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로 원장은 “방글라데시에서 25년간 저 혼자 이룬 일은 없어요. 현지인들과 후원자들, 가족이 함께 수고해준 덕분”이라며 이렇게 살인 미소를
지었다.
전남대
의대 83학번 이석로씨는 키가 153㎝였다.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면제 판정을 받았다. 여느 청년처럼 '3년 벌었다'며 계산기를 두드리진 않았다.
광주기독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딴 1994년, 그는 방글라데시 코람톨라 병원 의사 모집에
지원했다.
"남들이 군 복무 하는 기간만큼 의료 봉사를 하고 싶었어요."
방글라데시는 가난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다. 떠난 지 25년, 그는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 정몽준)은 25년간 빈민을 치료하고 열악한 의료 환경을 개선한 공로로 이석로(55) 코람톨라 병원 원장에게 아산상 대상(상금 3억원)을 수여했다. 대학교수나 개업의가 아닌 제3의 길로 걸어간 키 작은 의사는 이제 '방글라데시의 슈바이처'라 불린다.
시상식이
열린 지난달 25일 서울에 한파주의보가 발령됐다. 이석로 원장은 "이런 추위는 오랜만이네요. 방글라데시에선 더운 게 불편한데…" 하며 웃었다.
"가난한 사람들 틈에 살다 보니 그들의 가치 기준과 내 가치 기준이 부딪치곤 했어요. 그 과정에서 깨달았지요. 내가 학벌이나 직업, 돈 같은
거죽에 갇혀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구나. 방글라데시에 살면서 겉치레를 다 버렸어요.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는 동안 제 인생을
고쳤습니다."
가성비 좋은 병원
그는 3남 2녀 중 둘째다. 시장에서 막노동하던 부모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학업만큼은 지지했다. "큰아들 의대 보내놓고 '이제 덕 좀 보려나' 하신 부모님에게 '방글라데시에서 3년만 살아본다' 해놓곤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이 상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왜 의사가 됐습니까.
"공대에 가고 싶었는데 간호사인 누나의 조언으로 생각지도 않던 의대에 진학했어요. 그래서 좀 방황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던 시대였지요. 친구들은 거리에 있는데 나는 왜 도서관에서 공부해야 하나 자문하곤 했어요."
―코람톨라 병원에 지원할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의사의 길은 사실 그때도 정해져 있었어요. 공부 잘해 대학교수가 되거나 개업해 돈을 벌거나. 인생이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다른 길은 없는지 고민하다 모집 공고를 봤어요. 방글라데시는 광주기독병원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한 미국인 의사 카딩턴이 더 소외된 사람들을 도우러 간 곳이기도 했습니다. 병역을 면제받았으니 남이 겪지 않는 일을 좀 해보자 마음먹었지요."
―결혼해 18개월 된 아이도 있었는데.
"내색은 안 해도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빈정거린 친구도 있었겠지요. 막연하지만 3년 동안 의사로서 진정한 삶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어요. 아내가 지지해줬습니다."
이날 이석로 원장은 아내 김진영씨와 함께 인터뷰 자리에 왔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남편을 정말로 지지했는지 묻자 "3년이라니까" 하며 미소를 지었다.
―넉넉하고 여유가 있어야 봉사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진 게 많으면 더 못 해요. 지키기 바쁘지요. 부족한 사람 눈에 뭐가 부족한지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저를 도운 후원자도 대체로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었어요. 부자는 남이 보기에 거액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더 못하는 거예요."
―코람톨라 병원은 어떤 곳이었나요.
"한국 기독교 병원 연합 단체 콤스(KOMMS)가 1992년에 설립했어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북동쪽, 자동차로 2시간 걸립니다. 빈민촌이고 근처에 병원이 하나도 없었어요. 건강보험도 없고 진료비도 비싸니 가난한 사람은 민간 처방에 의지하다 병을 키우곤 했지요."
―날씨며 음식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힘들기보다는 재미있는 게 많았어요. 외국 여행 가서 언어도 배우는 기분이랄까(웃음).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호의적이라 친밀감이 느껴졌고요."
―그들은 가난한데 왜 그렇게 행복한가요.
"너나없이 가난하니까 욕구가 과하지 않아요. 한국인은 가진 게 충분히 많아도 남과 비교하면서 불행해지잖아요. 방글라데시도 최근엔 많이 변하고 있어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형편은 나아지고 휴대폰도 생겼는데 불평불만이 더 늘어나는 것 같아요."
