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마음이란 무엇인가(하이데거 vs 퐁티)
心不在焉, 目不見 (大學) - 마음이 없으면 볼수 없다.
20세기 이전까지의 서양철학은 마음을 일종의 컴퓨터 처럼 생각
- 우리가 검색어를 넣었을때 연산처리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감각이 들어오고 마음이 처리하고 판단하고 보여주는 구조였다. 감각이 먼저 였다.
그러나 동양의 철학은 2000년전 '대학'에서 보여주듯이 감각보다 느끼고 있는 주체의 마음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논리구조를 서양에서는 20세기 넘어와서 '마음의 지향성' 즉, 마음은 수동으로 데이타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함(훗설, 현상학).
인문학의 목표 : 현재에 사는 것
자본주의-우리를 현재에 살 수 없게 만듬. 항상 미래에 ~을 할 것이라는, 돈을 벌기위해 좋은 학교에 가야하고 좋은 학교에 가기위해 ~해야하고, 그러나 막상 미래가 현재가 되어서는 다시 목적이 수단으로 변할 수 밖에 없는 구조.
- '화두' : 패러독스, 마음의 지향성이 고착되어 버리면 집착이 된다. 마음의 지향성은 활력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몇가지 것들에 대해 마음이 가 있다(고착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잠자리를 봤을때 진짜 잠자리를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터 버리고 모든 것에 지향해야 한다.
* 하이데거
- 마음은 항상 어디로 향하지 않는다(보통 마음은 지향하지 않는다). 마음은 세계가 내 습관, 내 루틴과 다르게 움직일때 비로소 지향한다.
'세계-내-존재'로서 일상적 습관구조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훗설이 마음의 지향성을 발견했다면, 하이데거는 그러한 마음의 지향성이 항상 작동하진 않는 다는 것을 밝혀냈다. 지향성은 특수한 경우에만 발생한다.
◈ [우리는] 가까이 손 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 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쨌거나 손 안에 있는 것이기는 하다. (…)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 메를로-퐁티
우리의 마음이 지향할때는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몸의(신체의)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심장이 유기체 안에 있는 것처럼 고유한 신체는 세계 안에 있다. 그것은 시각적 광경을 살아있게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생명을 불어넣으며, 내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그것과 더불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내가 나의 아파트를 걸어 다닐 때, 그 아파트가 나에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여러 가지 국면들이 제각각 여기서 또는 저기서 보인 아파트를 표상한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 자신의 운동을 내가 의식하지 않고 나의 신체를 그 운동의 단계들을 통해서 동일한 것으로 내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 국면들은 동일한 사물의 다양한 측면들로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그 아파트를 생각으로 훑어볼 수도 있고 상상할 수도 있으며 또는 종이 위에 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라고 해도 나는 신체적 경험의 매개가 없다면 대상의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 스피노자 -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의 두가지 평행된 표현일 뿐이다.
http://blog.daum.net/faylasuf/849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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