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9일 일요일

복잡계와 혼돈이론

“브라질에서 한 나비의 날개 짓이 다음 달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이른바 ‘나비효과’라 불리는 이 가상의 현상은 기상학자 로렌츠(Edwards Lorentz)가 공기의 대류현상과 기후변화에서 기존의 물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초기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 즉 작은 변화가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고자 농담 삼아 즐겨 사용하던 말이다. 흔히 무질서한 현상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유체의 운동(예를 들어 대기의 흐름,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의 운동, 뿜어진 담배연기의 퍼짐 등등)이라든가 군집 생태학에서 다루는 특정지역에 대한 생물체의 분포와 변화 등에서는 우리의 경험으로도 쉽게 느낄 수 있듯이 입력의 미세한 차이가 출력에서 엄청난 큰 차이로 나타난다. 이들은 결정론적인 고전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예측 불가능한 무질서와 혼돈으로서 실제 자연계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일차적으로 다루어 온 기존의 물리학은 더 이상 자연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자연은 더 이상 규칙성과 예측가능성보다는 불규칙성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것일까?
뉴턴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양자이론, 소립자 물리학, 그리고 우주론으로 발전되어온 물리학은 변화무쌍한 자연세계를 수학적으로 모델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의 하나이다.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현상계를 몇 개의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부분들의 집합체로 단순화하고, 부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 체계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것이다. 뉴턴역학에 기반 하여 유체역학도 유체의 흐름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수학적으로 모델화한 수학방정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질서한 유체운동을 실제로 설명함에 있어서는 무력하였는데, 그것은 물리학이 몇 가지 방법론적 가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뉴턴적인 결정론에 대한 믿음이다. 즉 어떤 계의 초기조건과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칙(흔히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되는 운동방정식)을 정확히 알면, 그 계의 과거 및 현재, 미래의 상태를 모두 다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계가 거대한 기계처럼 어떤 결정론적인 질서 하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뜻한다.
둘째는 수렴과 근사에 대한 믿음이다. 즉 나뭇잎 하나의 떨어짐이 지구와 태양간의 만유인력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않듯이 극히 미세한 영향은 무시될 수 있으며, 또한 사물의 행동양식은 일정한 틀에로 수렴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즉 자연계를 질서정연한 부분들로 구성된 매우 안정된 집합체로 본다. 따라서 흔히 경험하는 불규칙한 요동이나 소음과 같은 교란들은 로렌츠의 주장과는 달리 그 효과가 매우 미약한 것으로 쉽게 간과된다.
셋째는 선형성(linearity)의 사상이다. 실제로 자연계를 모델화한 수학방정식들은 대부분 비선형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풀기가 난해하다는 이유로 근사적으로 선형적인 형태로 변형하여 풀거나, 아니면 일차적으로 비선형적인 항들(가령 실제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마찰이나 소음과 같은 영향들)을 제거하고 푼 다음 비선형 항들을 선형적인 결과에 요동 혹은 섭동의 형태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근사적으로 푼다. 그 결과 초기조건이 약간 달라지면 그 결과도 약간 달라지는 입력과 출력간의 비례관계가 형성된다.
넷째는 전체에 대한 정보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정보로부터 획득될 수 있으며 그래서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산술적인 총합과 동일하다는 믿음이다. 한마디로 전체를 이해하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에 대한 정보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고체의 성질은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성질과 원자들 간의 결합구조로 충분히 이해된다. 이는 바로 환원론이라 부르는 과학의 전형적인 방법론이다.
결국 현대물리학의 전 분야에서도 흔히 사용되고 있는 고전과학의 이와 같은 방법론적 가정 하에서는 유체현상의 복잡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뿐 아니라 로렌츠가 주장한 ‘나비효과’도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H2O라는 분자 차원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물 전체를 보면 나타나는 액체 현상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물리학이 아닌 영역에서는 아주 흔한, 부분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던 성질들이 이들을 결합한 전체 차원에서는 나타나는 소위 창발적인 현상들(가령 뇌에서의 의식 현상)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이 어렵게 된다.
혼돈이론은 바로 나비효과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는 유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로렌츠를 필두로 기존 물리학의 이러한 방법론적 가정들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였다. 더욱이 60년대와 70년대 스메일(Stephen Smale), 요크(James Yorke), 메이(Robert May), 만델브로트(Benoit Mandelbrot) 등으로 이어지는 수학자들의 모델화 작업과 컴퓨터의 발달은 비선형 방정식을 풀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줌으로써 혼돈이론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며, 기존의 선형적인 접근방식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자연계의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다름 아닌 혼돈과 안정이 공존하는 세계, 질서와 혼돈이 함께 생성되는 세계, 즉 부분적으로 예측 불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세계를 밝혀낸 것이다. 군집생물학에서 특정지역에서 특정 생물체의 전체 개체수의 변화과정을 모델화한 로버트 메이의 유명한 단순모형을 토대로 혼돈이론의 이러한 특성을 자세히 살펴보자.
메이에 따르면 특정지역에서 생물체의 개체수는 적을 때는 빠르게 증가하고 중간 값일 때에는 거의 증가하지 않다가 많을 때에는 그 증가를 억제하는 요소로 인해 감소하는 생태계적 성질을 지닌다. 가령 토끼 수가 적을 때에는 토끼풀이 급속히 성장하고 토끼 수가 적정선에 이르면 토끼풀도 균형을 유지하지만, 토끼 수가 많아지면 토끼풀은 급속하게 줄어든다. 토끼풀이 줄어들면 다시 토끼수도 줄게 되고 토끼풀은 다시 성장하는 식으로 생태계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 생태계의 모형을 단순화하여 수학적으로 표현해 보면, img1 의 비선형식이 된다. 여기서 r은 매개변수로서 번식률을 나타내며, img2은 이전 개체수, img3 은 이후 개체수를 가리킨다. (원래 이 식은 로지스틱 방정식이라 불리는 미분방정식 img44 으로 19세기에 인구증가 모델로 제시되었는데, 오늘날 군집 생태학에서 개체수 증가 모델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기서는 미분 대신 차분 방정식의 형태로 재구성을 하였음.) 이제 r값을 점차 증가시킴에 따라 개체수가 어떻게 증가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수치실험을 하면, 아래의 [그림 1]과 같은 모양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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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r 값의 연속적 변화에 따른 로지스틱 맵의 분기 곡선
정상상태에서 출발한 개체 수는 r값(그림의 가로축)이 증가함에 따라 둘로 쪼개지는 쌍갈래(bifurcation) 과정을 겪는데 이는 이 범위에서 개체 수(그림의 세로축)가 두 값 사이에서 규칙적으로 요동(주기 2의 규칙적 운동)함을 가리킨다. r값이 점점 더 커지면 쌍갈래 과정이 무수히 반복하여 나타나면서 개체수의 변화가 무질서하게 나타나는, 초기조건의 변화에 매우 민감한 혼돈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그림의 검은 색 영역들) 그러나 놀랍게도 최초의 혼돈 다음(최초의 검은 색 영역 다음의 흰색 영역 – ‘혼돈 중에 나타나는 질서의 창’)에는 다시금 처음의 정상상태 때와 유사한 규칙적인 상태가 반복된다.(아래의 [그림 2] 참조)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r값이 증가함에 따라 혼돈 영역과 질서 영역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하여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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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r 값의 특정 영역에서 쌍갈래 과정이 반복되는 모습
바로 고전물리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혼돈과 질서가 결정론적 모델로 부터 함께 생성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림 2]에서 보았듯이 그 변화의 전체 패턴은 거의 유사한 형태로 부분의 영역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자체유사성이 존재하고 있다. 즉 영역을 아무리 작게 잡거나 크게 확대하더라도 복잡성의 정도가 일정한 쌍갈래 과정의 전체 패턴이 유사하게 반복해서 나타난다. (경제학에서의 예를 들면 하루 동안 주가변동 패턴은 한 달간의 그것과 일 년 동안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전체의 패턴이 부분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렇게 동일한 패턴이 전체와 부분 속에서 반복되는 구조를 프랙탈 구조라 부른다. 또한 개체 수의 변화를 r, X의 공간이 아닌 위상공간상에서 나타내면 그 궤도가 끊임없이 수렴해 가는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가 나타나는데, 이는 개체수의 변화가 무질서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혼돈 이론에서 비선형성은 불규칙성이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전체적으로는 안정된 구조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불규칙성은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불규칙한 패턴이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나타난다는 의미의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혼돈은 불안정성과 전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안정된 혼돈, 규칙적인 불규칙성이 중요하다.
현재 혼돈 이론은 여전히 수학적인 모델 탐구에 제한되어 있으며, 실제세계에서는 기후변화나 유체의 흐름과 같은 현상에 주로 적용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기대하는 만큼 많은 영역에 실제로 적용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에너지가 유입되어 불안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열린 계들(가령 비평형 상태의 화학적 반응계, 비가역적인 생명계 등)이나 환원적인 분석 방법이 더 이상 적용되기 어려운 창발 현상을 일으키는 계(가령 뇌 등)에 대해 혼돈 이론의 적용은 매우 유용해 보인다. 한마디로 복잡계 현상들에 대해 혼돈 이론은 좋은 설명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다. 한편 혼돈 이론은 기존물리학의 방법론에 대한 도전 때문에 때때로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양 불려 지기도 하지만, 현대물리학의 방법론이 여전히 현실세계의 많은 분야 가령 우주론, 소립자 물리학, 핵물리학, 고체물리학, 광학, 그리고 공학 등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혼돈 이론은 물리학 전반에 대한 새로운 지표설정이라기 보다는 물리학의 한계극복이라는 보완적 의미가 아직은 강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돈 이론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제는 복잡계를 단순한 계들의 집합으로 인식하지 않고 복잡계 그 자체에 있는 그대로 접근하려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오늘날 주류의 과학 방법론으로 정착된 환원론적 분석 방법 대신 비환원론적 접근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특정한 시각에서의 정태적인 상태보다는 계의 동적인 변화 과정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 ‘무엇임’이라는 고정된 존재성 보다는 ‘무엇으로 됨’이라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또한 뉴턴 물리학의 결정론적 예측 가능성이나 이후 양자이론에서 언급된 확률적 예측 가능성 모두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예측 가능성을 정립하는 것이 과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형적인 사고 대신 비선형적 사고를 강조한다. 특히 이는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들이 다자간 상호 네트워크 구조로 얽혀 있는 경우 매우 유용하다. 뇌의 구조 뿐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혼돈 이론이 이러한 철학적 의미를 잘 살려 보다 잘 확립된 과학방법론으로 구체화, 정식화되길 기대해 본다.
사이언스올

누가 우월한가?

대부분 사람들은 우월해지기를 원한다. 우월해 지는 것은 무엇일까? 우월해진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인가? 권력을 갖는 것인가? 많이 아는 것인가? 우리는 재산을 가진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또는 지식인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사회적으로 비난 받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존경할만한 진짜 우월한 사람은 ‘나’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심리학자 아들러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회적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닐까? 즉 우리의 이웃들, 우리 국가, 우리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 말이다. 그렇다면 ‘공동의 선’에서 ‘<<공동>>은 어디까지를 포함하는 것인가?
인류 역사를 살펴볼 때 사람들은 자신과 남을, 자기 가족과 다른 가족을, 자기 나라와 다른 나라를 구분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스페인과 유럽인에게는 이익을 주었지만 신대륙에 거주한 원주민에게는 아픔을 주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 맨하튼 프로젝트도 연합군의 위세를 자랑하게 하였지만 일본에게는 많은 민족을 잃고 국토가 폐허가 되는 슬픔을 주었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무법자?
위대한 탐험가로 소개된 콜럼버스는 네 번에 걸친 항해를 통해 신대륙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비단과 황금, 향료가 많다고 믿었던 일본(지팡구)과 중국(카다이), 인도 등의 신비한 동양의 땅에 가기위해 여러 번 왕께 자신의 신대륙 탐사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492년 스페인의 왕과 왕비와 산타페 협약을 체결하고 항해를 시작했다. 그 협약을 통해 콜럼버스는 총독의 지위를 약속받았고 발견된 지역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이익의 10%를 취득하고 앞으로의 교역활동에 대해 최고 1/8의 자본참가권을 승인받았다.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3척에 90~1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황금과 향료가 나는 신대륙 탐사 항해를 시작하여 쿠바 섬,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아이티 섬)에 도착했다. 1493년 3월 일부 선원들을 히스파니올라 섬에 두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쿠바와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담배와 해먹을 유럽에 가지고 돌아와 전파했다. 다시 1493년 9월에 더 많은 배(17척)에 더 많은 승무원(1200~1,500명)을 태우고 다시 히스파니올라 섬으로 갔다. 그러나 섬에 도착한 그와 일행은 향료와 황금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히스파니올라 섬에 남아 있던 스페인 선원들의 약탈과 강제 노역, 폭행으로 울분이 터진 원주민의 반란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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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네이버
유럽인들에게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여 새로운 탐험과 정착의 기회를 제공한 위인’이며 이러한 공로로 인해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교과서에 콜럼버스는 용감한 탐험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의 원주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콜럼버스는 어떤 사람인가?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그 원주민에게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약탈하고 강간하고 강제노역에 동원한 무법자요 학살자였다. 원재훈의 인물세계사에는 콜럼버스가 도착할 때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온순하고 작은 창외에는 무기도 없었으며, 태도도 호의적이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온 선원들이 그들을 폭행하고 마구 대하고 노예로 팔아넘기자 그들도 저항하였다.
콜럼버스가 추구한 황금과 향료가 나는 신대륙 발견은 결국 자신의 부와 명예 그리고 “스페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콜럼버스가 더 큰 ‘공동의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단순히 “탐험”을 즐기며, 신대륙의 사람인 원주민을 존중하고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는 선에서 그쳤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탐험을 떠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향료와 황금이 나는 대륙을 발견하고 그와 관련된 이익을 챙기기로 왕과 협약을 맺고 항해를 시작했으니까…
맨하튼 프로젝트는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
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원자폭탄을 개발한다’는 특명을 가진 맨하튼 프로젝트에 대해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과학자들, 나치를 피해 미국에 있던 유럽 과학자들, 영국, 캐나다의 과학자들 등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뉴멕시코의 오지에 있는 로스앨러모스에 모여 원자폭탄을 만드는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을 이끌기 위해 독일보다 빨리 핵폭탄을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으로 핵폭탄 연구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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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폭발한 순간과 폭격한 군인들(사진출처: 네이버)
그러나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면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과학자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어떤 과학자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것이 확실해 지자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고 맨하튼 프로젝트를 떠났다. 프로젝트의 연구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세계를 파괴할 수 있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이 개발한 산물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에 고뇌하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던 아인슈타인도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핵전쟁의 위험을 호소하며 전쟁을 하지 말자’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2개월에서 4개월 동안 90,000명에서 166,0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그들이 만든 폭탄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였다. 놀라운 위력의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는 목적은 달성하였지만 맨하튼 프로젝트가 과연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무엇이 옳은가?
콜럼버스는 정말 탐험이 좋아서 아무 보상이 없어도 신대륙 발견을 위한 항해를 하였을까? 아니면 신대륙 발견 결과 돌아오는 황금과 향료에 대한 그의 지분과 그가 얻게 될 총독이란 지위가 신대륙 발견을 위한 탐험을 하게했을까? 창의성과 동기에 대해 연구한 아마빌(Amabile)은 창의적인 산물을 만드는 것은 ‘하고 싶다’는 내적 동기와 함께 ‘내적 동기를 갖도록 도와주는’ 외적 동기 즉 보상이라고 한다. 그러니 콜럼버스는 탐험이 하고 싶기도 했겠지만 그에 따르는 보상이 있어서 더욱 탐험을 즐겼을 것이다. 이러한 보상은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래서 시작 단계에서는 분명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욕심이 경쟁심리를 자극하고, 명예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 또는 부를 축적하려는 욕구,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자극하여 결과는 오히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맨하튼 프로젝트에서도 히틀러의 자살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많은 생명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의 투하를 지시했다. 그리고 미국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초강대국이 되자 다른 나라도 미국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원자폭탄을 보유하였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원자폭탄 보다 성능이 강한 수소폭탄이 만들어졌다. 이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과학적 산물은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온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더 강한 무엇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더 강한 것을 만드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공동의 선’을 추구한다고 할 때 과연 어디까지가 <<공동>>인가? 이러한 질문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 보기를 원하며, 여러 형태의 토론의 장을 통해 ‘공동의 선’을 추구할 때 지켜야할 기본적인 지침을 다시 한번 정리하였으면 한다.
사이언스올
 