―'가성비 좋은 병원'으로 통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후원금이 있으니까 진료비를 10분의 1만 받았어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무료로 치료하고 수술했지요. 그 나라 병원에선 접수비와 진찰비를 따로 내는 게 관행이에요. 진찰비는 의사가 가져갑니다. 의료 장비가 있는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보내면 또 검사비의 절반을 상납해요."
"남들이 군 복무 하는 기간만큼 의료 봉사를 하고 싶었어요."
방글라데시는 가난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다. 떠난 지 25년, 그는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 정몽준)은 25년간 빈민을 치료하고 열악한 의료 환경을 개선한 공로로 이석로(55) 코람톨라 병원 원장에게 아산상 대상(상금 3억원)을 수여했다. 대학교수나 개업의가 아닌 제3의 길로 걸어간 키 작은 의사는 이제 '방글라데시의 슈바이처'라 불린다.
가성비 좋은 병원
그는 3남 2녀 중 둘째다. 시장에서 막노동하던 부모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학업만큼은 지지했다. "큰아들 의대 보내놓고 '이제 덕 좀 보려나' 하신 부모님에게 '방글라데시에서 3년만 살아본다' 해놓곤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이 상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왜 의사가 됐습니까.
"공대에 가고 싶었는데 간호사인 누나의 조언으로 생각지도 않던 의대에 진학했어요. 그래서 좀 방황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던 시대였지요. 친구들은 거리에 있는데 나는 왜 도서관에서 공부해야 하나 자문하곤 했어요."
―코람톨라 병원에 지원할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의사의 길은 사실 그때도 정해져 있었어요. 공부 잘해 대학교수가 되거나 개업해 돈을 벌거나. 인생이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다른 길은 없는지 고민하다 모집 공고를 봤어요. 방글라데시는 광주기독병원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한 미국인 의사 카딩턴이 더 소외된 사람들을 도우러 간 곳이기도 했습니다. 병역을 면제받았으니 남이 겪지 않는 일을 좀 해보자 마음먹었지요."
―결혼해 18개월 된 아이도 있었는데.
"내색은 안 해도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빈정거린 친구도 있었겠지요. 막연하지만 3년 동안 의사로서 진정한 삶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어요. 아내가 지지해줬습니다."
이날 이석로 원장은 아내 김진영씨와 함께 인터뷰 자리에 왔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남편을 정말로 지지했는지 묻자 "3년이라니까" 하며 미소를 지었다.
―넉넉하고 여유가 있어야 봉사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진 게 많으면 더 못 해요. 지키기 바쁘지요. 부족한 사람 눈에 뭐가 부족한지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저를 도운 후원자도 대체로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었어요. 부자는 남이 보기에 거액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더 못하는 거예요."
―코람톨라 병원은 어떤 곳이었나요.
"한국 기독교 병원 연합 단체 콤스(KOMMS)가 1992년에 설립했어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북동쪽, 자동차로 2시간 걸립니다. 빈민촌이고 근처에 병원이 하나도 없었어요. 건강보험도 없고 진료비도 비싸니 가난한 사람은 민간 처방에 의지하다 병을 키우곤 했지요."
―날씨며 음식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힘들기보다는 재미있는 게 많았어요. 외국 여행 가서 언어도 배우는 기분이랄까(웃음).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호의적이라 친밀감이 느껴졌고요."
―그들은 가난한데 왜 그렇게 행복한가요.
"너나없이 가난하니까 욕구가 과하지 않아요. 한국인은 가진 게 충분히 많아도 남과 비교하면서 불행해지잖아요. 방글라데시도 최근엔 많이 변하고 있어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형편은 나아지고 휴대폰도 생겼는데 불평불만이 더 늘어나는 것 같아요."
―'가성비 좋은 병원'으로 통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후원금이 있으니까 진료비를 10분의 1만 받았어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무료로 치료하고 수술했지요. 그 나라 병원에선 접수비와 진찰비를 따로 내는 게 관행이에요. 진찰비는 의사가 가져갑니다. 의료 장비가 있는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보내면 또 검사비의 절반을 상납해요."
―일종의
소개비군요.
“저는 봉사하러 왔으니 그걸 안 받겠다고 했어요. 같은 검사를 했는데 비용이 달라지자 시끄러워졌지요. 환자를 다른 병원에 보내지 않으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검사를 늘려야 했습니다. 저렴하다고 소문이 나 환자는 계속 불어났지요.”
