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나오면서 헷갈리는 질문이 따뜻한 물이 차가운 물보다 더 빨리 어는가이다. 최근 몇 년간 러시아나 북유럽 등 추운 지방에서 유행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증샷이 있다. 바로 뜨겁게 끓인 물을 공중에 뿌린 뒤 물이 얼어붙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인증샷을 찍으려다가 끓인 물을 잘못 뿌려 화상을 입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다.
이들 인증샷은 뜨거운 물조차 저렇게나 빨리 얼 만큼 정말 추운 곳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찬물보다 오히려 뜨거운 물을 뿌렸을 때 더 빨리 얼어붙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리고 이런 의외의 현상을 ‘음펨바 효과’라고 부른다.
음펨바 효과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963년 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당시 탄자니아의 한 중학교를 다니던 에라스토 음펨바라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음펨바는 조리 수업 중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 우유와 설탕을 섞어 끓인 용액을 식히지 않고 냉동실에 바로 넣었는데, 식혀서 넣은 친구들의 것보다 더 빨리 얼었다.
음펨바는 고교 진학 후 한 강연에서 만난 다르에스살람대 물리학과 데니스 오스본 교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고, 오스본 교수는 대학으로 돌아와 이 현상을 재현한 뒤 1969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던 2014년 싱가포르 연구팀이 마침내 주요 원인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장시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팀은 음펨바 효과가 물 분자에 작용하는 힘인 공유결합과 수소결합의 상관관계가 만든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doi: 10.1039/c4cp03669g
물 분자는 내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가 공유결합으로 연결돼 형성되고, 각각의 물 분자들은 수소결합으로 연결돼 있다. 그런데 만약 물을 끓여 물 분자들이 서로 멀어지면, 즉 수소결합의 길이가 길어지면 물 분자 내의 공유결합 길이는 반대로 짧아지는데 여기에 에너지가 축적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물이 얼음으로 바뀐다는 건 열역학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뜨거운 물은 찬물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축적하고 있기 때문에 냉각 시 공유결합이 길어지면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속도도 더 빠르다. 연구팀은 이를 종합해 뜨거운 물의 특성상 에너지를 더 빨리 방출할 수 있어 찬물보다 더 빨리 냉각된다고 설명했다.
얼음속, 준액체층을 찾아라
교육과정에서 물의 상태변화는 초등학교 4학년 과학에서 처음 나온다. 이때 물을 가열하면 수증기가 되고, 냉각하면 얼음이 되며, 또 물이 얼음으로 바뀔 때 무게는 변하지 않고, 부피는 늘어난다는 사실까지 함께 알게 된다. 어렴풋이 초등학교 때 요구르트나 물을 얼리는 실험을 한 기억이 날 것이다.
그리고 이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을 배우는데 액체인 물이 0도가 되면 고체인 얼음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과학에서도 조금 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할 뿐 같은 내용을 배운다. 그런데 0도가 됐을 때 만들어진 얼음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정말 고체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얼음이 ‘완전한’ 고체는 아니다. 대개 일정 온도까지 얼음은 고체인 얼음 결정과 액체층이 혼합돼있다. 온도가 그 아래로 내려갔을 때 비로소 완전한 고체로 바뀐다. 얼음에 섞여 있는 미량의 물질에 따라 완전한 고체로 바뀌는 온도는 다르다.
이는 특수한 조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음도 고체와 액체층이 뒤섞여 있다.
그럼 그 액체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먼저 얼음 속에서 액체층을 찾을 수 있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는 얼음이 육각형의 결정으로 빼곡히 차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사실 그 육각형 사이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다. 이 틈은 물 분자가 결정을 이룰 때 물에 섞여 있던 물질들이 모여 만들어 낸 것이다.
예를 들어 소금물을 냉각시키면 물 분자들은 얼음 결정을 형성하고 소금 분자(NaCl)들은 얼음 결정들 사이 작은 틈으로 모인다.