로보 사피엔스’가 온다

사피엔스’(sapiens)라는 말은 ‘지혜로운’이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다. 그렇다면 ‘로보 사피엔스’는 인간처럼 지혜로운 로봇을 의미한다. 이 말은 미국의 TV 뉴스 연출자인 페이스 달루이시오(Faith D’aluisio)와 사진 작가인 피터 멘젤(Peter Menzel)이 2000년에 쓴 책인 『새로운 종의 진화, 로보사피엔스』에서 처음 쓰였는데, 진화론적 시각에서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 로보 사피엔스는 요즘 시절에 보면 바로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로봇이다. 이것이 과연 진화론적 차원에서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을 대체할 것인지는 지금의 과학 영역에선 언급하기 매우 어렵지만, 적어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인격성을 지닌 로봇이 멀지 않은 미래에 등장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과 유사한 인격성을 지닌 로봇이 등장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수적이다. 우선 인간의 지능에 준하거나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는 주로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이성적인 영역의 지적인 작업들을 수행하는데 필요하다. 다음으로 인간처럼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영역에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격성의 가장 핵심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 자의식,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 현재 휴머노이드 로봇의 발전 수준은 첫 번째 조건인 지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인공지능의 영역에서 보면 상당한 발전 단계에 와 있고, 두 번째 조건인 감정 인지 및 표현 능력과 관련해서는 초기 발전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이론적으로 다양한 논의들은 있지만 실제로 자율성이나 자유의지를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 면에서 로보 사피엔스는 전체적으로 이제 시작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각 요소 별로 어느 정도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2014년 6월에 영국 왕립학회는 ‘유진 구스트만’이라는 슈퍼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유진’(Eugene)이라 불리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튜링테스트를 최초로 통과했다고 발표하였다. 튜링테스트는 영국의 전산학자인 앨런 튜링(Alan Turing)이 개발한 테스트로 “기계가 과연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를 판정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에 따르면 컴퓨터가 인간과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 상황에서 컴퓨터의 반응을 인간의 반응과 구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진 프로그램은 우크라이나에 사는 13세 소년인 것처럼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 상황을 커튼 뒤에서 지켜보던 심사위원 가운데 33%이상이 ‘유진’을 진짜 13세 소년으로 착각함으로써 튜링테스트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이 보다 먼저 아이비엠의 최초 회장이었던 토마스 왓슨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아이비엠의 인공지능 컴퓨터인 ‘왓슨’(Watson)은 2011년에 미국의 유명한 퀴즈 쇼인 ‘제퍼디’에 참가하여 그동안 제퍼디 퀴즈 쇼 사상 최대 금액 우승자 및 가장 오랜 동안 챔피언 기록 보유자와의 퀴즈 대결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1996년에는 역시 아이비엠에서 만들어진 ‘딥 블루’(deep blue)라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체스 경기에서 세계 챔피언인 인간을 이겼다. 이외에도 인간과 자연스럽게 가상의 지능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한 ‘채터 봇’(chatterbot)이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도 다양한 용도에 맞게 개발되어 있다. 가령 환자와 대화하면서 심리치료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공지능 상담 프로그램인 ‘엘리자’(Eliza) 등등. 채터 봇의 경우 대부분 언어와 문맥을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배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음성 인식이 기존에 정해진 패턴의 음성만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특정 알고리즘 기반의 하향적 방식에서, 무수히 집적한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자기학습을 통해 다양한 음성 패턴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상향적인 딥 러닝(deep-learning) 방식으로 바뀌어, 인간과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훨씬 용이해 지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 넘거나 아직은 완벽하진 않지만 인간처럼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로봇, 소위 감정 로봇은 어느 정도까지 발전하고 있는가. 가장 최근인 2014년에 일본의 소프트뱅크사는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반응 행동을 적절히 표현하는 감정로봇 ‘페퍼’(pepper)를 발표하였다. ([그림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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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인간과 감성적 대화를 나누고 있는 로봇 페퍼
페퍼에게는 두 가지 기술이 적용되었다. 하나는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음성을 듣고 그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는 감정 인식 기술이다. 감정 인식을 위해서는 표정, 동작, 말소리 등을 인식할 수 있는 시청각 센서 기술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웨어러블 컴퓨터 등을 활용하여 인간의 감정과 관련한 체온, 심장박동 등의 생리적 변화를 측정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 기술 덕분에 페퍼는 기존에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동하지 않고, 사람들의 감정을 인식한 다음 자기 학습을 통해 그에 적합한 행동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또 다른 기술은 ‘클라우드 서비스 감성 엔진’이라 불리는 기술이다. 인공지능을 갖춘 클라우드 환경 안에서 여럿의 페퍼들이 접속하여 각자가 인지하고 학습한 다양한 감정 및 반응 행동에 관한 정보들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감정에 관한 일종의 집단 지성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또한 클라우드 환경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관련한 빅데이타에 접속이 가능한 만큼, 이를 통해 페퍼는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빠르게 인지하고 학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다 정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보다 훨씬 이전인 1991년에는 메사추세츠공과대학 인공지능연구소에서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내는 ‘키스멧’(Kismet)이라는 자율형 로봇을 개발하였다. 키스멧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감성적 표정들을 만족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자체적으로 학습하면서 표현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현재 키스멧은 눈 동작과 얼굴 표정 등으로 관심, 평온함, 화남, 슬픔, 행복, 놀람, 싫증 등 인간의 7가지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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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키스멧의 7가지 감정 표현
페퍼나 키스멧과 같은 로봇들이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감정과 정서를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 일러 보인다. 하지만 이런 능력으로 인해 로봇은 충분히 인간과 감성적 차원의 교류를 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과 로봇 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로보 사피엔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인 자율성, 자의식, 자유의지에 대해 살펴보자. 이러한 능력들은 앞의 두 가지 능력들과 달리 아직까지 과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구현된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조차 자율성이나 자의식이 무엇인지, 자유의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통일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아닌 고등동물이나 인공지능 로봇에게 인격성을 부여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들과, 인간의 자율성이 결국 뇌의 복잡한 활동의 산물일 수 있다는 최근의 뇌 과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자율성 나아가 자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뇌의 시스템에 대한 수학적 모델링 작업들이 시도되고 있다.
우선 인격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와 관련해서 근대 철학자 로크는 인간 개념과 인격 개념을 구분하였다. 인간 개념이 생물학적인 종개념인 반면, 인격 개념은 생각하고 추리하며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개념화하여 구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아닌 인격체가 존재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실제로 20세기의 진화생물학에서는 인간에게만 부여됐던 도덕성이 사실상 동물들의 이타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많은 실증 연구들이 진행 중에 있다. 즉 도덕성이라는 것도 신으로부터 이성적으로 부여된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공동체 생존을 위해 작동하던 동물의 이타성이 경험적으로 발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피터 싱어와 같은 동물 윤리학자들은 고퉁을 느낄 줄 아는 동물들은 인간과 유사한 자의식 또는 마음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이 실제로 현실에서 적용된 사례도 있다. 2014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아르헨티나 법정은 아르헨티나의 동물원에 20년 동안 갇혀 있던 ‘산드라’라는 이름의 오랑우탄이 인간이 향유하고 있는 합법적 권리를 일정 수준 누릴 자격이 있다며 자유롭게 해주라고 판결하였다. 산드라가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격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들은 앞으로 인공지능 로봇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뇌 과학을 보면 자율성이나 자유의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도전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이것을 통해 두뇌나 육체가 움직인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1983년에 신경외과 의사인 미국의 벤자민 리벳과 동물 생리학자인 독일의 한스 코른후버 등이 행한 의식과 행동에 관한 뇌 실험(소위 ‘리벳의 실험’) 결과를 보면 이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가령 나의 의지로 손을 드는 경우, 내 마음이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나면 뇌가 이에 따라 작동하고 뇌에 의해 다시 손을 드는 행동이 뒤이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나의 뇌는 그런 결정을 알고 있었고 바로 이에 의해 행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의 행동의 원인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뇌이며, 그럴 경우 자유의지는 뇌의 산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리벳의 실험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실험이라고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이는 인간의 뇌 안에 행동에 관한 자율적 예측 시스템이 존재하여 의식을 통한 행동 결정을 예측할 수 있음을 단지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최근의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우리의 뇌가 미래의 행동과 관련한 예측적 학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이를 수학적으로 어떻게 모델링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모델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기술적 구현이 가능해 진다면 적어도 자율성을 지닌 인공지능의 탄생은 머지않아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자유의지, 자의식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상관없이, 인간처럼 자율성을 갖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보 사피엔스의 등장 가능성은 더욱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사이언스올

양자컴퓨터의 열쇠 ‘와일 전자’

20세기의 물리학의 두가지 위대한 업적을 꼽는다면 상대론과 양자론을 택할 것이다. 상대론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에 의하여 단독으로 이루어졌지만 양자론은 보어(N.Bohr), 하이젠베르크(W.Heisenberg),슈뢰딩거(E.Schrödinger) 폴 디락(Paul Dirac) 4명의 거두들이 합작으로 이루어 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네 명의 거두들 가운데 디락의 방정식은 특수 상대론적 양자역학 방정식이다. 일반 상대론적 양자방정식은 아직은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초끈이론’의 발달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많은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다.
오늘 소개할 와일 전자를 세상에 선보인 헤르만 와일(Herman Weyl, 1885∼1955)은 널리 알려진 수리·물리학자이다. 그는 물리학계에 대칭성이란 개념을 확고하게 심어준 과학자이며 이 세상의 원리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독수리형 수리·물리학자이기도 하다.
명왕성을 예측했던 같은 해에 와일 전자도 예측
와일은 아인슈타인과도 친했으며 1918년에는 고전적인 게이지 이론을 전자기학에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와일은 디락 방정식을 두 개의 질량 없는 전자의 방정식으로 고친 ‘와일 전자의 이론’을 도입했다. 85년 전인 1930년 명왕성을 예측했던 같은 해에 와일 전자도 예측되었다. 그런데 드디어 올해 6월 ‘사이언스’지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하산(M.zahid Hassan) 교수에 의해 와일 전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와일 전자를 설명하려면 전자의 이론을 확고히 한 디락 방정식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디락 방정식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특수상대론에 맞도록 고친 방정식으로써 네 개의 연립방정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네 개의 해답이 있고, 그 중 두 개는 스핀 1/2 의 성분이 1/2 인 것과 –1/2인 것에 해당한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개는 전자의 에너지가 마이너스에 해당하는 해답으로 자연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디락은 이런 마이너스 에너지 상태는 가득 차 있으며, 전자의 질량 두 배에 해당하는 E = 2mc2 의 에너지를 진공에 공급하면 가득 차 있던 – 에너지 상태의 한 전자를 + 상태로 올려놓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전기량이 0인 진공에서 – 전기량이 빠져나가게 되므로 이는 진공에 비하면 + 가 되고 이를 양전자(Positron)라고 해석했다.
디락 방정식의 해석. ⓒ 김제완
디락 방정식의 해석. ⓒ 김제완

디락 방정식은 이렇게 네 개의 복소수 방정식이다. 그런데 와일과 에토레 마조라나(Ettore Majorana: 1906~?)가 각각 두 개의 실수 방정식으로 고쳐 썼다. 마조라나의 방정식은 중성미자에 적용되리라 믿어지고 있다. (마조라나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7월 28일자와 8월 3일자의 ‘김제완의 과학세상’ 참고)
와일 전자는 질량이 없기 때문에 빛의 속도를 갖고 있다. 그 스핀의 방향이 와일 전자의 진행 방향과 평행한 것과 그 반대 방향인 두 종류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질량이 0인 입자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가령, 와일 전자가 오는 방향 앞에 전기를 많이 띈 동판을 갖다 놓았다고 하자.
프린스턴대학팀 ”와일 전자가 반원 모양의 아치형을 그리며 전파”
와일 전자는 질량이 없기 때문에 이 판에 가까이와도 여전히 빛의 속도를 유지할 것 같다.그런데 이 동판에 부딪히는 순간 어떻게 될까? 없어질까? 또는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갈까? 그 해답은 물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도 퍽 어렵고 아리송한 생각이 든다.
프린스턴대학팀이 제시한 실험 결과를 보면, 와일 전자가 반원 모양의 아치형을 그리며 전파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와일 전자가 전파하는 모습. ⓒ 프린스턴대
와일 전자가 전파하는 모습. ⓒ 프린스턴대
그들은 이런 현상을 반금속체인 Ta As(Tantalum Arsenide:탄탈륨 비소) 결정체를 써서 실험을 했다. 실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필자도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와일 전자를 생산하고, 이를 이용하면 소위 말하는 양자 컴퓨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첫 번째로는 전자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기 때문에 입출력(Input–Output) 과정이 획기적으로 빨라질 것이고, 계산 역시 빨라질 것이다.
연구자들의 말을 빌리면, 와일 전자는 질량이 없기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산란하는 것을 막아주어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뿐만 아니라 열을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전력소모도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새로운 전산(컴퓨터)시대를 여는 열쇠가 85년 전에 예언되었다는 것은 퍽 인상적이다. 다시 한 번 수학의 위력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ScienceTimes

가난한 집 아이가 이타심 높다?


