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손 마사요시(孫正義, Masayoshi Son) |
한국명 | 손정의 |
출생 | 1957년 8월 11일, 일본 사가현 토스시 |
본관 | 일직 손씨 |
본적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
학력 | UC Berkeley 경제학과 학사 |
1. 개요
일본[5]의 기업인. 소프트뱅크 그룹의 창업자로서 소프트뱅크 그룹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소프트뱅크 주식회사 대표 집행역 사장 겸 CEO,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오너 등을 맡고 있다. 참고로 겅호엔테테인먼트의 대표이사 겸 아시안 그루브 주식회사 대표이사이자 사장인 손태장이 손정의의 막내동생이다.2. 신조
인생 50년 계획
-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 30대에 최소한 1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 마사요시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인생 50년 계획'은 그가 19세가 되던 해에 세운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50대까지 그의 인생이 그가 세운 인생 계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6년 7월 현역 은퇴를 철회하고 10년은 더 하고 싶다고(인공지능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가져오기 때문) 소프트뱅크 주주총회 직전 날에 밝혔고 후임을 퇴임시켰다.# 원래는 60세 생일에 깜짝 은퇴 발표를 계획했었다고 한다.
3. 생애
한국계 일본인 사업가로 재일교포 3세이다. 손 회장의 아버지 손삼헌(78) 씨는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128번지[6]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손종경(1899~1968년)씨는 벼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1930년대 일본군이 비행장을 만들면서 농사 지을 토지를 잃었다고 한다.그래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돈벌이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했는데, 광복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어려워 1년 가량 머물다 다시 일본으로 가 큐슈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했고, 할머니는 리어카에 음식물 쓰레기를 담아 가축사료로 쓰곤 했는데,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밖에 나가 일하시느라 잘 볼 수 없었고,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를 타고 놀면서 자랐다고 한다. 손마사요시는 그러한 할머니의 고생 이야기를 하며 공석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손마사요시 일가가 재산을 불린 것은 그의 아버지 대에서였다. 손마사요시의 부친인 손삼헌씨는 소액 대출업을 했고, 파칭코 사업으로 재산을 불렸다. 부친은 사업 감각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한 예로 파칭코 주차장에 유료 낚시터를 만들어 '붉은 잉어를 낚으면 보너스 만엔'이라며 호객을 했는데, 파칭코로 잃은 손님은 낚시에서 돈을 따려 했고 보너스를 딴 손님은 다시 파칭코로 갔다고.
하지만 그가 10대일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며 병원에 입원하자, 그는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릴 적 꿈은 교사, 화가, 정치인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직업이기에 상대적으로 차별이 덜한 사업가를 선택했다고. 여담으로 그는 훗날 방송에서 어린 시절 재일교포라고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은 적이 있다는 경험을 밝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고.
어머니 이옥자씨[7]는 한국에서 이주했으며, 근래엔 저명한 나전칠기작가인 길정본 선생의 전문 통역사를 하고 계신다고 한다. 손 회장의 어머니는 롯폰기에서 가정부와 둘이서 생활 중이고 손 회장과는 왕래가 적다고 한다. 때문에 손 회장과 모친의 사이가 현재는 별로 안 좋은 것 같다는 말도 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입버릇은 '너는 천재다' 였다고 한다. 차별에 위축된 아들의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는지 어쨌는진 모르지만, 하도 그런 소리를 듣다보니 손 회장은 '정말 내가 천재인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훗날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고자 하는 상대방에게 '저는 천재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하도 그러니까 상대방 역시 손정의에게 천재 같은 면이 있어보이는 인상을 받았다고.[8]
여하튼 그렇게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손 회장은 주변인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생각을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손 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을 벗어나 떠돌며, 사업가가 되는 옥을 찾자). 사실 그가 유학을 결심한 배경도 특이한데, 1973년 쿠루메대 부설고교에 들어갔지만 2년 만에 그만둔 손 회장은 유학을 결심하지만 막상 가서 뭘 배우면 좋을지 몰라 무작정 도쿄로 상경해 일본 맥도날드 설립자 후지타 덴을 찾아갔는데, “미래에 세계적 CEO가 되려면 뭘 배워야 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후지타는 "인터넷, 노트북"이라고 대답했다고.
