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열풍이 거세다 못해 학원가에 ‘초등학생 의대 준비반’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사교육을 통한 초등학교 선행 학습이 예전에는 과학고·영재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의대 선호가 높아지면서 학원들이 간판을 ‘의대반’으로 바꿔달고 있다는 것이다. 학원들은 입학 고사까지 치러 ‘초등 의대반’을 뽑는데 경쟁률 10대1도 예사라고 한다.
▶유튜브에도 ‘초등·중등 의대 로드맵’ 같은 동영상들이 떠있다. 실시간 동영상 밑에는 “초1 때 수·영 어느 정도 해놔야 할까요” “초5 남아 엄마입니다. 지금 진도대로라면 초등 때 고등 선행 불가한데 괜찮을까요” 같은 학부모 질문이 쏟아진다. 인터넷에 떠 있는 ‘초등생 의대반 선발고사’ 문제에는 “고교 문제 같은데” “초딩 때 저 어려운 걸 하면 중딩, 고딩 때는 뭘 공부하냐” 같은 댓글도 붙어 있다.
▶전국 수석을 차지한 자연 계열 수재들이 무슨 공식처럼 물리학과로 진학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도 대입 예비고사 전체 수석인 임지순 전 서울대 교수, 1971년도 수석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이 다 물리학도였다. 1990년 입시학원 대입 배치표를 보면, 자연 계열 성적 순위가 서울대 물리학, 컴퓨터공학, 의예, 전자공학, 미생물학이었다. 상위 20학과 중 서울대를 제외하면 연세대 의예 하나뿐이었다.
▶요즘 입시에서는 대학 서열 최상위에 ‘의대’가 있다.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란 말이 굳어진 지 오래다. 2022학년도 정시 합격자의 성적 상위 20학과가 몽땅 의·치·한이었다. 성적 30위권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30위)를 빼고 다 의학 계열이다. 50위권으로 넓혀도 서울대 5개 학과를 제외한 45개 학과가 의·치·한이었다. 한 입시 컨설턴트는 “독도나 마라도에 의대를 만들어도 학부모들은 서울대 안 보내고 거기 보낼 것”이라고 했다. 성적 최상위 1%를 향한 경쟁에, 학원들의 ‘공포 마케팅’이 가세해 초등생 의대 준비반이라는 웃지 못할 풍경까지 등장한 것이다.
▶의대 선호 현상이 강해진 것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다. 대기업조차 연구원들을 구조조정하는 걸 보면서 월급쟁이의 직업 안정성이 심하게 흔들린 탓이다. 지금도 50대 초중반이 되면 기업 임원이어도 직장에서 퇴직하는 걸 보면서 ‘평생 직업’의 전문직 선호가 훨씬 강해지는 것이 의대 쏠림 현상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의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필수 의료 붕괴는 심각한 지경이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머리 좋은 인재들이 온통 의대로만 쏠리는 나라가 4차 산업혁명의 글로벌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되는 현실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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