김기태 극지연구소 실용화연구사업단 선임연구원은 “이 물질들은 고체가 아닌 용액 상태로 존재해 ‘준액체층’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유기물 또는 무기물들이 얼음 결정 사이의 틈에 모이는 현상을 ‘동결농축효과’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준액체층은 온도가 낮아질수록 점점 고체로 바뀐다. 이 준액체층이 없어져야 완전한 고체 상태의 얼음이 되는 것이다.
얼음 표면, ‘압력설’ 틀리고 준액체층 맞아
얼음에서 액체층은 얼음의 속뿐만 아니라 겉에도 있다. 여기서 추운 겨울날 즐길 수 있는 스케이트 얘기를 잠깐 해보자.
스케이트가 얼음판 위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놓고 1800년대부터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을 내놨다. 당시 정설로 여겨진 주장은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눌러 고체 표면의 일부가 액체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물의 상평형 그래프(73쪽 그래프 참조)’를 보면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의 상평형 그래프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 물이 얼음이나 수증기로 바뀌는 정도를 나타낸 그래프다. 그렇다. 물은 온도가 아닌 압력으로도 상태가 변할 수있다. 약 영하 22도에서 0도 사이의 얼음은 온도를 높이지 않고, 압력만 높여도 물로 바뀐다.
과거 여러 과학자는 이를 근거로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짓누른 압력 때문에 고체인 얼음 표면이 액체로 바뀐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케이트 날처럼 얼음에 닿는 면적이 좁으면 같은 질량의 운동화 바닥으로 누를 때보다 더 큰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만큼 물리학적으로 충분히 일리 있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계산을 해보니 문제가 있었다. 평균 체중의 성인이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 위에 섰을 때 스케이트 날의 압력이 얼음을 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았다. 김 선임연구원은 “스케이트장은 보통 영하 5~10도인데, 이때 얼음 표면을 물로 바꿀 정도의 압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산상 몸무게가 100kg을 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른 사람도 얼음판 위에서 쉽게 미끄러지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압력 때문이 아니라 얼음 표면에 액체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액체층이 있다면 고체보다 마찰력이 작기 때문에 누구든 쉽게 미끄러질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1997년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 연구팀이 얼음 표면에 액체층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연구팀은 얼음 표면에 전자를 쏘아 전자가 어떻게 튕겨 나오는지 정밀하게 관측했고, 영하의 온도에서도 전자가 고체인 얼음이 아니라 액체인 물과 충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doi: 10.1016/S0039-6028(97)00090-3
이후 많은 연구 결과에서 얼음 표면에 액체층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역시 얼음 속에 있는 액체층과 함께 준액체층으로 불린다. 결국 준액체층에 스케이트 날이 미끄러지는 것이다.
수소야, 움직여라
보통 음식을 오래 보관하려면 냉동실에 얼린다. 얼리면 미생물이나 여러 물질이 음식의 재료와 일으키는 화학반응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음에서도 화학반응은 일어난다.
화학반응은 둘 이상의 물질이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을 때 일어난다. 그 무언가는 분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자일 수도 있다. 더불어 화학반응에는 이 무언가들이 오고 갈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매개체는 액체 상태의 물이다.
반면 얼음은 결정으로 이뤄져 있어 화학반응을 매개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예상과 달리 실제로는 얼음에서도 화학반응이 활발히 일어난다. 도대체 결정화된 얼음에서 어떻게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것일까.