그렇게 영감을 얻은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경제학과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며 1980년 경제학 학사를 땄고, 동시에 경제적 독립을 위해 마이크로칩을 활용한 번역기를 만들어 1980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유니손월드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하는 등 본인이 직접 특허를 SHARP에게 팔아 사업 밑천을 마련했다고 한다.
3.1. 소프트뱅크의 창업과 발전
1980년, 그는 높은 성적 덕에 모교인 UC버클리는 물론 하버드·스탠퍼드·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대학원에 진학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제안을 받았지만 졸업만 마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19세때 세웠던 인생 50년 계획의 첫 단추를 꿰매기 위해 그해 3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미국에서 운영하던 사업 '유니슨 월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홍 루'(후에 그는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스타컴을 창업한다)에게 넘겼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걸 40여개의 사업 아이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역시나 소프트웨어산업. 그는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소프트웨어 시장은 미국의 거대 개발업체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 대신에 인프라(유통)를 택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선택은 꽤 현명한 선택이었다.1981년 9월, 그의 고향과 가까운 후쿠오카 현 오도시로 시에 위치한 허름한 2층 건물에서 직원 2명과 함께 소프트뱅크를 창업, 소프트웨어 유통, 컴퓨터 서적 출판 등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관련 제품 전시회인 ‘코덱스(COMDEX)’에 출품한 소프트웨어가 ‘대박’을 치는데, 이때부터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승승장구하며 파소나의 남부 야스유키, H·I·S의 사와다 히데오와 함께 벤처 삼총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1983년 봄에 그는 몸에 이상을 느끼자 회사 건강검진에서 직원들과 같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만성간염 판정을 받아 5년의 생존기간 판정을 받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그는 병상에서 10대 시절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의 삶을 각색한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를 다시 읽으며 메이지 유신의 초석을 닦으며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메이지 시대가 오기 불과 2개월 전 암살을 당해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꽃같은 생을 마친 료마를 보며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극적으로 건강을 되찾아 1986년 5월, 회사로 복귀했다. 그 기간동안 회사는 고객들과 거래처 등에게 신뢰를 잃었고, 신뢰해 오던 직원 20명이 동시에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가서 따로 회사를 차렸을 만큼 사원들의 배신과 불신도 있었기에(손정의는 굴욕감을 누르며 그들을 말렸지만, 결국에는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사원들이 차렸던 회사는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소프트뱅크는 망해가기 일보 직전에 상태였지만, 그는 회사를 정상화시킨다.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 업체들과의 긴밀한 제휴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는 당시 벤처기업에 머물렀던 마이크로소프트와 노벨, 시스코 시스템즈 등을 발굴했다. 「PC계의 천재」라고 불린 아스키의 니시 카즈히코와[9] 대비되어 「PC계의 신동」이라고 불리던 시기도 있었다. 또 80년대에는 니시 카즈히코가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고 불렸지만, 90년대 이후에는 이 호칭이 손정의에게 넘어간다.
90년대 들어선 기존 사업에서 더 나아가 공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M&A를 통해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다. 투자가는 아니지만 아시아의 워렌 버핏이라 불릴 정도로 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투자한 기업들은 다음과 같다.
- 야후: 초창기 투자
- 알리바바: 초창기 투자[10]
- 슈퍼셀: 2013년 15억 달러에 지분 51% 그리고 2015년 22% 추가 지분 인수 후 2016년 텐센트에 약 73억 달러에 판매했다.[11]
이 외에도 한국 기업인 쿠팡 등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스타트업 기업에게 막대한 투자를 하는 중이며, 향후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꼭 필요한 기업은 조금 무리를 하고서라도 인수하는 편이다. 그 중 성공적 인수는 바로 2006년 이뤄진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전신인 보다폰 재팬이며, 현재는 더 큰 미국 모바일 시장 석권을 위해 업계 3위인 스프린트 코퍼레이션을 인수하여 열심히 달리는 중이다. 다만 T-모바일과의 인수합병이 틀어지고 실적이 나빠지는 등 2010년대 기준으론 고전 중이다(...).
