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인간에게 자유는 가능한가?(사르트르 vs 알튀세르)
1. 주체는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
사르트르는 극단적 자유주의자이다.
데리다의 '텍스트' - 다양한 경험, 과거의 이해, 독서 등등이 거미줄 처럼 되어 있는 것들이 재배치 되는 것. 푸코의 '저자는 죽었다' 라는 의미는 저자의 창작성에 대한 신랄한 통찰이며, 푸코 이후 우리는 저자에 대해서는 이처럼 선험적 지식의 재배치(저자만의) 하고 연결하는 사람이라고 사유하게 되었다.
칸트 - "자유란 어떤 행동을 자신이 개시하는 능력이다"
이 생각을 가장 극단으로 밀어 붙인 사람이 사르트르이고, 잘도 그렇겠다고 비난한 사람이 알튀세이다.
칸트의 입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 욕망은 결여감으로 시작된다. 결여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동양적 사유의 무욕은 권력자의 정치적 억압일 수 있다.
서양의 욕망을 긍정한다는 것은 결여감을 긍정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결여감이 필연적 결여감인지 아니면 자본주의나 사회구조 등에서 강제한 결여감인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사유한다.
- 사르트르 :『존재와 무(L’Etre et le Neant)』
사르트르에게 존재는 사물 같은 것이고 무는 인간이다.
사물 - 존재 - "있음" : 사물은 본질이 주어져 '~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 - 본질 - existence : 인간은 본질이 존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ex(바깥)istence(있음) 즉,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만들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 받은 존재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인간의 조건적 자유. 존재와 무가 원리적으로 인간이 자유적인 존재라는 주장을 했다면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나타낸 책이 이 책이다.
2.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나는 최초의 정식으로서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 우리는 아주 흔한 경찰의 (또는 다른) 일상적인 호명과 같은 유형 속에서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헤이, 거기 당신!” 만일 우리가 상정한 이론적 장면이 길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 이 단순한 180도의 물리적 선회에 의해서 그는 주체가 된다. 왜? 왜냐하면 그는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바로 그’(다른 사람이 아니라)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Ideologie et Appareils d'Etat)』
-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결정한다고 하는 주체는 그렇게 만들어진 주체에 불과하다.(호명테제)
- 구조주의(structualism) : 한 개인은 구조안에서 일부분으로 존재할 뿐이다. 경제, 사랑.... 무엇이든 구조안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레비-스트로스 『슬픈열대』: 사르트르 비판, 우리가 주체의 틀에 박혀 있는 한 구조를 벗어 날 수 없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구조에 결박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구조주의가 극단적으로 사회를 비관적으로 본 이유는 프랑스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프랑스 점령하에 행해졌던 억압적인 통치가 전쟁 이후 드골정권에 의해 동일하게 행해지는 것을 보고 구조 안에서 캐스팅은 바뀔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구조가 변하지 않는한 결과는 동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후 이러한 구조주의의 절망적 비관을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사르트르식의 자유로운 존재를 구조주의와 결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사유가 후기 구조주의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이미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에 나와 있다.
질문 : 과연 호명에 반응한 것을 가지고 주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답 ; 주체라는 단어에는 주인과 노예, 신민 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존재한다. 고대의 주체라는 개념은 신의 아래(sub)에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가 더욱 컸다. 알튀세의 주체라고 할 때는 이러한 노예, 신민의 의미가 더 강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주체라는 것에 대해 언어적 환상이라고 말한다. 주체라는 의식은 우리의 언어가 주술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탄생했을 뿐이다.
이름은 노예의 이름이다. 내가 불리워 질 수 있도록 만들어 진 것이다.
* 말년에 알튀세르는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의 제목을 단 장문의 논문을 통해서 스피노자적이면서도 니체적이고 동시에 루크레티우스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주장, 인간에게 새로운 구조를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루크레티우스 : 클리나멘을 통해 세계의 우발적 탄생을 주장.
알튀세는 우발적 마주침에 스피노자의 마주침의 두가지 개념(마주침이 기쁘면 지속하고 슬프면 배제한다는)을 적용함. 이것은 당시의 스탈린의 역사발전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이었다. 역사는 발전단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 마주침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알튀세는 맑스에게서 이런 마주침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http://blog.daum.net/faylasuf/849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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