 가격보다는 맛과 실속을 따진 실속형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신격호 회장의 교육철학
‘교육’을 한자를 풀어보면 ‘가르쳐서 키운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교육은 단지 한 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이라는 게 신 회장의 신념이다. 특히 자녀교육은 평생을 가르쳐야 하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 예와 덕을 중요시하는 일본을 배워라.
2 성실함이 큰 신뢰를 쌓는다.
3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천천히 걸어가는 우보천리를 교훈으로 삼아라.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천천히 걸어 천 리를 간다는
 소의 걸음에서 배울 점이 많다.”
-신격호 회장

기다림을 배워라
효성가의 교육법


효성의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은 슬하에 석래, 양래, 욱래 3형제를 두었다. 생전에 조홍제 회장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부잣집 자녀들일수록 방종해지기 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녀교육의 최우선 순위를 자립심으로 삼았다. 자식들이 혹여 ‘부잣집 아들병’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해 일부러 매우 엄하게 키웠다.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독립심 강한 사람으로 키워라

조 회장이 신병 치료차 인천 송도 별장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지루한 투병생활을 걱정한 지인들이 번갈아 찾아와 병문안 겸 말 상대를 해오던 터였다. 문안차 회사 직원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셋째인 조욱래 사장이 찾아왔다는 기별이 왔다. 이때 조 회장은 “기다리라고 해라”는 말 한마디 던지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중요한 업무 보고가 아닌, 단순한 말 상대나 할 요량으로 찾아온 회사 직원은 다소 민망해졌다. 직원은 “조 사장이 오셨다는데 들어오라고 하시지요.”라고 권했지만, “아니야. 조금 기다리게 해야 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자신이 하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 줄 알고, 또한 그렇게 알도록 가르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었다. 이날 아버지는 아들을 밖에 앉혀두고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게 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경제관념을 확실히 심어주기 위해 경제교육 역시 철저히 시켰다.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용돈 예산을 짜게 했고, 그것이 합당한 것일 때만 용돈을 주었다. 사후관리도 잊지 않았다. 자식들이 용돈을 쓰고 난 뒤에는 꼭 결산을 하게 하여 불필요한 낭비와 계획 없는 소비를 하지 않도록 했다. 성장한 자식들이 해외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그들 스스로 접시닦이를 해서 부족한 돈을 보태 쓰도록 할 정도로 최소한의 경비만 지급했다. 일정기간 한정된 돈으로 생활하면서 스스로 생활비를 운용하는 감각을 몸에 익혀 자연스레 독립심을 키우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뜻이었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재벌가의 아들이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잘 아는 자식들은 유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녀를 엄하게 키우는 건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아들을 한 시간 넘게 기다리게 하거나 이역만리 타국에 있는 아들에게 접시닦이를 시키는 대기업 회장의 모습에서 깊은 여운이 남는다.


조홍제 창업주의 교육철학

조 창업주는 세 아들을 모두 경영자로 키웠다. 그는 3형제에게 경영자로서 인재를 선택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참고할 것을 강조했다. 반골유무(叛骨有無 : 회사를 배반할 사람인지 아닌지 신중을 기하고 사람을 뽑아라), 지론출중(持論出衆 : 탁월한 지론을 가진 인재를 뽑아라), 진정가장(眞正家長 : 가정이 중요하다).

1 교육은 평생 농사다.
2 하게 만들지 말고 하고 싶게끔 만들어라.
3 뭐든 하려면 제대로 해라.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그 무엇도 다스리지 못한다.”
-조홍제 창업주


부모의 품에 안주하지 마라
코오롱가의 교육법


코오롱 그룹의 이원만 창업주는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이어진 양반 출신 자제다. 이 창업주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15대손이다.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선구자로 김시습, 서경덕이 주기파(경험·현실주의)의 대표주자인 율곡 선생을 가르쳤다면, 회재는 주리파(도덕·정신주의)인 퇴계 선생의 스승이었다.

이런 학자 가문에서 태어난 이 창업주의 장남 이동찬 명예회장이 어렸을 때만 해도 가문의 위세와 엄격함은 대단했다. 이 창업주가 물려받은 재산은 백미 약 500석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인 이동찬 회장은 500석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골 보통학교도 돈이 없어서 쉬었다 다니면서 7년에 걸쳐 세 군데나 옮겨 다녔다. 맹모삼천지교처럼 자식교육을 위해 세 번의 이사를 했던 게 아니다. 이 회장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부친이 자신의 나이 29세에 가산을 정리해 바다 건너 일본으로 훌쩍 떠났기 때문이다.


자식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

이동찬 회장이 스스로 “내가 지식 탐구욕과 투지로 피 끓게 된 계기는 모두 부친의 일본행 때문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일대의 사건이었다. 이 명예회장은 부친의 빈자리를 대신하면서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했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 부친 대신 모친과 누이동생을 돌보며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던 것.

이원만 창업주는 훗날 자신의 일본행에 대해 솔씨(소나무 씨)의 교훈을 들어 이유를 대신한 바 있다. 그가 10년간 정부의 산림조합에 발탁돼 산일을 볼 때였다. 소나무 열매가 붉게 익으면 저절로 벌어지면서 그 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데, 신기하게도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제 어미나무 밑에 떨어진 씨앗은 새싹을 틔우지 못했다. 어미나무의 가지 그늘에 가려 제대로 햇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창업주는 아들인 이동찬 회장에게 “솔씨처럼 양반 자식이라고 부모 품에 안주하면 출세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식을 신천지에 보내기 싫어서 당장 붙잡아 두는 부모라면 아무리 자식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해도 낙제라고 단언했다.