1990년대~2천년대 초반 IT버블 때는 자산이 100억 달러를 훌쩍 넘으며 일본최고갑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허나 버블 붕괴 후 11억 달러까지 줄어들었다 후에 19억 달러로 다시 늘어났다. 붕괴 당시엔 시가총액의 90% 이상이 증발한 셈인데(...)[12]
2010년 6월 15일, 소프트뱅크 30주년을 맞는 주주총회에서 '소프트뱅크 향후 30주년 비전 발표회'가 있었다. 손정의의 철학과 소프트뱅크의 역사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 마사요시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발표이기에 관심있는 위키니트들은 일독을 권한다. 소프트뱅크 향후 30주년 비전 발표 영상, 이후 책으로도 나왔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이 터지며 연쇄적으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에서 원전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탈 원전 구상을 내놓고 태양광발전 등 자연에너지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공익과 부합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손 마사요시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간 나오토 총리가 탈 원전 선언을 하면서 마사요시의 탈 원전 구상도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 5월 31일 KT 이석채 회장과 함께 일본기업 전산 데이터들을 부산 근교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정확히는 김해시 구산동의 KT 연수원. 김해공항 등 교통시설에 주목한 듯하다.
2011년 9월 15일부터 중앙일보에서 창간 46주년을 기념하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손 마사요시의 삶과 소프트뱅크의 성장기에 대하여 일정기간 연재하였다.
2014년 기준으로 소프트뱅크의 주식 19.26%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일본내에서도 손꼽히는 자산가로 알려져있다. 포브스에서 조사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2014년에는 일본 2위, 전 세계 45위. 그리고 2014년 9월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가 19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돌풍을 일으키며 데뷔하면서 일본최고갑부의 자리(약 17조 2천억)에 다시 오르기도 했다. 2000년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과 만난 후 소프트뱅크가 2000만 달러(약 207억원)를 알리바바에 투자하도록 결정했는데 14년만에 엄청난 수익을 올린 셈이다.
2014년에 34억 달러를 들여 드림웍스를 매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했고, 대신 레전더리 픽처스에 2억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참고로 여긴 영화 인터스텔라를 만든 곳이다.
4. 트리비아
- 소프트뱅크를 창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년에 간염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이를 이겨낸 적도 있다. 이때 그는 다독과 함께 아이들의 미소를 보며 병마를 이겨냈는데, 때문에 병을 완치한 이후 그는 사업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이 아이들의 미소를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이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사업의 1순위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 상술된 투병 도중 읽은 손자병법에서 엄선한 14개 문자에 본인이 직접 창조한 11개 문자를 조합한 25개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사업 전략인 '제곱법칙'이란게 있다. 어록이 흔히 그렇듯 얼핏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가 2010년 다음 세대 경영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개교식 특별 강의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그에겐 나름 가치가 있는 문장인 모양이다.#
- 한 트위터리안이 그의 대머리를 두고 '머리카락의 후퇴가 심각하다'는 드립을 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머리카락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는 비범한 트윗을 올려 약 4만건의 리트윗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손 마사요시는 자신의 트위터 어카운트에 자사에 대한 소식들, 소프트뱅크와 관련된 여러 트윗들에 대한 리트윗들, 그리고 명대사급이거나 상당히 비범한 트윗들을 자주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올린다. 트윗이 올라갈 때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건 물론, 일본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무려 250만(!)이 넘는 팔로워들이 있으니 한번 방문해보자. 손 마사요시의 트위터.
- 만화 "정의는 나의 것"의 등장인물 스미코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스미코 曰 "내가 존경할만한 사람은 손마사요시 뿐이야".
-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 한명인 사카모토 료마빠로 알려져있다. 발표회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의 피해복구를 위해 일본 적십자사에 100억엔을 기부했다. 일본 적십자사가 모은 지진구호기금이 700억엔 정도라고 하는데 손 마사요시 혼자서 1/7을 책임진 셈. 그리고 상술했듯 손 회장은 이후 탈원전을 기치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 2011년 일본의 모 여론조사 기관에서 실시한 '일본 연예인, 유명인 중 총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 조사에서 15.8%의 지지를 받아 2위로 뽑히기도 했다. 1위는 18%를 받은 코미디언 겸 영화감독 기타노 타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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