맹자와 상반되는 이타주의 실험결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양주(楊朱)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의 대명사로 곧잘 인용된다. ‘내 몸의 터럭 하나를 뽑는 대가로 천하가 태평해진다 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맹자는 양주의 이 같은 사상을 호되게 비판했다. ‘우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보고 구해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주장한 맹자의 눈엔 양주가 ‘짐승 같은 놈’으로 보였다. 모든 사람들은 원래 착하게 태어났다는 게 맹자의 사상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이처럼 남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을 ‘이타주의(altruism)’라고 정의했다. altruism의 ‘altre’는 타인(other)을 뜻하는 프랑스 고어로서, ‘다른’이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alter’과 관련이 있다.
이타주의는 생물의 본성인 이기적 진화 형태와는 상반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은 이타주의가 인간에게서만 나타나는 강력한 특징이자 인간의 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생물학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와 유사한 행동이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되기 시작했다. 인간과 같은 영장류인 침팬지를 비롯해 협동양육을 하는 미어캣, 심지어 탐욕스런 사람으로 의인화되었던 쥐들조차 이타주의를 보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가난한 집이거나 종교가 없는 집안의 아이일수록 이타주의가 더 높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 ScienceTimes
가난한 집이거나 종교가 없는 집안의 아이일수록 이타주의가 더 높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 ScienceTimes
동물들의 이 같은 이타적 행동은 ‘혈연선택’과 ‘상호적 이타주의 이론’ 등으로 설명된다. 혈연으로 맺어진 구성원들이 공유한 유전자를 영속시키기 위해 자기 희생으로 다른 개체에 봉사한다는 이론이 ‘혈연선택’이며, 혈연관계가 없다고 해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호 간의 호혜적 행동이나 공생 관계가 ‘상호적 이타주의 이론’이다.
그런데 이타주의를 주장한 맹자도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맹자’ 양혜왕 편에 나오는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 바로 그것이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는 말로서, 즉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도덕적 종교의 등장 조건은 ‘에너지 획득’
‘무항산 무항심’은 도덕성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종교(신흥 종교)가 탄생한 배경과도 연결된다. 인류의 초기 역사에서 종교는 의식 일변도였거나 단기적 보상에 기반을 둔 것이 특징이다. 즉, 남을 돕는 도덕성이나 금욕보다는 비나 풍년을 기원하며 신에게 필요한 제물을 바치는 성격이었던 것.
이에 비해 스토아교, 불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같은 신흥 종교는 하나같이 도덕성을 강조한다. 이 같은 신흥 종교가 탄생했던 결정적 시기(BC 800넌 이후)를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라 일컬었다.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니콜라스 보마 교수팀은 ‘축의 시대’ 이후 도덕적 종교가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역사적․고고학적 자료를 이용한 예측 모델을 설계했다. 모델 분석 결과, 도덕적 종교의 등장을 가장 잘 예측하는 지표는 바로 ‘에너지 획득’이었던 것.
구체적으로 구성원의 에너지 획득이 하루 2만 칼로리 미만인 사회에서는 도덕적 종교가 전혀 탄생하지 않았지만, 2만 칼로리라는 임계점을 넘어서자 도덕적 종교의 탄생 빈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종교가 의식 일변도에서 벗어나 도덕성을 강조하게 된 계기는 바로 물질적 풍요로움이었다. 이대로 해석하면 이타주의의 선행 조건 역시 ‘항산’이 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와 반대되는 연구결과들이 잇달아 발표되어 주목을 끈다.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팀은 가난한 집 아이들과 부잣집 아이들 중 어느 편이 더 이타주의가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했다. 74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게임을 통해 획득한 토큰을 게임에 참여하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 비밀리에 기부할 수 있게 한 것.
지난 6월에 발표된 이 실험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로 나왔다. 부모의 연소득이 많은 아이일수록 기부한 토큰의 숫자가 적은 것으로 나타난 것. 즉, 부잣집 아이들이 가난한 집 아이들보다 순수하게 남을 위하는 이타성이 더 적었던 셈이다. 부잣집 아이들의 이 같은 성향에 대해 연구진은 돈을 지키고자 하는 부모의 행동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해진 탓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무종교 집안의 아이가 이타주의 더 높아
지난 6일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게재된 미국 시카고대학 진 데세티 박사팀의 연구결과 역시 우리 상식과는 정반대다. 연구팀은 미국, 중국, 캐나다, 요르단, 터키, 남아공 등 6개국의 5~12세 어린이 1170명을 대상으로 종교가 이타주의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실험 방법은 가상 학급을 구성한 뒤 각 어린이마다 개별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스티커 10장을 고르게 한 다음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급우에게 나눠주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어린이들은 3.3장, 이슬람교 집안의 어린이들은 3.2장을 내놓은 데 비해 특정 종교가 없는 집안의 어린이들은 평균 4.1장의 스티커를 내놓은 것.
더 놀라운 것은 나이가 많은 어린이일수록 내놓은 스티커 수의 차이가 더욱 뚜렷했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한 기간이 오래 될수록 이타주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의 정도가 강했다는 뜻이다.
타인이 저지른 악행을 용서하는 관용적 태도 또한 종교가 없는 집안의 어린이들이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이 실험대상 어린이들에게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를 일부러 떠미는 행동을 하는 영상을 보여준 결과, 종교를 가진 집안의 어린이일수록 악행의 정도와 처벌의 강도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이다.
연구진은 실험대상 어린이들의 나이, 사회경제적 상태, 출신국가 등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종교적 차이를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맹자의 무항산이면 무항심이라는 전제 조건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항산’이라는 비교적 한정된 범위를 요즘의 부자와 종교가 너무 초과해서 나타난 결과일까.
 ScienceTimes

과학과 신학을 양자론으로 통합

과학서평 / ‘양자형이상학’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먹고 마시며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며 인간의 운명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무슨 돼지같은 쾌락주의자의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냐고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인생의 모든 단맛을 다 보고 쾌락의 늪에 빠져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어느 왕이 한 말이다. 그 왕은 수 많은 여자들을 그것도 서로 다른 민족에서 온 미인들을 골고루 아내로 맞았던 천하의 호색한이었다.
그렇지만, 이 왕은 세계에서 가장 현명했다는 평판을 받기도 했으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고 그저 술독이나 육체의 쾌락에 탐닉했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이 왕이 남긴 말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
많이 공부하는 것이 몸을 피곤하게 한다는 말은 아마도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피곤하게 공부하지 말라는 뜻이라기 보다, 사람이라면 몸이 피곤해지기 직전까지 공부에 몰입해야 한다는.
양자형이상학
‘거의 모든 존재의 역사’라는 거창하거나 혹은 오만하게 들리는 부제목을 단 ‘양자형이상학’(Quantum Metaphysics)이라는 제목의 책은 양자물리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나온 형이상학의 거의 모든 인물의 주장을 묶어 설명한 책이다. 저자 이성휘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보쿰 대학에서 ‘신과 시간-스티븐 호킹의 인간원리와 과학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성휘 박사는 신학과 과학을 접목하는 시도를 하면서도 매우 따듯한 우주관인 인간원리(anthropic principle)의 입장을 취하는 유신론적 과학철학자이다. 이화여대 감신대 목원대 등에서 외래교수로 강의하다가 지금은 뮌헨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다.
양자론을 모르면 현대적 신(神)을 알 수 없다
저자는 20년 넘게 유럽을 뒤집듯이 살아온 경력을 자랑한다. 자신의 지적 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려는 듯이 방문지 이름을 나열했다. 거의 모든 유럽을 샅샅이 뒤지면서 다녔는데 그저 관광만 한 것은 아니고, 루가노를 방문하면 헤세의 흔적을 찾고 베니스 가는 길에 파두아를 지날 때면 갈릴레오가 교수로 재직했던 파두아 대학을 찾는 식이었다. 그렇게 오래 동안 유럽에 머물면서 공부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행가이드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박사는 형이상학에 이름을 올려놓았던 수많은 유럽학자들의 이름을 비슷하게 나열했는데, 그리고 나서 자신있게 (혹은 매우 거만하게) 내놓은 주장이 “양자론 이해를 통해 새롭게 제시된 양자형이상학적 존재자 이해라야 진정한 현대적 신 이해”라고 목청을 높인다.
저자가 그렇게 자신있게 소리치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그런 호기를 부릴만하다고 격려하고 싶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서양철학자와 과학자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정리해서 제시하는 내용은 과연 현대과학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궁금증을 갖는 독자에게는 매우 훌륭한 길잡이가 될 만하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중요한 점을 찍은 책으로 저자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마틴 리스의 ‘여섯 개의 수’ 인간게놈을 해독한 프랜시스 콜린스의 유신진화론인 바이오로고스를 주장한 ‘신의 언어’의 핵심 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평가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 과학이 지금 어느 좌표에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정리는 과학자로 본 세계관의 변화이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저자는 인류가 크게 8차례 세계관의 변화를 알게 됐다고 주장한다.
갈릴레오의 지동설 ⇒ 뉴턴의 만유인력설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 코펜하겐 해석의 양자론 ⇒ 빅뱅이론과 우주팽창론 ⇒ 인간원리 ⇒ 마틴 리스의 ‘여섯 개의 수’ 그리고 프랜시스 콜린스의 ‘바이오로고스’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화살표만 잘 따라다녀도 현대과학의 좌표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내용은 이런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철학부와 물리학부의 공동 세미나 참석자들은 이미 1991년 제네바 근교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를 방문했다. 존재의 가장 작은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유럽의 철학자와 물리학자들은 25년 전부터 물리학과 철학의 경계를 허물고 발전하기 위해 통섭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과연 우리나라에서 이런 공동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을까?
물리학과 철학, 신학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는데…
접근하는 방향은 달라서 그렇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찾는 것이나, 철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찾는 것이나 목적은 비슷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이나 신의 존재 여부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신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고 주장한 내용들은 근거가 매우 희박하거나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의 복잡하고 험난한 여정과 형이상학의 미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그러므로 이 책은 자기 두뇌를 사정없이 고문에 가깝게 훈련시키거나, 아니면 일생을 인간 존재와 우주와 물리학에 온통 쏟아 넣어서 다른 일에는 매우 둔감하거나 엄청나게 익숙하지 않은, 그렇게 지식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과학신학이든 인간원리이든, 과연 기독교 신앙을 대체할 수 있을지는 아직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과학적인 설명으로 교회와 신학이 저지른 오류를 바로잡고, 좀 더 이성적이면서도 자세하게 우주와 창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규정하는 단어는 이런 것이다. 인간이 지은 죄,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의 십자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사망했다가 부활했으며, 이것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그런 구원의 핵심 원리이다.
저자는 죄, 피, 대속, 영생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시도하기는커녕  단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재미있게 살다가 천국가기를 원하는 더 많은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기는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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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게너의 대륙이동설 100주년

독일의 탐험가이자 기상학자 알프레트 베게너. 오늘날은 그가 제안한 대륙 이동설로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1912~13년 두 번째 그린란드 탐사 때 모습이다. ⓒ Free Photo
독일의 탐험가이자 기상학자 알프레트 베게너. 오늘날은 그가 제안한 대륙 이동설로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1912~13년 두 번째 그린란드 탐사 때 모습이다. ⓒ Free Photo

1880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베게너는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 인스부르크 등 여러 도시의 대학에서 물리학, 기상학, 천문학을 공부했다. 1902~1903년에는 우라니아천문대에서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1905년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기상학에 관심이 많았던 베게너는 두 살 위인 형 쿠르트와 함께 린덴버그항공전망대에서 일하며 기구를 이용한 기상관측분야를 개척했다. 1906년 베게너 형제는 직접 기구를 타고 무려 52.5시간을 머무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해 베게너는 그린란드 탐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 뒤 세 차례 더 그린란드를 찾았고 결국 그곳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요즘도 산악인들이 등정을 하다 사망하는 소식이 간간히 들리지만 100년 전에는 훨씬 더 위험했다. 첫 탐사에서도 대장을 비롯해 세 명이 사망했다.
1908년 마부르크대에서 강사로 있으면서 베게너는 기상학을 비롯해 다양한 지구과학 분야를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대륙의 형태와 관련한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즉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부 해안선과 아프리카 대륙의 서부 해안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교묘하게 일치했던 것. 어쩌면 둘이 한 대륙이었다가 쪼개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 베게너는 연구에 착수했고 지질학, 고생물학 분야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꽤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베게너는 1912년 1월 6일 프랑크프루트 지질학회 모임에서 대륙이 이동한다는 가설을 처음 발표했고 이 해 관련 논문 세 편을 썼다. 그리고 두 번째 그린란드 탐사를 떠났다. 당시 탐사대장 피터 코흐가 다리골절을 당해 베게너는 그와 함께 둘이서 그린란드 북동부에서 겨울을 나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베게너도 징집돼 참전했지만 큰 부상을 입고 후방에서 기상업무를 보게 됐다. 이 때 집필한 책이 그 유명한 ‘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다. 이 책에서 베게너는 대륙이동설을 본격적으로 논하면서 오늘날 서로 떨어져 있는 대륙들이 과거 한 덩어리로 붙어있던 초대륙을 판게아(Pangaea)라고 불렀다.
혁명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었음에도 전쟁 중이라 별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1922년 내용을 대폭 보완한 3판이 나오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해 독일을 넘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륙 이동설의 영어 번역어 continental drift가 나온 것도 이 해다. 그럼에도 대륙 이동설에 대한 반응 대부분은 환호가 아니라 격렬한 반대였다. 당시 지질학의 권위자들은 대륙이 이동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베게너는 지질학자가 아니라 기상학자였다.
물론 흥미로운 지질학 증거와 고생물학 증거가 꽤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대륙이 움직인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설득력있는 메커니즘이 없었다. 베게너 자신이 제안한 메커니즘 역시 역부족이었다. 즉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원심력이나 외부 천체의 작용에 의한 세차는 대륙을 움직이기에는 너무 약한 힘이었다. 게다가 베게너는 대륙 이동 속도가 1년에 2.5미터라고 가정했다. 이는 훗날 밝혀진 2.5센티미터보다 너무 큰 수치였다.
1929년 베게너는 세 번째로 그린란드를 탐사했다. 다음해 진행할 대규모 탐사를 위한 예비조사였다. 1930년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그린란드 탐사를 떠난 베게너는 11월에 조난됐고 이듬해 5월 시체가 발견됐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결국 탐사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
베게너는 1915년 펴낸 책 ‘대륙과 해양의 기원’에서 대륙 이동설을 자세히 설명했다. 책에 실린 베게너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왼쪽)과 아프리카(오른쪽 아래), 유럽(오른쪽 위)이 붙어 있는 초대륙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 ‘대륙과 해양의 기원’ 한글판이 나왔다. ⓒ ‘알프레트베게너연구소’
베게너는 1915년 펴낸 책 ‘대륙과 해양의 기원’에서 대륙 이동설을 자세히 설명했다. 책에 실린 베게너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왼쪽)과 아프리카(오른쪽 아래), 유럽(오른쪽 위)이 붙어 있는 초대륙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 ‘대륙과 해양의 기원’ 한글판이 나왔다. ⓒ ‘알프레트베게너연구소’
판 구조론으로 이어져
베게너는 용감한 탐험가이자 탁월한 기상학자로 일생을 마쳤지만 그 뒤 한 세대 만에 혁명적인 지질학자로 부활했다. 그 사이 그의 대륙 이동설을 지지하는 여러 관측결과들이 축적됐기 때문이다. 즉 1950년대 들어 해저 지각의 잔류지자기 방향이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앞서 1930년대 영국의 지질학자 아더 홈즈는 대륙이 이동하는 원동력의 메커니즘을 제안했다. 즉 지구 내부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열로 맨틀이 대류를 일으키면서 지각이 이동했다는 것.
1960년대 들어 대륙 이동설은 판 구조론으로 발전한다. 즉 지각은 10여개의 판으로 이뤄져 있고 판이 이동하고 충돌하면서 각종 지질학적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 전 세계의 화산대와 지진대가 판들이 만나는 지점과 일치한다는 게 밝혀지면서 오늘날 판 구조론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설이 됐다.
1930년 10월 영하 60도의 그린란드에서 동료 라스부스 빌룸센과 개 두 마리가 끄는 썰매를 타고 캠프로 이동하던 베게너는 식량이 떨어지자 개 한 마리까지 잡아먹는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그의 시체는 빌룸센이 가매장한 상태로 발견됐고 당시 23세였던 빌룸센 역시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데 그의 시체는 결국 찾지 못했다. 나이 오십에 죽음을 앞둔 베게너가 한 세대 뒤 자신의 학설이 지질학계의 종의 기원에 해당하는 명성을 얻게 될 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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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발명, 뺏길뻔한 라이트형제

