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18세기 최대의 수학자라는 레오날드 오일러(Euler, 1707-1783)가 탄생한 지 3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러시아,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오일러의 탄생을 기념하는 국제 행사를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그런 행사를 가졌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오일러라는 수학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일러는 요한에게 자주 질문을 하여 요한을 짜증나게 하였는데, 그러한 요한을 보고 오일러는 하찮은 것 때문에 스승을 괴롭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가능한 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와 인내가 수학 실력을 높이는 지름길임을 오일러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베르누이 일가 중 수학의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요한의 아들인 다니엘인데, 오일러는 다니엘과 친해지면서 더욱 수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일러의 일생은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바젤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기를 원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20살이 되던 1727년에 그는 러시아의 초청으로 러시아의 아카데미에 가게 되는데, 그가 러시아에 도착하던 날 그를 초청했던 캐서린 1세 여왕은 죽고 만다. 피터 2세가 그 뒤를 잇게 되지만 그는 학문을 중시하지 않아서 오일러는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오일러는 두 번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기도 하였지만 8명이 오일러보다 먼저 죽는 불행도 겪었다.
28살 때에는 당시의 다른 수학자들이 몇 달 동안이나 끙끙대던 문제를 오일러가 3일 만에 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너무 눈을 혹사시켰는지 한쪽 눈을 실명하고 30여년 후에는 다른 한쪽 눈도 멀고 말았다.
러시아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싫증난 오일러는 40살이 되던 해에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으로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대왕과의 불화로 베를린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59세 때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에서 나머지 한쪽 눈마저 실명되고, 큰 화재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69세에는 아내가 죽기까지 하는 등 그의 삶은 많은 불행과 불운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수학의 많은 분야에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 따른 종교의 힘이었고 위대한 수학자이지만 결코 거만하지 않았던 그의 겸손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두 눈이 모두 먼 상태에서도 17년 동안이나 많은 논문을 썼는데, 처음에는 아들에게 그 후에는 서기에게 불러주고 대필시키는 방법으로 논문을 썼다고 한다. 그가 쓴 책과 논문이 500편 이상이고, 누가 계산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그가 평생 동안 매년 800쪽의 논문을 쓴 셈이라고 한다.
아라고(Arago)라는 사람이 “오일러는 사람이 숨을 쉬듯이, 독수리가 하늘을 날듯이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고생도 없이 계산을 한다.”고 말한 것처럼, 오일러는 암산 능력이 뛰어났으며 기억력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운 계산도 암산으로 했는데, 50자리까지도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수학과 물리의 여러 분야에서 그는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오일러 방정식 등 여러 업적을 쌓았다. 그러한 내용들은 여러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쉬우면서도 대단히 중요하고 유명한 오일러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이 공식은 중학교에서 배우게 되는데, 이 공식을 이용하면 정다면체가 다섯 개 뿐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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