한 가지 방법은 얼음에 준액체층이 있다는 데서 쉽게 착안할 수 있다. 얼음 곳곳의 준액체층 속 물질들은 화학반응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 오히려 물에 녹아있을 때보다 더 활발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김 선임연구원은 “만약 얼음 속에 있는 준액체층에 산성도(pH)를 변화시키는 물질이 농축되면 그 안의 물질들이 물 속에 있을 때보다 더 빨리 화학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 예로, 마에다 야스아키 일본 오사카부립대 명예교수는 물에서보다 얼음 속에서 물질 변화가 10만 배나 빨리 일어나는 현상을 발견해 1992년 8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doi: 10.1038/358736a0
마에다 교수는 아질산이온(NO2-)이 질산이온(NO3-)으로 바뀌는 화학반응을 관찰했다. 아질산 이온은 물 속에서는 물에 녹아있는 산소와 만나 질산이온으로 바뀌는데만 11년 5개월이 걸리는 아주 느린 반응이다. 그런데 얼음 속에서는 이보다 10만 배나 빠른 1시간 만에 이 반응이 일어났다. 김 선임연구원은 “얼음 속 준액체층에 산소가 농축되고 산성도가 높아지면서 반응 속도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음이 화학반응을 매개하는 방법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물 분자에서 양전하를 띠는 수소 원자가 얼음 결정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강헌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금속에서 전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전류가 흐르게 만드는 것처럼 얼음 속에서는 수소 원자가 결정화된 물 분자들을 오가며 여러 화학반응을 매개한다”고 말했다(위 그림).
수소 원자가 물 분자 사이를 오가는 과정은 물이 액체 상태일 때보다 고체 상태일 때 더 잘 일어난다. 강 교수는 “물 분자가 결정화되면 규칙적으로 배열되고, 이에 따라 물 분자 사이의 수소 원자 이동이 더 활발히 일어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말했다.
얼음에서 전하 이동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얼음 속에 있거나 얼음에 붙어 있는 물질들의 화학반응을 매개하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런 사실을 알아내 2018년 미국화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물리화학레터스’에 발표했다. doi: 10.1021/acs.jpclett.8b01825
결정 구조만 17가지
지금까지 얼음 결정은 육각형이라고 계속 언급했다. 하지만 사실 모든 얼음 결정이 육각형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얼음 결정이 육각형인 것은 맞다. 하지만 흔히 겪을 수 없는 극저온 또는 초고압 상태에서는 다른 모양의 얼음 결정들이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 총 17종의 얼음 결정이 실제로 관찰됐다.
결정의 종류마다 ‘얼음(ice)’이라는 글자 뒤에 로마 숫자가 붙는데, 이중 우리가 흔히 보는 얼음 결정인 육각형 모양은 ‘얼음 Ⅰh’형이라고 부른다. 종종 한 면이 정사각형인 정육면체 (cubic) 구조를 띠는 결정 구조도 소량 발견되는데, 이 결정은 ‘얼음 Ⅰc형’이다.
‘얼음 Ⅱ’형으로 불리는 결정도 있는데, 이 얼음 결정은 한 면이 마름모 모양인 육면체 구조를 띠고 있다. 압력이 2100~6118기압(atm)이면서 온도가 약 영하 24도 이하에서 만들어진다(일부 구간 제외). Ⅰ형이 아닌 다른 형태의 얼음 결정은 자연적으로는 지구 내부나 지구 밖 우주와 같은 극한 환경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자들은 17종 외에도 더 많은 결정 구조가 존재할 것으로 추측한다. 정형화된 결정 구조를 만들지 않는 비결정 얼음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마츠모토 마사카즈 일본 오카야마대 복합학연구소 교수팀은 2017년 국제학술지 ‘화학물리학저널’에 얼음이 300개 이상의 결정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doi: 10.1063/1.4994757
연구팀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능한 얼음의 결정 구조를 모두 만들어냈고, 그 수는 300종 이상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기존에 알려진 저밀도의 얼음 결정 구조인 우주풀러렌 구조와 제올라이트 구조 외에 이보다 밀도가 더 낮은 에어로아이스 구조를 새롭게 찾아냈다.
에어로아이스 구조는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이 다면체를 이루고 있는 구조로, 절대 압력과 절대 온도가 0에 근접했을 때 형성된다. 이런 결정 구조를 지닌 얼음은 지구보다는 외계 행성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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