지난 번 글에서 과학기술사상 동시발견, 발명의 사례가 매우 많았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누가 먼저 발견(발명)했는가를 놓고 치열한 우선권 다툼이 자주 뒤따를 수밖에 없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적분법을 발견한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 라이프니츠(Gottflied Wilhelm Liebniz; 1646-1716)가 오랜 기간 동안 지리한 우선권 논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역시 거의 동시에 전화기를 발명한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과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가 특허권을 둘러싸고 역사적인 법정 소송을 벌인 일 역시 유명한 사례이다. (다만 벨이나 그레이가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는 아니며, 한두 시간 차이의 특허출원으로 특허권이 엇갈렸다는 대중들의 인식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크게 다른데,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기로 한다.)
우선권 다툼 중에서도 사회적 지위 등이 크게 다른 사람들이 부딪힌 경우로서 탄광용 안전등과 비행기 발명의 사례가 있는데, 이들 역시 데자뷔라고 할만큼 공통점이 많으므로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전화기 발명 특허를 다퉜던 벨(왼쪽)과 그레이. ⓒ free Photo
전화기 발명 특허를 다퉜던 벨(왼쪽)과 그레이. ⓒ free Photo
안전등과 비행기 – 누가 먼저? 
탄광 내에서의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 전등이 없이 촛불을 썼던 옛날에는 갱내의 가스로 인한 심각한 폭발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19세기초 탄광이 밀집한 영국 북부에서는 ‘탄광사고 예방협회’가 결성되어, 저명한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에게 탄광사고를 막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청하였다.
데이비는 안전한 탄광용 등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한 결과, 불꽃 심지를 철사그물로 감싸면 불꽃이 그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메탄가스가 흘러 들어가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데이비는 탄광용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실험을 거친 후 관련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그 무렵 영국 북부 광산에서 근무하던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도 탄광용 안전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역시 불꽃이 가느다란 파이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안전등을 독자적으로 발명하였다.
데이비와 스티븐슨의 안전등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선보이게 되었으므로 치열한 우선권 논쟁이 벌어져서,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데이비는 훗날 왕립학회의 회장까지 맡게 되는 저명한 과학자였던 반면, 스티븐슨은 당시 탄광에 근무하는 가난한 기계공에 불과했으므로 크게 불리한 입장이었다.
결국 조사위원회는 데이비를 안전등의 최초 발명자로 결정하여 탄광주들의 기부금을 모은 2,000파운드의 상금을 그에게 주었고, 스티븐슨에게도 노력한 대가로 100파운드 정도의 돈을 주었다. 이에 스티븐슨의 탄광 동료들이 격분하여, 푼돈을 털어 1,000파운드를 모금한 후 안전등 발명자를 기념하는 시계를 사서 스티븐슨에게 보냈다고 한다.
라이트 형제, 즉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와 오빌 라이트 (Orvill Wright; 1871-1948)는 비행기의 발명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마터면 비행기 발명의 우선권을 랭글리(Samuel Pierpont Langley; 1834-1906)에게 빼앗길 뻔한 일이 있었다.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형제의 쌍엽기 플라이어호가 세계 최초의 비행을 성공시키기 직전에, 저명한 과학자였던 랭글리 역시 두 차례에 걸쳐 비행기를 날리려는 실험을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랭글리의 제자들은 ‘비행기 발명의 명예를 자전거포 직공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는 비뚤어진 생각에 비행기 발명의 우선권을 가로채려는 음모를 꾸몄고, 라이트형제는 오랜 시간을 끈 진상규명 노력 끝에 비로소 비행기의 최초 발명자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호. ⓒ Free Photo
세계 최초의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호. ⓒ Free Photo
당대 최고의 과학자에 당당히 맞선 무명의 기능공
안전등과 비행기의 발명 역시 치열한 우선권 다툼 이외에도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첫째, 우선권 다툼의 당사자 간에 사회적 지위 등이 크게 차이가 났다는 점이다. 안전등 발명을 놓고 다툰 경쟁자 중에서 데이비는 영국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반면에, 스티븐슨은 당시에 무명의 탄광 기능공이었고 문맹을 간신히 벗어났을 정도로 교육 수준도 낮았다.
비행기 우선권 다툼의 당사자 역시 랭글리는 저명한 물리학, 천문학 교수 출신에 미국의 유명한 과학기관인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협회 회장까지 지낸 반면에, 라이트 형제는 고졸 정도의 학력에 자전거점을 운영하는 기능공이었다.
둘째, 기능공 출신의 발명자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과학자와 대등하게 경쟁하거나 결국은 우선권 경쟁에서 승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훗날에는 기능공 출신의 발명자가 당시의 저명 과학자보다 훨씬 유명해져서 과학기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안전등의 발명자 중의 한사람인 조지 스티븐슨은 바로 다름 아닌 ‘증기기관차의 아버지’이다. 물론 그가 증기기관차를 발명하고 실용화에 성공한 것은 상당히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험프리 데이비보다는 조지 스티븐슨이 누군지 잘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역시 랭글리가 누구인지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꽤 있겠지만, 라이트 형제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안전등 발명자의 한사람이자 증기기관차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 ⓒ Free Photo
안전등 발명자의 한사람이자 증기기관차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 ⓒ Free Photo
안전등과 비행기 발명의 데자뷔 역시 우리에게 여러모로 생각할만한 교훈을 남겨 준다. 먼저 어찌 보면, ‘과학’과 ‘기술’의 역사적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이라 하여 이 둘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한 단어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과학과 기술이 긴밀히 결합되면서 서로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만든 것은 사실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수준 높은 이론보다도 구체적인 장인적 기술이 때로는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암시한다는 점이다. 높은 수준의 과학교육을 받고 탁월한 이론적 능력을 지닌 과학자들에 의해 중요한 발견, 발명들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개인의 기술적, 장인적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례는 이외에도 적지 않다.
필자 역시 예전에 연구개발 현업에 종사하면서,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 분들이 저명대학의 박사학위를 지닌 이들보다도 더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낸 사례를 직접 목격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숱한 첨단기술과 수준 높은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이 같은 데자뷔를 자주 볼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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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생물학과 열애에 빠지다

과학서평 / ‘생명의 수학’ (이언 스튜어트)

이언 스튜어트(Ian Stewart 1945~) 교수가 쓰고 안지민 씨가 번역한 ‘생명의 수학’ (The Mathematics of Life)을 읽어보면, 조물주는 모든 생명 현상에 수학을 숨겨놓았다. 아니, 조물주가 숨겨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언 스튜어트는 진화론을 신봉하고, 창조론 이야기만 나오면 벌레 씹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반대논리를 펴니, 모든 현상에 들어 있는 수학은 ‘누가’ 보물찾기 하듯 숨겨 놓았을 리는 없을 것이고, 그저 저절로 모든 생명현상에 들어갔을 것이다.
어쨌거나 수학은 이제 생물학과의 달콤한 연애가 시작된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동물이건 식물이건, 수학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꽃잎의 배열에서부터 나무에 잎이 나는 순서와 각도, 토끼가 새끼를 번식하는 숫자 등 초보적인 수준의 생물학 지식에서 수학적인 원리가 도처에 깔려있다.

요즘 각광받는 생명공학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모습, 그리고 뇌에서 벌이지는 신경세포 사이의 신호전달 등 모든 생명현상에 수학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수학은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는 산수만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기하학이고, 수열이거나 확률이며 또는 위상학(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다양한 분야의 수학이다.
토끼 새끼 숫자에 숨겨진 π이 비밀은
수학 전공자들에게는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비전공자들에게 신기한 숫자 중 하나로 피보나치(Fibonacci) 수 라는 것이 있다. 토끼 한 쌍에서 나오는 새끼의 수를 나열할 때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이다. 아래 숫자들은 짝짓기 기간마다 나타나는 토끼 쌍의 숫자라고 한다.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377
여기서 수열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작점인 2개의 1은 빼고 앞의 두 수를 더하면 다음 수가 나온다. 1+2=3, 2+3=5, 8+13=21, 34+55=89 이런 식이다.
그런데 앞 숫자를 분모로, 뒷 숫자를 분자로 해서 소수점을 내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1/1=1, 2/1=2, 3/2=1.5, 5/3=1.666, 8/5=1.6, 13/8=1.625, 21/13=1.615, 34/21=1.629 피보나치 수가 커 질수록 그 숫자는 어떤 숫자에 가까워지는데 그 어떤 수 (1+√5)/2 는 그리스 글자 파이(π)와 같다. 토끼가 새끼를 낳는 숫자가 수학을 닮은 것이다.
반대로 앞의 숫자를 분자로, 그 뒤로 두 번 째 숫자를 분모로 배치하면 이렇게 변한다. 3/8=0.375, 5/13=0.384…34/89=0.382
이 숫자 역시 π와 관계가 깊다. 이 숫자는 2-π이다.
이것은 수학이 생물학과 깊은 연관을 가졌다는 고전적인 사례 일 뿐이다. 이언 스튜어트는 거의 모든 과학 분야에 수학이 안 끼는 데가 없다고 490쪽 짜리 책 구석구석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서 조금씩 커 지는 목소리 중 하나는 수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마 어렴풋이 들어봤을 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 천재적인 수학자들을 데리고 간다고, 금융상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수학적인 기초라고, 과학은 모두 다 수학이라고.
그래서 수학이 도대체 뭐길래, 모든 과학은 수학으로 통한다는 소리가 점점 세지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보통 남자들이 아는 수학은, 사실은 수학이 아니라 산수일 뿐이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하는 숫자놀음에다 기껏해야 2차 방정식 또는 사물을 무한히 쪼갠 뒤 합친다는 미분 적분 정도이다.
그리고 도대체 왜 그렇게 무한히 쪼개야 하는지, 그리고 쪼갠 것을 왜 합쳐야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데 엄청나게 어려운 수식을 이해했다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공식을 외웠었다. 그런 불유쾌한 기억을 가진 대한민국의 성인 남자들은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중의 기초라는 수학자의 주장은 삶의 의욕을 잃을 만큼 불길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 지겨운 수학의 세계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는 비극이 학문의 발전이란 말인가?
그러나 ‘생명의 수학’은 그렇게 흑색 전망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 생명의 여러 가지 현상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기본적인 분석의 도구를 주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생물학을 수열, 매듭, 기하학, 위상학 등으로 설명 
나무의 잎은 조금씩 자리를 비켜가면서 달린다. 첫 번째 잎이 나면, 그 다음에 나는 잎들은 일정한 각도를 이루면서 난다. 그리고 그 각도는 같은 평면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올라가면서 달린다. 이것을 자세히 측정하면 잎은 135도 간격으로 떨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비스듬히 오르면서 각도가 벌어지므로 나사 홈이 돌아가듯 하는 형태를 띤다.
컴퓨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폰 노이만(von Neumann)은 두 사람이 벌이는 게임에서 수학적 모델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후에 경제분야에 적용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래전 그리스 유클리드(Euclid)가 발견한 정다면체가 요즘 생물학에서 다시 조명된다. 유클리드의 정다면체 중 정20면체는 축구공을 만드는 구조가 됐으며, 탄소원자만 60개가 모여 이룬 풀러렌 구조임이 발견됐다. 그러더니 드디어 대부분 바이러스의 주요 형태가 정20면체임이 또 드러났다.
보이 스카우트 활동이나 암벽등반에서만 주로 쓰인다고 생각했던 매듭이 DNA의 나선 구조를 맺거나 풀거나 하는 원리와 긴밀한 관계가 가졌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은 수학자들이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러니 이언 스튜어트 보기에 모든 것이 수학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오늘날의 과학에는 자신의 전공에만 사로잡힌 고립된 과학자 집단들이 아닌, 관심분야가 다양하고 보완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팀이 필요하다. 과학은 부락집단에서 세계적인 공동체로 바뀌고 있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언 스튜어트는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과를 나온 뒤 워릭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았다. 영국과 미국에서 여러 건의 과학대중화 상을 수상하고, 현재 워릭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21세기 생물학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수학을 활용한다. 22세기가 되기 전까지 수학과 생물학은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변화시킬 것이다”는 그의 말이 수학자의 나르시시즘으로 들리지 않으니,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저술가’라는 평가는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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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과 월리스

인간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않은 채 동물과의 친화성만을 지나치게 지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블레즈 파스칼

영국의 주간 과학저널 ‘네이처’ 6월 26일자에는 지금으로부터 꼭 150년 전 오늘, 영국린네학회에서 발표된 논문 두 편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 에세이가 실렸다. 진화론의 서막을 알리는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와 찰스 다윈의 논문인데 당시 이런 상황이 전개된 배경이 흥미롭다.

1830년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를 탐험한 다윈은 핀치의 부리가 먹이에 따라 다름을 관찰하고 진화론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1858년, 49세였던 다윈은 이미 영국의 저명한 학자였지만 자신의 발견을 발표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6월, 그보다 15세 연하인 탐험가 월리스로부터 논문이 동봉된 편지를 받게 된다.

월리스는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를 읽고 1848년 25세의 나이에 아마존으로 탐험을 떠났고 그 뒤 동남아시아를 탐사하다 진화의 개념을 생각해했다. 월리스의 논문을 읽은 다윈은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렇게까지 서로 일치하는 경우를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월리스가 1842년에 쓴 나의 초안을 보았더라도 이보다 더 훌륭한 초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다급해진 라이엘과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는 영국린네학회에서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을 함께 소개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1858년 7월 1일 ‘종이 변종을 만들려는 경향에 대해’(월리스)와 ‘선택의 자연적인 수단을 통한 변종과 종의 영속성에 대해’(다윈)라는 제목의 논문 두 편이 발표됐다.

당시 뉴기니에서 중병을 앓고 있던 월리스는 훗날 이 얘기를 듣고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박물학자인 다윈 씨와 후커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몹시 감사하더군요. 제가 다윈 씨에게 그분이 현재 집필하고 있는 대작과 같은 주제에 관한 논문을 보냈었거든요.”

