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4일 화요일

34년간 漢詩 숙제하는 백발 신사들

'난초처럼 맑은 향기 나누자'고 모여 한 달에 한 번 각자 써 온 시 품평
병상서, 산소호흡기 달고도 참석 "잡스런 생각 없어지고 낭만 유지"

백발의 남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가죽 헌팅캡을 쓰고 온 이, 지팡이를 짚은 이, 가방을 메고 온 이….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모인 여섯 명은 하나같이 한문 적힌 A4 용지를 들고 있었다. 한시(漢詩)였다.

13일 오전 11시 경기 고양시의 한 사무실. 34년째 계속된 한시 모임이 이날 300회를 맞았다. 이 모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지은 시를 내보이고 서로 품평한다. 8행시인 율시(律詩)와 4행시인 절구(絶句)를 최소 한 편씩 지어오는 게 유일한 숙제다.

조순(89) 전 서울시장은 두산 베어스 야구모자를 쓰고 왔다. "1983년 10월 첫 모임이 우리 집에서 열렸다"고 했다. 고(故) 김호길 전 포항공대 학장이 지인 5명을 모아 시 모임을 만든 게 시작이었다. "난초처럼 맑은 향기를 나누자"는 뜻에서 이름은 '난사(蘭社)'가 됐다.

34년간 이어진 ‘난사’ 회원들이 300회를 맞아 초창기 지은 한시들이 적힌 두루마리 족자를 펼쳤다. 왼쪽부터 이장우 영남대 명예교수,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이종훈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 조순 전 서울시장,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
34년간 이어진 ‘난사’ 회원들이 300회를 맞아 초창기 지은 한시들이 적힌 두루마리 족자를 펼쳤다. 왼쪽부터 이장우 영남대 명예교수,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이종훈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 조순 전 서울시장,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 /남강호 기자

한때 11명까지 늘었지만 김호길 전 학장, 유혁인 전 공보처 장관,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 김동한 전 대한토목학회장,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이 별세하고 신입 회원을 받아 지금은 7명이다. 김용직(85) 서울대 명예교수는 "늘 나왔던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오늘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며 "멤버들이 난사를 참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다"고 했다. 고병익 총장은 입원 병상에서도 시를 썼고, 이헌조 회장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모임에 나왔다고 한다.

이종훈(82)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은 "모임에 뒤늦게 참여해 난 주니어"라고 말했지만 올해로 21년차다. 서무를 맡은 그가 지난 회 발표된 시들을 컴퓨터에 저장하고, 각자 써온 시들을 프린트해 나눠준다. 돌아가며 읽고 뜻을 한글로 푼다.

"참 좋네요." "야~ 표현이 참 멋져요." 차 향기 가득한 방에 훈훈한 덕담이 오갔지만 그렇다고 물렁하진 않다. 이장우(77) 영남대 명예교수가 들고온 '구정에 눈 덮인 궁에서 즐겁게 놀았다(舊正遨遊雪宮)'란 제목의 절구시 마지막 구절이 문제가 됐다. "(어린 손자가) 여러 번 언덕에 오르는 '흥겨운' 마음이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더라(莫比興心數上丘)"에 쓰인 '흥겨울 흥(興)' 자가 측성(기울어지는 소리)인 게 규칙에 어긋났다.

"그 자리엔 평성(평평한 소리)이 와야지요." 6명이 10분간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다 결국 평성인 '아이 동(童)' 자가 채택됐다. 난사는 이렇게 쌓인 시들을 모아 지금껏 한시집 네 권을 냈다. 이용태(85) 전 삼보컴퓨터 회장은 "사는 데 치여 정서가 메마를 때 한시는 마음에 아쉬운 구석을 채워줬다"고 말했다.

"가끔가다 '와 정말 잘 썼다' 하는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게 참 좋죠." 조순 전 서울시장이 거들었다. "일본 최고의 소설가였던 나쓰메 소세키도 말년에 매일 오전엔 소설을 쓰고 오후엔 한시를 한 수씩 썼어요. 왜 그렇게 했을까 생각해보면 말이야, 그 사람은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한시를 쓰면 잡스러운 생각이 없어져요. 낭만의 정서를 잘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맏형 김종길(91) 고려대 명예교수가 "이제 새로운 회원을 받아 명맥을 잇자"며 웃었다.

이날 회원들이 크게 반긴 시는 이종훈씨의 '난사 300회 모임을 기뻐하며(蘭社欣歡三百回)'였다. '시제 찾고 글귀 골라 사귀어온 삼십 년 모임(覓句探題卅載遊)/ 실사구시 청담 나누며 풍류도 이야기했지(淸談實是語風流)/ 세월 흘러 귀밑머리 희고 몸은 비록 파리해져도(邇來鬢白雖身瘦)/ 좋은 시문 지으려는 굳센 마음으로 늙는 시름을 견뎌낸다(健筆壯心勝老愁).'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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