이원만 창업주의 교육철학
코오롱가는 특별히 화려한 가훈이나 엄격한 생활 규범이 없다. 소탈한 이 명예회장의 성격 탓이기도 하다. 다만, 최소한의 지킬 것은 지켜가며 개성에 맞게 자라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 다양한 인생경험을 하면 족하다는 게 그의 교육철학이다.
1 자녀들과 취미생활을 공유하라.
2 돈을 올바르게 알고 제대로 써야 한다.
3 표현이 서툰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은 여건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해야 한다.”
-이원만 창업주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대림가의 교육법
이재준 창업주는 자식들에게 한번 약속한 건 꼭 지키라고 강조했다. 특히 약속시간에 늦으면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그가 얼마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회사 임원과 함께 중국 출장을 갔다. 당시 약속시간에 맞춰 호텔 앞 로비에 갔던 임원은 이 창업주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다음 날 호텔 로비에 일찍 기다릴 요량으로 8분쯤 이르게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창업주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약속은 나와 하는 것
사흘째 되는 날, 이 임원은 작심하고 20분이나 일찍 로비에 나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 창업주가 내려왔다. 약속시간 15분전이었다. 그 임원이 15분이나 일찍 나온 이유를 묻자 그는 “나는 약속시간보다 15분 일찍 나가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창업주가 약속시간을 이처럼 철저하게 지킨 사례는 이것뿐 아니다. 한번은 이 창업주가 지인들과 산행을 가기로 하고 평소처럼 약속 장소에 15분 먼저 도착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시간 5분이 지나도 여전히 오지 않은 일행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먼저 출발했다. 뒤늦게 합류한 지인은 바로 그의 사돈이었다. 어찌 보면 예의에 크게 벗어난 행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예외가 없었다. 그는 아들에게도 약속시간에 15분 일찍 나가면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이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첫째, 우선 일찍 나가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여유 있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 미리 나가 있으면 상대방의 호감을 사거나 오히려 상대가 미안한 마음을 가져 대화를 쉽게 풀어갈 수 있다. 셋째, 도착 시간을 잘 계산해서 움직이면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다. 그래서 그의 아들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다고 한다.
이 창업주는 이 외에도 자식들에게 “풍년 곡식은 모자라도 흉년 곡식은 남는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절약해라. 경기가 나빠져서 사업이 잘 안 되는 날도 있을 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절약하라”며 절약정신과 내실경영을 강조했다.

이재준 창업주의 교육철학
이 창업주는 자식과 직원들에게 자주 책임감을 강조했다. 또한 성실과 근면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말이며, 특히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고 말했다.
1 자기 일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2 사람은 널리 사귀되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3 순리를 저버리지 마라.

“한평생 살아오면서 나는 이것만은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실천했지. 그것은 약속, 시간 약속이야. 제일 쉬운 시간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하겠나.”
-이재준 창업주

호연지기의 마음을 가져라
동원가의 교육법
‘마도로스 출신의 그룹 총수’, ‘21세기 해상왕 장보고’ 등의 수식어로 대변되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바다를 개척해 동원산업을 일궜다. 김 회장은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그러나 김 회장의 자녀교육은 재계에서도 널리 소문날 만큼 혹독하다. 김 회장의 맏아들인 김남구 부회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6개월간 참치잡이 배를 탔다. 멀리 남태평양과 베링해까지 나가 참치를 잡았다. 하루 16시간 중노동을 했지만 군말 없이 아버지의 지시를 따랐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바다와 배를 배우지 않고는 동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김 부회장은 그물을 던지고 참치를 잡아서 삶고 냉동시키는 과정부터 갑판 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동료 선원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는 1991년 동원증권에 들어올 때도 대리로 입사했다. 첫 부서도 여의도 본사가 아닌 명동에 있는 코스모스지점이었다. 지점과 채권영업, 기획실을 거치며 업무력을 쌓은 뒤에야 비로소 임원이 될 수 있었다.
둘째 아들인 김남정 부사장도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 지난 1997년 경남 창원 참치통조림 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일했고, 이후 동원산업 영업부 평사원으로 시내 백화점에 참치 제품을 배달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두 딸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녀 은자 씨와 차녀 은지 씨는 대학 입학 후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교육이념으로 유명한 가나안농군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김 회장은 이곳에서 두 딸이 흙, 노동, 근검절약의 중요성을 배우기를 바랐다

이런 혹독한 자녀교육에 대해 일부에서는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 사회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도자는 조직의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자녀들이 배우기를 원했던 것이다.


김재철 회장의 교육철학

김 회장은 요즘도 월 평균 10~20권의 책을 읽는다. 경제, 경영, 역사, 심리 등 독서 분야도 다양하다. 회계학도 독학으로 배워 재무제표도 꼼꼼히 본다. 당연히 자식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1 독서와 글쓰기를 꾸준히 해야 한다.
2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겨라.
3 자녀의 입장에서 뜻을 헤아려라.


“부모가 자녀에게 주기 싫지만, 반드시 줘야 할 것이 고생입니다. 요즘 2, 3세 기업인들은 죽기 살기로 뛰었던 창업주 세대와는 달리 여유가 있어 좋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오만과 나태에 빠질 가능성도 있지요. 세상에는 지름길과 아스팔트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습니다.”
-김재철 회장

여성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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