월리스의 논문은 그해 8월에 린네학회에서 발간하는 저널에 실렸고 몇몇 과학자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진화론의 ‘충격’은 이듬해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 시작됐다. 1쇄 1250부가 발간 당일 매진되면서 영국사회는 술렁였고 곧 진화론을 지칭하는 ‘다윈주의’(darwinism)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 뒤 ‘진화론 = 다윈’이라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월리스는 점차 잊혀졌다. 사실 다윈과 월리스의 운명이 엇갈린 이유는 그 뒤 그들 삶의 방향 도 한몫했다. 다윈이 ‘인간의 유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해’ 등 진화론을 심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을 계속 출간한 반면 월리스는 골상학에 빠져 과학자들을 실망시켰고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인지를 밝히는 작업에 몰두하는 등 엇박자를 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월리스는 다윈에 대해 “다윈 씨는 세상에 새로운 과학을 선사했다”며 “그의 이름은 역사상 모든 철학자들보다 위에 자리할 것이다”라고 평가했고 훗날 “나는 다윈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느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사실 다윈이 아니었다면 무명의 탐험가가 쓴 논문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윈 역시 1860년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시간이 많았더라면 당신은 아마 나보다 훨씬 훌륭한 논문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위로하고 있다.

최근 황우석 박사와 서울대 수의대 이병천 교수 사이에 개 복제를 둘러싼 특허 논쟁이 벌어질 조짐이라고 한다. 이 교수와 연관돼 있는 복제 전문 벤처인 알앤엘바이오가 최근 개 복제 경매를 실시한다고 밝힌 미국 벤처 바이오아트 측에 특허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경고문을 보냈다는 것. 그런데 황우석 박사팀이 바이오아트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한 때 한솥밥을 먹으며 동료이자 스승과 제자 사이었던 두 사람이 법정에서 얼굴을 붉힐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착잡한 심정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앞에 놓고도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가는 길을 택했던 다윈과 월리스. 특히 ‘자신에게는 새로울 게 하나 없는’ 월리스의 논문을 읽고 나서 라이엘에게 쓴 편지에서 “나의 모든 독창성(originality)은 그 규모에 상관없이 무위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라며 출판을 미뤄온 자신을 한탄하면서도 월리스 논문을 출판해달라고 부탁하는 다윈의 인격에 경외심을 느낀다.

다윈은 당시 누구보다도 ‘과격한’ 주장을 펼친 과학자였지만 사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담담한 서술 방식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때로는 일종의 ‘슬픔’마저도 느낀다. 수년 전 읽은 그의 자서전에서 발견한 구절처럼.

“이제는 단 한 줄의 시도 읽기가 어려워졌다. 최근에 셰익스피어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너무 지루해서 구토가 날 정도였다. 미술과 음악에 대한 취미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 내 정신은 온갖 사실을 다 모아놓은 것에서 일반 법칙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기계가 된 듯하다. …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적어도 매주 한 번은 시와 음악을 즐기는 규칙을 세울 것이다. … 이런 취향을 잃는다는 것은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동아사이언스

스타과학자와 햇병아리의 미담, 다윈과 월리스

비글 호 항해를 통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한 다윈은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오랜 숙고의 결과였는지 탈고는 계속 지연되었다. 그러던 다윈을 급하게 움직이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월리스의 논문이었다. 진화론의 공동 저자로 인정받는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다윈보다 한참 연배가 낮았다. 다윈보다 14살이 어렸던 젊은 월리스에게 다윈은 우상이었다.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 다윈과 독자적으로 진화를 연구하던 당시, 그는 무명 탐험가에 불과했다.


 


다윈과 월리스의 첫 만남은 1858년의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만남이 늘 그렇듯, 월리스가 다윈을 알게 된 사건이었지 다윈이 월리스를 알게 된 사건은 아니었다. 월리스는 다윈의 비글 호 항해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25세이던 1858년, 아마존으로 탐험을 떠났다. 아마존을 여행한 후에는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생물들을 조사했다. 월리스의 연구는 현재에도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식생을 가르는 ‘월리스 선’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월리스는 독자적으로 생물의 변이를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지만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월리스는 주류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고 배움의 열정은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달랠 수 있을 뿐이었다. 자연히 주류 학계에서 그는 완벽한 무명이었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여행 중 열병을 얻어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월리스가 말레이반도에서 채집한 개구리의 스케치. 동남아시아 여행은 월리스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월리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윈에게 보낸 것은 다윈이 49세 때의 일이었다. 월리스는 이전에도 다윈과 간혹 서신을 주고받곤 했던 터라 존경하는 멘토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훌륭한 조언을 해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원형에서 무한정 이탈하는 변종의 경향에 대하여>라는 간결한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은 열병으로 달뜬 상태에서 사흘 동안 혼신의 노력으로 마무리한 작품이었다.
월리스의 의도와 달리 그의 논문은 다윈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이 35세의 무명 탐험가가 다윈이 20여년간 정리해서 발표만 앞둔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의 논문을 보내 온 것이다. 비록 자연선택이나 진화와 같은 용어는 없었지만 연구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영국 과학계의 주요 인물들과 두루 친하고 그 자신이 유명 과학자였던 다윈은 마음만 먹으면 월리스의 성과를 묻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월리스의 논문을 받고 다윈이 라이엘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월리스가 1842년에 쓴 나의 초안을 보았더라도 이보다 더 훌륭한 초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이 친구 굉장히 훌륭하다. 내가 써도 월리스만큼은 못쓸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다윈의 고민을 들은 라이엘과 후커 등의 동료들은 월리스와 다윈의 연구를 런던 린네학회에서 함께 발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월리스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다윈의 위신을 세워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월리스는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 이 결정은 어쩔 수 없이 월리스에게 사후 통보 형식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1837년, 다윈이 진화의 과정을 고민하면서 남긴 메모. 그는 20여년간 숙고를 거듭하며 논문 발표를 미루어왔다.


 


다윈은 결국 월리스의 편지를 받은 지 13일만에 자신과 월리스의 논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월리스는 자신의 논문이 발표된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위대한 멘토의 논문과 거의 동일하면서도 더 자세한 증거를 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오지에 있던 월리스는 다윈의 서신을 논문 발표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밀림에서 생고생하던 월리스는 다윈의 결정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월리스가 어머니에게 슨 편지에는 이렇게 감상을 남겼다.”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박물학자인 다윈과 후커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몹시 감하하더군요. 제가 다윈 씨에게 그 분이 집필중인 책과 같은 주제에 대한 논문을 보냈거든요.” 다윈은 종의 기원이 출간되자마자 이를 월리스에게도 보내줬다. 월리스는 단숨에 종의 기원을 되풀이해 읽고는 ‘세상에 새로운 과학을 선사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이언스올

‘내가 처음 발명’ 헉! 자네가 먼저?

과학기술 역사상 중요한 발견, 발명에는, 똑같은 이론을 거의 같은 시기에 여러 사람이 주장하거나,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품을 두 명 이상이 거의 동시에 발명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은 과학사에서 단독 발견보다는 도리어 동시발견이 더 전형적인 경우라고 주장한 바 있다.
동시발견/발명의 데자뷔 중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수학 분야에서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 라이프니츠(Gottflied Wilhelm Liebniz; 1646-1716)의 미적분법 발견,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와 뷔르기(Jobst Bürgi; 1552-1632)에 의한 로그(log)의 발견 등이 있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마이어(Robert Mayer; 1814-1878), 주울(James P. Joule; 1818-1889), 콜딩(Ludvig A. Colding; 1815-1888),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의 무려 네 명의 과학자들에 거의 같은 시기에 연구되었던 에너지보존의 원리가 있다.
생물학 분야에서도 대발견이었음에도 수십 년간 잊혀졌던 멘델의 유전법칙이 세 명의 생물학자, 즉 네덜란드의 드프리스(Hugo De Vries; 1848-1935), 독일의 코렌스(Carl Correns; 1864-1933),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Erich Tschermak; 1871-1964)에 의해 1900년에 재발견 되었고, 자연선택설에 기반한 진화론 역시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과 월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에 의해 거의 같은 시기에 연구되고 발표되었다.
진화론도 다윈과 월러스에 의해 동시에 발표되었다. 사진은 진화론을 풍자한 당시의 만화. ⓒ Free Photo
진화론도 다윈과 월러스에 의해 동시에 발표되었다. 사진은 진화론을 풍자한 당시의 만화. ⓒ Free Photo
발명시기 및 생몰연도까지 동일한 두 사람
기술적 발명인 경우에도 동시발명의 사례가 매우 많다. 이중에서도 알루미늄의 제련법 발명과 레이저의 발명은 데자뷔라할 만하므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알루미늄(Al)은 현대 공업문명사회에서 중요한 금속자원이지만, 대량제조법, 즉 실용적인 제련법이 개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즉 철이나 구리 등의 다른 금속들이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부터 대량으로 사용된 데에 비해, 알루미늄은 19세기에 들어서도 대량으로 제조하는 방법이 확립되지 않았다. 알루미늄은 화학적으로 이온화 경향이 크고 다른 원소와의 결합력이 매우 강해서, 독립된 원소로 분리해 내기가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에, ‘찰흙에서 나온 은’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금속이었다.
실용적인 알루미늄의 제련법을 발명한 사람 중 하나가 미국의 화학기술자 홀(Charles Martin Hall; 1863-1914)이다. 그는 1886년에 산화알루미늄 원료인 보크사이트에 빙정석(Na3AlF6)을 넣고 가열하여 용융상태로 만든 후 직접 전기분해를 하는 방식으로 알루미늄을 대량 추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알루미늄의 경제적인 제조법을 확립한 그는 회사를 차려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다가 그만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알루미늄 제련법을 발명한 홀(왼쪽)과 에루. ⓒ Free Photo
같은 해에 알루미늄 제련법을 발명한 홀(왼쪽)과 에루. ⓒ Free Photo
그런데, 홀이 새로운 알루미늄 제법을 발견한 해인 1886년에 프랑스에서는 에루(Paul Louis T. Héroult; 1863-1914)라는 야금학자가 홀과 똑같은 방법인 용융빙정석을 이용한 전기분해법으로 알루미늄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여 프랑스 특허를 취득하였다. 물론 홀과는 아무런 사전 관계나 교류가 없었는데, 기존의 알루미늄 제법보다 훨씬 경제적인 이 방법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홀-에루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홀과 에루는 태어난 해도 같고, 22세로 같은 나이인 1886년에 똑같은 알루미늄 제법을 각각 발견하였고, 심지어 죽은 해도 1914년으로 같다는 점은 동시발명의 우연 치고는 상당히 기이하다는 느낌도 든다.
냉전 중이던 미국과 구소련에서 동시에 레이저 발명
오늘날 광범위한 분야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레이저의 원리는 미국과 구소련의 과학자들에 의해 거의 같은 시기에 발견되었다. 영어로 ‘복사의 유도 방출과정에 의한 빛의 증폭’의 머리글자 약어인 레이저(Laser; 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는 미국에서는 타운스(Charles Hard Townes; 1915- ) 등에 탄생하였다.
보통의 빛과는 다른 레이저 광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단일한 파장의 빛을 방출하는 단색성, 옆으로 거의 퍼지지 않고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는 직진성, 매우 밝고 출력이 큰 고휘도성, 그리고 가간섭성 등을 들 수 있다. 고주파 발생 장치를 개발하던 그의 연구팀은 1917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발표된 유도방출에 의한 전자기파 발생 이론에 주목한 끝에, 결국 같은 파장으로 일정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새롭고 강력한 빛인 레이저를 얻을 수 있었다.
레이저 공동발명자 중 한 사람인 구소련의 프로호로프. ⓒ Free Photo
레이저 공동발명자 중 한 사람인 구소련의 프로호로프. ⓒ Free Photo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구소련에서 양자광학 등을 연구하던 바소프(Nikolai Gennadiyevich Basov; 1922-2001)와 프로호로프(Aleksandr Mikhailovich Prokhorov; 1916-2002) 역시 독립적으로 레이저를 발명하였다. 당시 치열한 냉전과 경쟁을 벌이던 미국과 구소련이 향후 군사적으로도 중요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레이저의 개발을 두고 서로 협력했거나 교류했을 리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구소련의 이들 세 명의 과학자들은 레이저 발명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사이좋게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레이저(Laser) 하면 사람들은 흔히 SF영화에 나오는 광선총과 같은 무기를 먼저 떠올리곤 하는데,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처음 입안된 바 있는 전략방위계획(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이른바 스타워즈계획이나 현재의 미사일방어체제(MD; Missile Defense)는 레이저 무기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군사위성이나 미사일을 파괴하는 시스템을 포함한 것이다.
이러한 동시 발견, 발명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중요한 발견은 시대에 부합해야 한다거나 시기가 무르익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해당 과학기술자에게는 유리하게도 또는 불리하게도 작용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할 것이다.
즉 획기적인 연구개발 성과의 발표를 앞두고 한껏 고무된 사람이라면, 다른 과학기술자들도 비슷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확인해보고, 가치가 큰 기술이라면 우선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특허 출원 등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반면에 남들이 거의 알아주지 않는 연구를 홀로 힘들게 진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군가 똑같은 연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실제로 그런 동료 과학기술자를 찾거나 교류하면서 함께 연구하여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레이저를 이용한 실험 장면. ⓒ Free Photo
레이저를 이용한 실험 장면. ⓒ Free Photo
동시발명의 데자뷔는 앞으로도 자주 반복될 가능성이 큰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에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겠다.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지식의 바탕 위에 보완하거나 추가하는 경우든, 기존과는 사뭇 다른 무척 새로운 것이든, 동시대의 사람이라면 혼자만이 아닌 여러 명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비슷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이다.

  •  ScienceTimes

숨은 진화론 창시자 윌리스 빛 본다

100주기 맞아 다윈 필적할 업적 온라인 공개

찰스 다윈과 동시에 진화론을 발표했고 연구 업적도 다윈에 못지않을 만큼 방대한 영국의 자연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1823~1913)의 연구들이 사후 100년을 맞아 내년에 온라인으로 일반에 공개된다고 BBC가 최근 보도했다.

월리스는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창시했으나 1858년 7월 자신의 연구를 다윈에 의뢰해 발표해 후세인들에게 진화론의 창시자는 다윈으로 각인됐다. 다윈의 연구는 지난 2006년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져 온라인에 포스팅됐다.

월리스 역시 아마존에서 말레이 제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현장 조사로 방대한 연구 업적을 쌓았는데 그의 저술과 드로잉 역시 그의 100주기인 내년에 비로소 다윈의 연구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됐다.

앞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다윈 온라인' 프로젝트를 창시한 싱가포르국립대학(NUS)의 과학사학자 존 반 와이 박사는 이번엔 NUS에서 '월리스 온라인' 프로젝트를 출범시킨다.

그는 "지난 2009년이 '다윈의 해'였다면 내년은 '월리스의 해'가 될 것"이라면서 '월리스 온라인'을 통해 일반인들이 그의 모든 연구 저술을 접할 수 있게 되면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것은 154년 전 런던의 한 학회에서 그가 처음 발표한 진화론 연구이다.

