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2일 금요일

노벨상 대국 일본의 힘, 100년 이어온 '국내파들의 師事'

노벨 과학상 올해까지 23명, 2000년대 들어 매년 1명꼴… 日 열도의 무시무시한 學脈
 

동양권에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온 나라는 일본·중국·인도다. 이 중 맥을 잇는 곳은 일본뿐이다. 인도는 1930년 수상 후 후계자가 없다. 대만을 포함한 중국은 1957년 재미(在美) 과학자의 공동 수상 이래 2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일본은 1949년 첫 수상 이후 올해까지 23명째다. 20세기 후반기 업적을 바탕으로 2000년대 이후에만 18명이 받았다. 21세기 들어 압도적 1위인 미국의 다음 자리를 두고 영국과 경쟁하고 있다.

일본의 약진은 근본적으로 과학의 진보가 근대화와 함께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육 시설이 충분했고 후발 국가로선 비교적 많은 자본이 과학에 투입됐다. 하지만 사제(師弟) 관계와 국내 연구 거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맥(學脈)이 없었다면 패전과 장기 불황 속에서 동력을 잃었을 것이다. 일본과 연구 문화가 비슷한 한국이 참고할 만한 특징이다.

◇노벨상 수상 이전(以前)일본의 첫 수상자는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였다. 그는 국내파다. 모든 학위를 일본에서 받았다. 수상작인 '중간자' 논문을 발표한 1935년까지 유학도 안 했다. 국내에서 첨단 연구 논문을 읽었고 국내외 최고 학자에게 배웠다. 세계 수준의 연구 환경이 20세기 초 일본 국내에 조성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에서도 스승으로 섬기는 것을 '사사(師事)한다'고 한다. 유카와는 일본 근대 물리학의 계보에서 '야마카와→나가오카→니시나'를 계승한다. 야마카와 겐지로는 국가가 유학을 보냈다. 그의 임무는 미국의 물리학을 도쿄대에 이식하는 일이었다. 그가 귀국한 게 1875년이다. 야마카와는 제자 나가오카 한타로를, 나가오카는 제자 니시나 요시오를 유럽으로 보냈다. 이들은 유럽의 소립자 물리학과 자유로운 연구 풍토를 일본에 이식했다. 유카와가 성장했을 때 근대 물리학은 일본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유카와는 이런 풍토에서 성장해 노벨상을 받았다. 학맥으론 4대째, 1대의 귀국 후 74년째 되는 시기였다.

일본의 힘만으로 성과를 낸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 연구자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해 지식을 나눠준 세계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어니스트 로렌스. 모두 노벨상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수상은 1921년 그가 일본행 배를 타고 있을 때 발표됐다. 그는 과학 열풍을 일본에 선물했다. 이들이 일본을 도운 것은 초기 일본 유학생들이 보여준 학문적 호기심과 성실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이후(以後)2008년 유학은커녕 해외여행도 한 적 없는 일본 학자가 노벨상을 받았다. 영어도 못했다. 물리학자 마스카와 도시히데였다. 한국에서 화제를 모은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지방대인 나고야대를 나왔다는 점이었다. 나고야대는 지방에 있으나 명문 국립대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 23명을 배출한 일본 11개 대학은 모두 국립대다. 도쿄 바깥 대학에서 17명이 나왔다. 교토대만 7명이다.



일본 국립대의 수준을 말해주지만 꼭 국립대라서 수상자를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우수한 학맥이 국립대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스카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2008년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인은 3명이다. 2명이 나고야대 출신이다. 그들이 사사한 스승은 교토대 출신의 물리학자로 유카와의 직계 제자였다. 대학이 아니라 유카와의 학맥이 노벨상 수상자 2명을 더 배출했다. 이런 학맥이 일본 대학에 수많은 가지를 치고 세계적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의학상 수상이 늦은 이유일본의 화학상은 유카와의 첫 수상 이후 32년, 생리학·의학상은 38년 만에 나왔다. 하지만 일본 의학의 계보는 물리학이나 화학보다 화려했다.

의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는 1회 노벨 생리학·의학상 후보에 올랐다. 공동 연구자인 독일의 베링에게만 상이 돌아갔으나 그가 설립한 기타사토대학 연구실에서 114년 후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일본 의학계의 전설인 노구치 히데요는 아홉 번 후보로 추천됐다.

이런 학맥은 일본 의학계의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단절 위기를 겪었다. 인간 생체 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교토대 의학자였다. 교토대 의학부는 조직적으로 그에게 의사를 공급했다. 이들은 패전 후 연구 데이터를 들고 미국과 거래해 전원 면책받았다. 그때 면책받은 나이토 료이치는 이시이의 대학 후배이자 군대 부하였다. 훗날 그는 제약사를 차려 혈우병 제제를 개발했다. 이 약이 일본인 1800명을 에이즈에 감염시켰다. 그중 600여 명이 숨졌다고 한다.

일본 의학계는 윤리적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채 1987년 이후 노벨상 수상자 5명을 배출했다. 올해 수상자를 비롯해 2명이 교토대 출신이다. 한국이 염원하던 줄기세포 분야의 첫 노벨상 수상자도 교토대 의학 연구실에서 나왔다. 이들의 학맥은 이시이와 직접 연관이 없다. 인류 건강에 큰 기여를 한 연구자들이다.
[연구의 다른 한 축, 日기업들]
2002 화학상 수상자는 학사 출신 회사원
IBM이 빼온 소니 연구원, 1973년 물리학상

일본인 수상자는 종종 한국에서도 화제를 모은다. 그중 2002년 화학상 수상자 다나카 고이치는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는 학사(學士) 출신이다. 국립 명문인 도호쿠대 전기공학과를 나왔으나 독일어를 낙제해 1년 유급했다. 노벨상 수상 당시 그는 교토의 지방 기업 시마즈제작소의 부장급 연구원이었다. 그의 업적(단백질 질량 분석법)은 수상 17년 전인 1985년 회사 연구실에서 나왔다. 입사 2년 차,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이때 그가 받은 보상금은 1만엔이었다고 한다.

1973년 세 번째 물리학상 수상자인 에사키 레오나가 반도체 터널 효과를 발견한 것도 1957년 도쿄통신공업(현 소니)에서였다. 하지만 소니도 제때 가치를 알지 못했다. 에사키는 능력을 알아본 미국 IBM에 스카우트됐다.

도쿠시마에서 자란 나카무라 슈지(2014년 노벨 물리학상)가 1993년 노벨상 업적인 고휘도 LED를 개발한 곳 역시 도쿠시마 지방 기업 니치아화학공업이었다. 이 성과는 대단히 실용적이어서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안겼다. 이때 특허를 놓고 훗날 나카무라는 회사와 치열한 소송전을 벌였다.

이들 수상은 학맥과 무관하다. 가치를 몰라보고 보상에 인색한 측면이 있으나 이들의 경우는 세계적 연구 거점으로서 일본 제조업의 실력을 보여준다.
☞일본의 노벨상
노벨 과학상을 받은 일본인 23명 중 2명은 수상 당시 미국 국적자였다. 일본은 일반적으로 이들을 일본 수상자로 분류한다. 학맥과 연구가 상당 부분 일본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008년 수상자인 난부는 일본에서 성과를 축적해 도미(渡美)했다. 유년기에 영국으로 가 영어로 소설을 쓴 2017년 문학상 수상자 이시구로는 일본인 수상자로 꼽지 않는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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