와이 박사는 월리스가 다윈의 명성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그의 재능이나 연구 성과가 뒤졌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1848~1853년 브라질의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했고 1854년부터 1862년까지 8년간 싱가포르에 머무르면서 수백개의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전인미답 지역을 탐사했다.

와이 박사는 "월리스는 아무런 특권도 부(富)도 인맥도 없이 홀로 길을 개척해 진화 현상 외에도 수많은 놀라운 것들을 발견한 경이로운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LA중앙일보

다윈에게 양보한 월리스


1858년 6월 18일, 다윈은 여느 때처럼 서재에서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간다. 급기야 창백한 얼굴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한동안 소식이 없다. 이상하게 여긴 그의 아내가 문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인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노크를 하며 물었다. “여보 왜 그래요? 무슨 편지기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 편지의 발신인란에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국의 시골에서 태어난 월리스는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여기저기에서 측량기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0년 정도 측량기사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는 자연스럽게 동식물 표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영국을 떠나 동남아, 아마존, 인도네시아 등지를 탐험하기도 했다.

 1858년 초 그는 열사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말레이군도 원주민의 인구가 왜 급격히 증가하지 않는지를 곰곰 생각했다. 그러다 15년 전 흥미롭게 읽었던 맬서스의 『인구론』이 갑자기 떠올랐고, ‘생존투쟁’이야말로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관해 짧은 논문을 작성한 월리스는 그것을 편지에 동봉해 다윈에게 보낸다. 출판을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를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 검토받고 싶은 정도였다.

 아내의 노크 소리에 방문이 열린다. 다그치는 아내에게 다윈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난 이제 끝이야!” 월리스의 편지 속에 다윈 자신이 20년씩이나 발표를 미루며 공들여온 자연선택 이론이 너무도 명확하게 요약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를 모두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행여 월리스의 생각을 훔쳤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다윈을 살린 것은 그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다윈이 자연선택에 관해 1844년에 쓴 글과 1857년에 쓴 편지의 일부, 그리고 월리스의 논문을 함께 묶어서 생물분류학회에서 공동으로 발표하도록 하자는 제안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자연선택 개념의 근원지가 다윈이라는 사실은 지인들 사이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기에 그런 조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월리스는 당시 런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858년 7월 1일, 이 혁명적 사상의 발표는 너무도 조용히 끝나버렸다. 다윈은 아이가 죽는 바람에 발표장에 올 수 없었고, 월리스는 공동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조차 발표 날 사흘 뒤에야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요즘 같으면 지적재산권을 놓고 법정 시비가 붙었을 만한 상황이었다. 내가 만일 월리스였다면 틀림없이 변호사를 선임했을 것이다. 런던에서 돌아가는 일련의 일들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월리스는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윈 선생 같은 대가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억누르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상대방에 대한 깊은 존경심 때문이었다. 월리스는 다윈을 평생의 멘토로 여겼다. 그가 1889년에 『다윈주의』라는 책을 썼던 것만 봐도 얼마나 다윈을 대단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누구를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그의 이름 뒤에 ‘주의’를 붙인 책을 쓴다는 것은 웬만한 존경심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후대 역사가들은 월리스에게 ‘다윈의 달(moon)’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인류 지성사의 커다란 변곡점이 된 다윈의 『종의 기원』(1859) 뒤에는 바로 월리스의 이런 아름다운 ‘양보’가 있었다. 물론 과학의 세계에서 이런 식의 양보는 예외 중의 예외다(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과학자들은 독창성에 강박증이 있는 사람들이다. 누가 더 중요한 성과를 냈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더 먼저 했는가가 첨예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1등이 아니면 기억해 주지 않는 것이 과학의 역사다. ‘월리스’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양보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잊혀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오늘 우리만이라도 월리스를 기억하자!).

 지난 며칠 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화두는 단연코 ‘양보’였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지만 어떤 양보가 아름다운가에 대해서는 비교적 공통의 감각들을 갖고 있다. 서울시를 둘러싼 최근 두 건의 양보 사건은 그래서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월리스가 아름다운 양보로 ‘다윈의 달’을 자처했던 것은 태양을 진심으로 존경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뢰가 평생 지속되었던 것은 그 태양이 달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양보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법이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중앙일보

 

월리스의 논문 편지

비슷한 연구성과에 충격

‘種의 기원’ 서둘러 출간


1836년 비글호 항해를 마친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분화’라는 자신의 이론을 무려 20여 년 동안 다듬었다. ‘종(種)의 불변’이 진리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혁명적인 이론이었기에 수정과 보완을 거듭했던 것. 그러던 다윈이 서둘러 ‘종의 기원’을 출간하게 만든 기폭제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1823∼1913·사진)의 편지였다.

1858년 6월 18일 다윈과 서신을 주고받아온 월리스가 보낸 편지가 영국 켄트 주 다윈의 집에 날아든다.

이 편지에는 ‘원형으로부터 무한정 이탈하는 변형의 성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동봉돼 있었다. 자신이 정립해온 이론을 요약한 듯한 논문 내용에 다윈은 충격을 받았다.

아마존과 동남아의 동물 생태를 관찰하며 독학으로 진화론을 연구한 월리스는 ‘생존투쟁을 통해 하나의 종이 새로운 종으로 분화한다’는 자신의 이론을 정리해 당시 영국 지식인 사회에서 유명인사였던 다윈에게 검토를 요청한 것이었다.

1837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844년 대강의 이론화까지 마치고도 차마 발표하지 못하고 있던 다윈은 망연자실했다.

고민에 빠진 다윈에게 학문적 친구였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과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는 월리스의 논문과 다윈이 1844년 자연선택에 관해 쓴 글, 다윈이 1857년 후커에게 쓴 자연선택론에 대한 편지 일부를 생물분류학회(런던 린네학회)에서 함께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다윈은 편지를 받은 지 13일 만인 1858년 7월 1일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고 곧바로 책 출간 작업에 나섰다. 방대한 저술 작업에 매달린 끝에 1859년 11월 런던에서 내놓은 책이 ‘종의 기원’이다.

동아일보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OM, FRS, 1823년 1월 8일~1913년 11월 7일)는 영국의 자연주의자, 탐험가, 지리학자, 인류학자이자 생물학자이다. 찰스 다윈과 독립적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의 개념을 만들었다.
그는 아마존강 유역과 말레이 군도에서 답사연구를 했으며 아시아에서 오스트리아에 걸쳐진 동물군의 단절현상이 나타나는 월리스 선을 발견하였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연구는 독자적으로 제안된 자연선택설이다. 그는 동물의 경고색 과 종의 분리를 설명하는 월리스 효과 등을 발달시켜 19세기 동안 진화론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이러한 동물 종의 분포와 지리학의 연관 연구에 대한 기여로 "생물지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초기

월리스는 영국 웨일즈, 몬마우스쉐이어의 어스크 근처 리안바독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토마스 베레 월리스와 매리 앤 그린넬의 여덟 번째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허트포드의 중류층이었으며 아버지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지방으로 13세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윌리엄 월리스의 후손이다. 집안은 물려받은 재산이 약간 있었으나 투자 실패와 관리 부실로 안 좋은 편이었다. 그가 5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런던 북부의 허트포드로 이사하였으며 거기서 허트포드 초등학교를 1836년 가정형편으로 그만둘 때까지 다녔다. 그 후 런던으로 이사해서 형인 존과 함께 살게되었으며 큰형인 윌리엄의 소개로 측량사 보조로 일했다. 그는 이때 런던 기계공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할 수 있었으며 로버트 오웬과 토마스 페인의 급진적 사회개조론자들의 정치사상을 접하였다. 1837년 런던을 떠나면서 웰쉬 근처의 클린톤으로 이사하였고 1840년에서 1843년 사이에 서부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측량일을 하였다. 불경기로 인해 측량일을 그만둔후에는 레이세스터의 대학에서 제도와 지도제작, 측량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는 레이세스터 대학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토마스 말서스의 <인구의 원리에 관한 에세이>같은 책들에 심취하였다. 여기서 헨리 베이츠를 만났는데 그는 당시 19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딱정벌레에 대한 논문을 동물학저널에 기고한 학자였다. 이들은 친구가 되었으며 함께 곤충을 수집하였다. 큰형인 윌리엄이 사망하자 형이 맡았던 교직과 니스의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다. 몇 달 후 니스의 베일에 만들어지던 철도를 위한 측량일을 시작하였으며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곤충수집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탐험의 시기

윌리엄 헨리 에드워드,알렉산더 본 험볼트,찰스 다윈같은 자연주의자들의 선구적인 탐험 여행의 기록들은 웰리스에게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꿈꾸게 하였으며 1848년 드디어 월리스와 헨리 베이츠는 '미스치프'호를 타고 브라질로 떠나게 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아마존강 밀림에서 곤충과 동물을 수집하고 분류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영국으로 돌아와 이를 수집가들에게 판매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특히 종의 돌연변이에 관련된 증거를 수집하길 바랐다. 처음 일 년동안은 베렘 오 파라 부근에서 보냈으며 이후 내륙지역을 탐험하였다. 1849년 다른 탐험가인 식물학자 리처드 스프루스, 월리스의 동생 허버트와 힘을 합쳤다. 이후 스프루스, 베이츠와 그는 10년을 남미에서 표본 수집 탐사를 하였다.
월리스는 계속해서 리오 네그로에서 4년을 표본수집과 지도제작, 원주민과 언어등을 기록하였다. 1852년 7월 12일 '헬렌'호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배안에서 화재가나 월리스는 모든 수집 표본을 잃어버리고 몇점의 스케치와 일기만을 남길 수 있었다. 열흘 동안 표류한 뒤에야 구조될 수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18개월 동안 보험금과 남은 물건들을 팔아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마존의 원숭이에 대해>등 여섯편의 학술 논문과 <아마존 팜나무의 활용>과 <아마존 여행> 두 저서를 썼다. 이때 찰스 다윈등 다른 영국의 자연주의자들과의 교류를 하게 되었다.
1854년에서 1862년 사이에 월리스는 말레이 군도와 동 인도 (현재의 말레이지아와 인도네시아)를 여행하고 판매를 위한 표본수집과 자연 연구를 한다. 이 군도 지역에서 특정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물학적인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후 월리스선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12만5천 종의 표본을 수집하였고(8만 종의 딱정벌레류 포함) 이중 천여 종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종(種)이었다. 이때 보고된 새로운 종에는 날개구리(Rhacophorus nigropalmatus) 같은 동물이 있다. 그는 이러한 탐사를 통해 자연선택진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의 연구와 탐험은 1869년에 <말레이 군도>라는 책으로 펼쳐냈으며 이 책은 19세기의 과학적 탐험을 다룬 책중 가장 잘알려진 책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출판되고 있다.

영국으로 귀환

1862년에 귀국한 뒤 그는 여동생집에서 같이 살며 원기를 회복하고 그의 수집품들을 정리하였다. 그가 겪은 모험과 탐험에 대해 많은 강연 활동을 하였으며 찰스 다윈, 찰스 리엘, 허버트 스펜서 같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1860년대 동안 그는 자연선택을 옹호하고 성적선택,경고색등에 다양한 진화에 대한 글을 기고 하고 강연을 하였다. 1865년부터는 심령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66년에 애니 미튼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세 자녀를 두었다.

노년

그는 수집품들을 판매하여 꽤 많은 돈을 벌었으나 철도와 광산에 투자한 것이 잘못되어 투자한 돈을 날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 리엘과 다윈의 도움으로 1872년부터 1876년사이에 25편의 논문을 쓸 수 있었다. 1881년에서야 다윈의 도움으로 과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연200파운드의 연금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었다.
1913년 11월 7일 올드 오챠드의 시골집에서 90세에 사망하였다. 뉴욕타임즈에서는 그를 "새로운 세기의 생각을 일깨운 진화와 혁명을 이룬 담대한 발견을 이룩한 다윈, 헉슬리, 스펜서, 이엘, 오웬과 함께한 지성인들의 집단에 소속한 마지막 거인이었다."라고 불렀다. 그는 도셋, 브로드스톤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

서훈

Wikipedia

인류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열어준 '나침반'


결코 움직이지 않는 별이 있다네, 
결코 속이지 않는 항해술이 있다네,  
그것은 갈색 돌로 된 자석(magnet)을 이용하는 것이지, 
… 
어둠이 내려 별과 달도 없을 때 
불빛으로 이 나침을 비추어 보면 
나침이 그 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항해자들은 이 나침에 기대어 
가야할 바른 항로를 찾아내지. 
나침항법은 결코 속이지 않는다네.

12세기 말 프랑스의 시〈La Bible de Guynet de Provins〉에 언급된 나침반. 나침반은 남북을 가리키는 자석의 성질을 이용해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려주는 장비예요. 나침반은 배가 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죠. 해나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알 수 있었지만, 전문지식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정확하기도 어려웠고요. 나침반을 누가 언제 발명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어요. 다만 중국의 3대 발명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답니다. 
 
점을 치던 나침반

중국에서 최초로 나침반을 사용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라고 추측해요. 그 당시 쓴 <귀곡자>에 ‘사남’을 사용했다는 기록 때문이죠. 학자들은 이 사남을 나침반이라고 보고 있어요. 사남은 쟁반 같은 ‘반’과 자석으로 된 국자 모양의 ‘지남기’로 이루어져 있죠. 반 위에 지남기를 올려놓고 돌리면 손잡이 부분이 남쪽을 가리켜요. 하지만 ‘사남’은 방향을 찾기보다 술사들이 풍수나 점을 치기 위해 사용했다고 해요. 

방향 찾는 나침반

방향을 찾기 위해 나침반을 사용한 시기는 11세기 초라고 추측해요. 마찬가지로 그 당시 쓴 <무경총요>에서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요. 나침반을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거든요. 심괄의 <몽계필담>에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남쪽이 실제 남쪽과 차이가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고요. 물고기 모양의 지남어, 수레 모양의 지남거, 거북이 모양의 지남구, 바늘 형태의 지남침 등 여러 형태의 나침반이 사용됐다는 기록도 있어요. 본격적으로 먼 바다를 항해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24방위가 표시된 나침반은 12세기 초에 사용했다고 하죠.  

서양으로 전파된 나침반

13세기경 지남어 형태의 나침반이 중국에서 아랍으로, 아랍에서 다시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요.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2세기 말에 쓴 프랑스 시에서 알 수 있듯 나침반이 조금 더 일찍 전해졌다고도 해요.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의 나침반은 14세기 유럽에서 등장했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32방위의 나침반은 16세기에 사용됐어요. 17세기에는 나침반이 달린 소형 해시계가 발명됐고요. 일종의 휴대용 시계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해요. 
나침반을 움직이는 이유
나침반이 지구의 남북을 가리키는 이유를 처음 설명한 사람은 16세기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길버트. 자석의 성질을 갖는 나침반 바늘은 N극과 S극으로 나눠져요. 일반적으로 빨간색인 N극이 가리키는 방향이 북쪽, 파란색인 S극이 가리키는 방향이 남쪽이죠. 나침반이 항상 남북을 가리키는 이유는 지구가 북극이 S극, 남극이 N극인 하나의 큰 자석과도 같기 때문이에요. 지구 자기장 때문이죠. 따라서 나침반의 N극은 항상 지구의 S극인 북쪽을 가리켜요. 
 
오차를 해결한 전륜 나침반

지구 자기장에 따라 바늘의 방향이 바뀌는 나침반을 자기 나침반이라고 해요. 사실 지구 자기장의 축이 지구 자전축에서 조금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이 진짜 북쪽과 차이가 있어요. 나침반을 사용하더라도 그 차이를 보정해줘야 정확한 북쪽을 알 수 있죠. 지구 자기장이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이런 문제를 해결한 과학자가 헤르만 안쉬츠. 바로 전륜 나침반을 만들었죠. 자이로스코프 축에 추를 달면 회전축이 항상 지리상의 진짜 북쪽을 가리켜요. 자이로스코프가 지구 자전에 영향을 받는 원리 때문이죠.  www.econoi.com

우주로 가면 몸이 변한다, 우주인 시력장애 왜?

우주인 되는 꿈들 한 번쯤 꿔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우주에 가면 단단히 각오해야 할 위험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눈이 침침해지는 '시력 이상장애'라고 합니다.
우주인 70%가 겪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는데요.
이런 시력 장애, 왜 일어나는 걸까요.
 
우주 탐사를 위한 물과 산소는, 현재 기술로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국제우주정거장 우주인들은 지구에선 쓰지 않는 안경을 챙겨 씁니다.
침침해진 눈의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주인 33명을 조사한 결과, 70%가 '시력 이상 장애'를 겪은 걸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2배 심했습니다.
아직 원인 불명이지만, 일단 무중력 때문으로 의심됩니다.
무중력 우주에선 지구에서보다 피가 머리 쪽으로 더 쏠리고, 그러면 두개골의 압력이 증가하면서 안구를 누를 수 있는데 이때 뇌와 안구를 연결하는 시신경 조직이 붓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주변 시야가 좁아지는 초기 증상도, 심해지면 실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제니퍼 포가티 박사/미국항공우주국]
"몇몇 우주인들은 시력 변화가 좀 더 심각했고, 예상만큼 빨리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 밖에도 지구에선 50대 이상 주부가 1년 동안 겪는 골밀도 감소가 우주에선 한 달 만에 일어나고, 강력한 우주 방사선이 인간 세포와 DNA를 변형시킬 수 있는 문제도 인류의 우주탐사에 앞서 해법이 나와야 할 난제입니다.
MBC

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미네소타와 한국

2008년 10월 보사부 장관을 지낸 권이혁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가 86세 노구를 이끌고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미네소타대 의대 학장을 지낸 닐 골트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골트는 1959년부터 2년간 서울에 머물며 젊은 한국 교수 요원을 미네소타대로 보내는 프로젝트의 총괄 자문관을 했다. 골트 교수가 췌장암으로 임종을 앞뒀다는 소식에 권 교수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갔다. 골트 교수는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해 우리가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1955년부터 7년간 1000만달러를 들여 220여 한국인 공·농·의학도를 미국에서 공부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2차 대전 후 개도국 교육 원조 사업 중에 최대 규모였으며 훗날 가장 성공한 사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서 선진 의술을 익힌 70여 의사 중 세 명만 빼고 미국에 남으라는 제안을 뒤로하고 모두 고국으로 돌아왔다. 권이혁 교수도 미네소타 연수생 출신이다. 그들이 의학 교육을 바꾸고, 인턴·레지던트 교육제도를 만들고, 전문의 체계를 발전시켜 한국 의료 발전 기틀을 세웠다
[만물상] 미네소타와 한국


▶미 중서부 북단 미네소타. 인구 540만명에 면적은 한반도보다 크다. 춥기로 유명한 이곳에는 6·25전쟁 참전 군인이 유난히 많다. 6·25 때 한국 땅을 밟은 미네소타 출신 군인이 9만4000여명이다. 맥아더 태평양사령관이 본국에 "한국의 혹한을 견딜 군인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일년 중 거의 절반이 겨울인 미네소타 출신이 대거 차출됐다. 1950년 겨울 미군이 개마고원에서 중공군과 벌인 장진호전투에서 미네소타 군인 4000여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미네소타에는 한국 입양인이 2만8000여명 있다. 교민보다 두 배 많다. 백혈병 골수 이식을 받았던 '성덕 바우만'도 미네소타 가정 출신이었다. 한국전 참전 용사가 많은 까닭에 일찍부터 한국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컸다. 미네소타주는 아프리카 소말리아 난민 8만명을 품었고, 아시아 라오스 난민 13만명도 받았다. 북유럽 이민자들이 일궈낸 이 지역은 미국 내에서도 개방성이 남다르다.

▶60년 전 우리에게 선진 의술을 가르쳤던 미네소타대 병원이 내년에 의료진 30여명을 서울아산병원 외과 이승규 교수팀에게 보내 생체 간 이식을 배우기로 했다.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게 된 미네소타판 청출어람이다. 스티브 잡스 간 이식을 집도했던 미국 외과 의사도 얼마 전 이승규 교수에게 배우고 갔다. 지금 선진 의학을 배우고 싶어 하는 개도국이 많다. 이제 우리가 '미네소타'가 될 차례다.
 조선일보

300년 후 역사학자의 질문 "당신은 왜 종말을 방관했나"

南北極 빙하 녹아 해수면 상승, 교역중단·식량난 등 문명 몰락
하버드大 교수의 '假想 역사서'
"기후변화, 계속 수수방관하면 전체주의 득세할 것" 경고 던져

 300년 후 역사학자의 질문 "당신은 왜 종말을 방관했나"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
나오미 오레스케스·에릭 M. 콘웨이 지음
홍한별 옮김|갈라파고스|192쪽|1만원
2093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상의 문명은 몰락한다. '대붕괴'는 남·북극과 그린란드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7m나 상승하면서 시작된다. 모든 일은 연쇄적으로 벌어졌다. 뉴욕·도쿄·상하이·암스테르담·함부르크·부산 같은 항구 도시가 물에 잠기면서 교역이 중단됐고, 원유 수송로가 끊기자 공장과 발전소, 자동차가 멈췄다. 세계 곳곳에서 식량난이 터졌지만 바다를 단백질 공급원으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전 세계 해안가의 원자력 발전소 430기가 물에 잠겨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와 같은 오염 사태가 벌어졌다. '기후 난민'들은 필사적으로 저지대 탈출을 감행하고, 곳곳에서 정부가 전복됐다. 민주주의 체제는 작동을 멈췄다. 강력한 힘을 가진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가 대륙별로 들어서 혼란을 수습하고 인류는 새로운 문명기로 접어든다.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인류의 화석연료 중독이 종말을 부를 수도 있음을 가상의 역사서 형식으로 서술했다.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인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캘리포니아공대 제트추진연구소 과학기술사가인 에릭 M. 콘웨이가 함께 썼다. 책 속의 화자(話者)인 2393년의 역사학자는 "일찍이 스스로를 '계몽의 자식'이라 일컬었던 서양 문명은 종말을 예측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이를 막지 못했다"며 우리에게 연유를 묻는다.

 300년 후 역사학자의 질문 "당신은 왜 종말을 방관했나"
기후변화에 따른 재앙이 문명을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지만 우리는 경고를 무시하고 있다. 사진은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인류가 위기를 맞는다는 내용의 재난 영화 ‘투모로우’의 한 장면. /폭스코리아 제공
기후변화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상(異常) 한파와 유례없는 혹서, 가뭄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남태평양의 투발루는 국토의 상당수가 이미 물에 잠겼고, 인류가 사막화된 지구를 떠나는 '인터스텔라', 온난화를 막으려다 지구를 얼려버리는 '설국열차', 해수면 상승으로 빙하기를 맞는 '투모로우' 등의 영화가 이어지고 있다.

미래의 역사학자는 현재의 문명을 되돌아보며 서구 문명이 실증주의와 시장근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온난화에 대한 과학자들의 경고는 무성했지만 번번이 검증 요구에 직면해 좌절했고, 화석연료 사용으로 이익을 얻는 신(新)자유주의 '탄소연소 복합체' 세력의 힘은 계속 커져갔다. 그 결과 인류가 맞이하는 미래는 디스토피아적인 전체주의 사회다. 우리의 후손인 역사학자가 '제2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로 설정됐다는 점은 시사점이 크다. 몰락 이후, 인류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아귀다툼을 벌인다. 곳곳에서 기아와 전염병이 창궐한다. 국가가 막강한 권력을 갖고 곳곳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들은 현재의 중국과 유사한 권위주의 정치 체제가 혼란을 수습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 듯하다.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바로 전체주의 세력의 득세였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서양 문명의 몰락'인 것도 그 때문이다.

화석연료 남용으로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反論)도 많다. 학자들 중에는 최근의 기온 상승 현상을 중세가 끝나면서 15~19세기 지구의 평균 기온이 낮아지는 소(小)빙하기를 겪은 이후 원상 회복되는 과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중세에는 무척 온난했다고 한다. 여름철 빙산이 녹는 현상을 환경단체들이 과장했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

 300년 후 역사학자의 질문 "당신은 왜 종말을 방관했나"
해수면 상승으로 달라진 2300년 무렵의 미국 뉴욕 인근 해안선 가상도. /갈라파고스 제공
하지만 이 책 저자들의 입장은 완강하다. 2004년 사이언스지(誌)에 기고한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합의'로 유명해졌고,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에도 인용된 저자들은 "지금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시간이 없다"고 경고한다. 가상 역사를 택했다는 점에서 조지 오웰(1984)이나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의 후예지만, 소설적 상상력에 기대는 대신 해수면 상승 속도, 이산화탄소 발생량 등 데이터를 들이댄다. 예컨대 2012년까지 화석연료, 시멘트 생산, 삼림 훼손 등으로 5450억t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됐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1970년대 중반에 과학자들이 온실가스가 온난화의 주범(主犯)임을 입증한 뒤에 배출됐다며 우리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또 미국과 캐나다가 석유를 대체하기 위해 셰일 가스 채굴에 몰두하는 바람에 재생 가능 에너지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셰일 가스는 채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와 메탄을 방출시켜 온난화를 가속화시켰다. 강대국들이 매달리고 있는 북극권 자원 개발도 영구 동토층에 갇혀 있던 메탄을 풀어놔 파국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이 책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행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에 대한 보고서다.
  • 조선일보
  • 대표적인 3大 귀 질환…귀에 자극 주는 행동 삼가야

    대표적인 귀 질환 종류와 예방법


    소리를 듣고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귀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다. 귀는 이관을 통해 코와 연결되어 있어 다른 부분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평소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나 이유 없이 어지럼증이 계속된다면 귀 질환을 의심해봐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환절기는 알레르기성 비염이나 감기 합병증으로 중이염이 나타날 수 있다. 흔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귀 질환은 무엇이 있을까?

    이어폰을 사용하는 남성 모습
    이어폰을 사용하는 남성 모습/사진=헬스조선 DB
    ◇대표적인 3大 귀 질환▶돌발성 난청갑자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확실한 원인 없이 수 시간 또는 2~3일 동안 갑자기 난청이 발생하고 이명과 현기증을 동반한다. 내이나 청신경 등에 이상이 생겨 나타나는 증세로 주된 원인은 바이러스 감염 혹은 혈관 장애다. 처음 발병하고 일주일 안에 치료하면 금세 나아지지만 방치할 경우 청력을 잃을 수도 있어 위험하다. 평소 면역력을 높여 바이러스 감염을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석증

    머리를 특정 방향으로 움직일 때 어지럼증을 느끼는 질환을 말한다. 귀의 평형 기관에 정상적으로 있는 돌가루(이석)이 떨어져 나와 반고리관 내로 들어가서 발생한다. 이석이 들어 있는 전정기관의 위치를 파악한 후 환자의 머리를 천천히 돌리거나 특정 자세로 유지하게 하는 치료를 할 수 있다. 이석증을 예방하기 위해 머리를 심하게 흔들거나 진동이 심한 기구나 운동을 삼가는 것이 좋다.

    ▶중이염

    중이염은 귀 안의 고막과 내이를 연결하는 이소골이라는 부분에 염증이 생기는 질병이다. 감기나 비염의 합병증으로 자주 나타난다. 귀에 통증이나 발열을 동반하는 것을 급성 혹은 삼출성 중이염이라 하고, 고막에 구멍이 생긴 경우를 만성 중이염이라 부른다. 만성 중이염의 경우 염증으로 인해 청력 저하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수술을 하는 것이 좋다. 중이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어린이들은 코감기에 걸렸을 경우에 귀 검사를 받아 중이염 감염 여부를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 환절기에는 따뜻한 음료를 충분히 섭취해 코점막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어폰 오래 사용하는 등 귀에 자극 주는 행동 삼가야 귀 질환을 예방하려면 평소 잦은 이어폰 사용이나 큰 소리에 장기간 노출되는 등 귀에 자극이 가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귀지는 깊게 파거나 자주 파면 귓속 피부가 상해 염증이 생길 수 있다. 또 귀에 물이 들어갈 경우 귀 입구를 면봉으로 닦아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조선일보

    '미네소타 프로젝트'

    1955년 9월 15일 서울대병원 젊은 의사 10여명이 당시 공항으로 쓰이던 여의도에서 미국행(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네소타대학병원으로 연수를 떠나기 위함이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66달러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들의 여행 짐은 단출했다. 한국 전쟁 후 어수선한 시점이라 그들이 받은 의학 교육도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은 전국 60개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의 어느 병원도 심장 수술을 할 실력과 시설이 없었다. 의대 실습실에 전기가 안 들어와 대장균 배양 실험을 가슴 품에 데워서 하던 때였다.

    이 젊은 의사들에게 미네소타대학병원은 의료의 신천지였다. 무조건 죽는 줄로만 알았던 선천성 심장병을 거기서는 조기에 진단하고 수술로 살렸으니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전공에 따라 첨단 의료기술을 익혔다. 소아과 의사는 소아 심장병을 진단하고 관리하는 기술을 익혔고, 미생물학을 전공한 의사는 바이러스 배양법을 처음 배웠다.

    연수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미국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갖고 의학 교육과 진료 시스템을 바꿔나갔다. 그 '소아과 의사'(홍창의·86·전 서울대의대 교수)는 국내 최초로 소아과학 교과서를 펴냈고, 어린이 전문병원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미생물학 의사'(이호왕·81·전 학술원 회장)는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한탄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 됐다. 이들은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진행된 이른바 '미네소타 프로젝트' 출신들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원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정부가 미네소타대학에 의뢰해 시작된 교육 지원 사업이었다. 약 7년에 걸쳐 총 226명의 젊은 교수 요원이 학비와 숙식비를 제공받으며 미네소타대학에서 연수를 했다(이왕준·2006년 서울대 의사학 박사학위 논문). 미 정부 산하 해외활동본부가 내놓은 총 1000만달러의 지원금은 신(新)지식에 목마른 한국 젊은 의사들에게 가뭄 속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미네소타 출신'들은 국내 전문학회를 이끌고, 대학병원 원장을 맡으며, 한국 의료를 선진화시킨 주역이 됐다. 의학교육과 의사 양성 체계도 독일·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요즘 우리나라의 임상의학 수준이 세계적으로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이제는 국내 병원들이 해외 환자 유치에 뛰어들고 있다. 정부도 해외 환자 마케팅을 할 수 있도록 의료법을 바꿔가며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의료도 국가간 장벽을 넘어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쪽으로 이동하는 세상이니 상당한 경제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료'라는 것이 산업이기도 하지만 본래 공익의 성격이 강한 분야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부자 환자'를 많이 유치하는 것이 당장 국익에 도움이 되겠지만, 국가 이미지와 연계되지 않고는 오래 갈 수 없다. 궁극적으로 현지 의료진과 탄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한국 브랜드의 병원이 해외 곳곳에 들어서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의사·간호사들을 데려다 교육시켜주고, 그 나라의 의료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야 한다. 우리가 미국 병원으로부터 선진 의료를 전수받은 것처럼 이제 우리의 의료 지식과 기술을 나눠야 한다. 해외 환자를 대거 유치했다고 '의료 강국'이라는 소리를 듣긴 어려운 세상이다.
    조선일보

    60년前 한국 가르친 美의대, 한국 배우러 온다

    청출어람 '미네소타 프로젝트'
    "1955년부터 7년간 의료원조… 이젠 우리가 배우고 싶어"
    아산병원, 年400건 肝이식 생존율 95% 세계 최고 수준
    "우리도 저개발國 도와줘야"


    브룩스 잭슨 학장, 이승규 교수 사진
    브룩스 잭슨 학장, 이승규 교수.


    지난해 말 미국 미네소타대학 의대 학장으로부터 서울아산병원 의료원장실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우리 대학은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의사들을 받아 선진 의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배운 의사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한국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미네소타대 의료진이 서울아산병원의 생체 간이식 기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과거 한국과 미네소타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주길 바랍니다."

    편지는 미네소타대 간이식팀 의사들을 한국에 보내 의료기술 연수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아산병원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20일 미네소타대 의료진이 우리나라에 직접 와서 생체 간이식을 배우는 연수 협약식을 체결한다. 생체 간이식은 산 사람의 간을 절반 기증받아 말기 간질환 환자에게 이식하는 수술이다. 서울아산병원 장기이식센터 이승규(외과) 교수팀은 '변형우엽 간이식', 두 사람의 간을 한 환자에게 넣어 주는 '2대1 간이식', 혈액형이 맞지 않아도 이식이 가능한 'ABO 혈액부적합 간이식' 등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생체 간이식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날 협약식에는 미네소타대 브룩스 잭슨 의대 학장, 티머시 프루트 장기이식 과장, 존 레이크 간이식 실장, 제이컵 툴라 줄기세포센터장 등 병원 핵심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다.
    1950년대 후반 당시 서울대 의대 외과 이영균(맨 오른쪽) 교수가 미국 미네소타 대학병원에서 연수를 받고 있는 모습.
    1950년대 후반 당시 서울대 의대 외과 이영균(맨 오른쪽) 교수가 미국 미네소타 대학병원에서 연수를 받고 있는 모습. /서울대병원 제공


    이를 두고 의료계에서는 '미네소타판 청출어람' 스토리라는 말이 나왔다. 1955년부터 1961년까지 7년간 미국 국제협력본부가 진행한 1000만달러 개도국 원조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라 서울대 의대, 농대 등 젊은 교수 요원 226명이 미네소타대로 연수를 다녀왔다. 미네소타대 의대는 당시 세계 최초로 심장수술을 한 곳이다. 췌장 이식도 여기서 처음 이뤄졌다. 미네소타 프로젝트 출신으로는 옛 보사부 장관을 지낸 권이혁(92) 전 서울대 총장,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인 한탄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이호왕(87) 전 고려대 의대 교수, 소아 심장학 교과서를 집필한 홍창의(92) 전 서울대병원장 등이 있다. 이승규 교수가 서울대병원 외과 전공의 시절, 직접 수술법을 가르쳤던 김진복 전 서울대 외과 교수도 미네소타대 연수생 출신이다.

    서울아산병원은 한해 간이식을 400건 정도 한다. 이 중 생체 간이식 건수는 340여건에 이른다. 미국 전체에서 이뤄지는 270여건보다 많다. 아산병원의 간이식 환자 생존율은 95%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은 주로 뇌사자로부터 간을 통째로 기증받아 이식하는 수술을 하는데 난도가 비교적 낮다. 하지만 뇌사자 기증이 정체돼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간 절반을 기증받는 고난도 생체 간이식이 절실해졌다. 이에 미네소타대는 서울아산병원을 배움터로 선택한 것이다.
    이 교수는 "60년 전 우리에게 의술을 가르쳤던 원조(元祖)가 한국으로 배우러 오는 선순환의 역사"라며 "이제 우리가 (제2의) 미네소타가 되어 저개발 국가 의사들에게 선진 의술을 가 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판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서울대 의대가 라오스 국립의대 의사들을 데려와 의술 연수를 시키는 프로그램, 국제보건의료재단이 저개발 국가 의료진 500여명의 국내 연수를 지원하는 이종욱(전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펠로십, 서울아산병원이 동남아시아 국가 의료진에게 수술법을 가르치는 아산 아시아 프로젝트 등이 있다.
    조선닷컴

    완벽을 추구한 한 수학자의 이야기

    수학 논리의 무모순성 증명 위해 노력한 수학자 힐베르트
    모순없는 수학을 향한 발걸음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돼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중략) 최근에는 행정, 관리, 기획, 경영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수준의 수학이 필요하게 됨으로써…(후략)” 이 글은 고교 참고서 『수학의 정석』 머리말의 일부다. 실제로 수학은 자연과학·공학뿐 아니라 경제·경영, 더 나아가 사회과학 등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이 널리 인정된다.
    19세기 말엽, 수학에는 집합론, 해석학 등의 분야가 생겨났다. 수학계에는 이 분야들에서 생겨난 새로운 개념들과 관련해 여러 역설들이 제기됐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러셀의 역설’이 있다. 이는 “어느 마을에 있는 단 한명의 이발사는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준다. 이 이발사는 자신의 머리를 깎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역설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이발사는 자신의 머리를 깎을 수도, 깎지 않을 수도 없음을 알게 된다. 수학적으로 이 역설은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 집합, 즉 자기 자신의 원소가 되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인 Z={x|x∉Z}에 관한 역설이다. 수학에는 러셀의 역설 외에도 여러 역설들이 제기돼 ‘수학의 위기’가 발생한다. 저명한 수학자였던 다비드 힐베르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논리적으로 완전한 수학을 만들기 위해 ‘힐베르트 프로그램(Hilbert's Program)’을 주창하게 된다. ‘현대 수학의 아버지’ 힐베르트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그가 펼쳤던 모순 없는 수학(수학의 무모순성)을 위한 노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힐베르트 프로그램
      
     
       
     

    1900년 국제수학자대회에서 수학자들은 19세기 수학의 발전에 취해 여러 역설들이 초래한 수학의 위기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힐베르트는 수학의 기초와 관련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대회에서 23가지 문제를 발표한다. 이 중 수학의 무모순성과 관련된 것은 1번 문제인 ‘연속체 가설’과 2번 문제인 ‘산술의 무모순성 증명’이다. 두 문제는 각각 무한 개념의 정당화와 수학의 무모순성에 대한 증명을 꾀하고 있다.
    첫번째 문제인 연속체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한집합을 셀 수 있어야 한다. 칸토르(Cantor, 1845~1918)는 두 무한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을 하나라도 만들 수 있다면 두 무한집합의 원소의 개수가 같다고 주장했다(Hume’s Principle). 실제로 자연수의 집합 N={1,2,3…}과 짝수의 집합 E={2,4,6…} 사이에는 E의 원소의 절반을 취해 N에 대응시키는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므로 집합 N의 원소의 개수와 집합 E의 원소의 개수가 같다.
     
      
     무한집합의 원소의 수를 세기 위해 활용되는 기초적인 개념인 '일대일 대응'
       
     

    흔히 집합의 원소의 개수를 ‘기수(基數, cardinality)’라고 쓰며 특히 자연수 집합의 기수는 ℵ0(aleph zero)로 표현한다. 유리수 집합과 자연수 집합 사이에는 적당한 일대일 대응이 존재해 유리수 집합의 기수가 ℵ0로, 자연수와 같음이 알려져 있다. 그러면 유리수보다 큰 집합인 실수에 대해 ‘실수의 집합과 자연수 집합 사이에 적당한 일대일 대응이 존재해 실수의 집합의 기수도 ℵ0가 되는가’하는 의문에 칸토르는 실수 집합의 원소의 개수가 2ℵ0임을 증명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연속체 가설이란 자연수보다 기수가 크고 실수보다 기수가 작은 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말한다.
    두번째 문제인 산술의 무모순성 증명은 힐베르트 프로그램과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힐베르트는 그의 저서 『기하학의 기초(1899)』에서 산술에 모순이 없음을 가정해 기하학에 모순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이는 산술에 모순이 없다면 기하학에도 모순이 없다는 상대적인 증명이었다. 즉 산술의 무모순을 보인다면 수학에 확고한 기초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힐베르트는 산술에서 더 나아가 전체 수학에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고 이러한 생각이 1920년대 가시화돼 ‘힐베르트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수학을 형식화해 그 형식체계가 무모순임을 분명한 방법(힐베르트는 이를 ‘유한적 방법’이라 불렀다)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을 형식화한다는 것은 먼저 수학을 공리* 체계로 만들고 이를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기호들로 만드는 것과 그 기호들을 문법에 맞도록 하고, 이로부터 다른 논리식을 추론할 수 있도록 규칙을 명시하는 것이다. 힐베르트는 유클리드가 몇 개의 공리와 공준*으로부터 기하학의 체계를 완성시켰듯, 산술(더 나아가 수학 전체)에서도 이러한 공리 체계를 만들고자 했다. 또 그는 반드시 무모순성 증명에 그 방법이 옳은가를 확실하게 조사할 수 있는 과정들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순 없는 수학을 만들기 위한 힐베르트의 노력들은 1931년 괴델이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직격탄을 맞게 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어떤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그 체계 내에서는 참이지만 공리적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제 1 불완전성 정리, G1)”하며, “어떤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그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체계 자체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제 2 불완전성 정리, G2)”는 것이다. G1에서 말하는 ‘공리적 방법’이란 증명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는 몇 개의 공리와 그로부터 유도되는 정리들로 이론 체계를 구성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어떤 체계가 ‘무모순’이라는 것은 그 체계 내에서 어떤 S라는 명제가 증명됐을 때 S의 부정이 동시에 증명되는 경우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며, 이론이 ‘완전하다’는 것은 체계 내의 참인 명제들을 모두 공리들로부터 유도될 수 있음을 말한다. G1은 ‘공리적 방법’으로 체계 내의 참인 명제들을 모두 증명할 수는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힐베르트 프로그램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쿠르트 괴델(Kurt Godel, 1906-1978)
       
     

    G2는 실제로 공리에서 출발한 체계의 모순성 자체를 결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우선 힐베르트가 제기한 첫번째 문제였던 연속체 가설은 ‘불완전성 정리’가 적용되는 대표적인 예로, 참인지도 알 수 없으며 만약 참이라도 증명할 수 없다(결정 불가능하다). 괴델은 또한 산술 전체가 들어있는 체계의 무모순성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흔히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힐베르트가 말하는 ‘형식체계의 무모순성’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일 교수(숙명여대 교양교육원)는 그의 논문에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힐베르트의 프로그램이 완전히 폐기된다고 말하는 것은 편향된 시각에서 나온 주장일 수 있다”고 언급하며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완전히 무산시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한 이후에도 꾸준히 힐베르트 프로그램의 논리를 수정해가는 과정이 진행됐다.
    힐베르트도 저서 『수학의 기초(1934)』를 통해 ‘유한적 방법’의 개념을 확장—“무한한 것들을 사용하는 추론들이 유한한 절차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대치돼야 한다”—함으로써 G1과 G2가 자신의 프로그램에 영향을 준 것을 인정했다. 확장된 ‘유한적 방법’에서는 초한귀납법을 통해 산술의 무모순성이 증명된다.
    초한귀납법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적 귀납법—먼저 P(1)이 성립함을 증명하고, 임의의 자연수 k에 대해, P(k)를 가정하고 P(k+1)을 증명하는 것—을 확장해 서수에까지 귀납법을 적용시킨 것이다. 가령 자연수 1,2,3,4…는 매우 자연스러운 순서를 갖고 있고, 이를 이용해 유한개의 원소들에 번호를 붙여줄 수 있다. 서수란 칸토르가 1897년에 무한수열의 개념을 도입할 때 도입한 수로, 무한히 긴 수열의 각 ‘순서’를 표현하는 수이다. 초한귀납법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수학적 귀납법과 다르지 않으나, 수학적 귀납법에 “임의의 극한서수 λ보다 작은 모든 γ에 대해 P(γ)가 성립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P(λ)를 증명”하는 과정이 추가된다(극한서수는 무한히 큰 서수를 의미).
     
      
     수학적 귀납법을 확장해 숫자값이 아닌 순서값을 나타내는 '서수'에까지 적용한 '초한귀납법'
       
     

    그러나 초한귀납법이 힐베르트가 주장하는 ‘유한적 방법’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발표되기 전, 힐베르트가 말하는 유한적 방법에는 일반적인 수학적 귀납법은 포함됐지만 초한귀납법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발표된 후 힐베르트는 그의 새로운 유한적 방법에 초한귀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정했고, 힐베르트의 조수였던 게르하르트 겐첸은 초한귀납법을 사용해 산술의 무모순성 정리를 증명했다. 사실 초한귀납법은 힐베르트가 원래 말했던 유한적 방법인 “문제에 대한 토론, 주장, 정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나 방법이 옳은가를 확실하게 조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재 초한귀납법이 힐베르트의 ‘유한적 방법’에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힐베르트가 제기한 문제 중 연속체 가설은 참과 거짓이 ‘결정되지 않는’ 문제로 남게 됐고, 산술의 불완전성 증명은 초한귀납법을 사용해 증명됐다. 그리고 수학을 형식화해 수학 자체의 무모순을 보이겠다는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게 됐지만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앨런 튜링 등이 컴퓨터의 기본 개념을 확립하기도 했다(『대학신문』 2012년 03월 31일자). 무엇보다 힐베르트 프로그램이 수학자들에게 수학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수학사적 의의가 결코 ‘과거에 존재했던 실패한 프로그램’이라는 수식어에 가둘 만큼 작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수학의 기초에 대한 힐베르트의 연구는 초수학이나 증명론 등의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 냈다. 현재도 수학의 근본 논리를 탄탄하게 하려는 수학자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고, 그러한 수학자들의 노력이 힐베르트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인 것이다.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Wir mussen wissen, Wir werden wissen(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공리: 증명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
    *공준: 이론적 지식의 탐구에서 기본적인 전제로 요청되는 명제로, 그것의 논리적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
     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