약속한 3년이 지났다. 그는 정상을 앞에 두고 하산할 수 없는 등반가처럼 “병원이 자립할 때까지 2년만 더 해보자”고 했다. 왜 말리지 않았는지 아내에게 묻자 또 이렇게 답했다. “2년이라니까(웃음).”
자기 연봉 깎아 외과 의사 충원
가난한 나라에서는 진료가 좀 달라진다. 환자에게 약값이 없기 때문이다. “검사도 정말 필요한지 자문합니다. 환자보다 병원 수익에 더 이롭다면 하지 말아야죠.” 환자 중심으로 판단해 과잉 진료가 없다는 뜻이다.
―귀국하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나요.
“돌아오면 개업해야 하는데 확신이 없었어요. 평범한 의사의 길을 간다면 나중에 은퇴하고 남는 게 뭘까. 망하지 않는다면 건물 하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과연 그게 행복할까 싶고. 환자가 밀려드는데 나 몰라라 떠날 순 없었지요.”
―결핵 환자에겐 ‘치료 보증금’을 받았다고요?
“가난한 나라엔 결핵이 흔해요.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줘도 증상이 가라앉으면 병원에 오질 않아요. 결핵은 치료를 중단하면 100% 재발합니다. 환자에게 먼저 보증금으로 1000타카(약 1만4000원)를 받고 ‘완치해야 돌려준다’고 했더니 저항감이 크지 않았고 완치율도 높아졌어요.”
―현지 상황은 얼마나 열악했습니까.
“정전이 잦아 촛불 켜고 진료하곤 했어요. 경운기 발전기를 제가 개조해 비상 전력을 마련했습니다(웃음). 초기에는 혼자서 진료와 마취, 간단한 수술까지 도맡았지요. 틈틈이 공부하면서 방사선과와 마취과 기술을 배웠어요. 빈민에게 ‘수술해야 한다’고 말하면 선택은 둘 중 하납니다. 전 재산 팔아 수술받거나 안 받고 죽거나. 그들에게는 약이 아니라 수술, 즉 외과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외과 의사를 구하려고 연봉을 자진 삭감했다면서요?
“제 연봉이 4만달러였어요. KOMMS가 3만달러만 직접 주고 1만달러는 퇴직금처럼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생을 고치고 있으니 내 퇴직금은 필요 없다. 2만달러만 받을 테니 나머지 2만달러로 외과 의사를 보내달라’고 제가 제안했지요. 그분이 2002년에 오시면서 병원이 더 성장했습니다. 2009년엔 안과를 개설했어요. 눈이 안 보여도 숙명이겠거니 하고 살던 가난한 사람 얼굴이 백내장 수술 후 환해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지인들과 갈등은 없었나요.
“저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까지 10년쯤 걸린 것 같아요. 언젠가 떠날 사람이잖아요. ‘코람톨라 병원이 자립하려면 수익을 병원에 재투자해야 한다’고 저는 주장했어요.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 현지인들과 갈등이 생겼지요. 싸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악함도 보고 제 부족함도 절감했어요. 미국 후원 단체가 ‘이석로가 철수하면 후원을 끊겠다’고 하면서 결국 2003년부터 병원을 제가 책임지게 됐습니다. 의료 장비를 구입하고 진료비도 올렸지만 여전히 현지 병원의 3분의 1 수준이에요.”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까.
“한국은 이미 시스템이 굳어져 의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무료로 진료하고 싶어도 불법이 되잖아요. 소신을 밀어붙이다 큰일이 날 수도 있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입술 갈림증(언청이) 아이를 수술했는데 다음 날 갑자기 숨졌어요. 그런데 부모가 ‘이런 무료 수술이 지속되길 바란다. 아이를 돌봐줘 감사하다’고 하는 겁니다. 의료 행위가 누군가를 만족시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그 모습에서 어떤 지향점을 발견했어요. 병원이 지역사회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봉사하러 왔으니 그걸 안 받겠다고 했어요. 같은 검사를 했는데 비용이 달라지자 시끄러워졌지요. 환자를 다른 병원에 보내지 않으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검사를 늘려야 했습니다. 저렴하다고 소문이 나 환자는 계속 불어났지요.”
약속한 3년이 지났다. 그는 정상을 앞에 두고 하산할 수 없는 등반가처럼 “병원이 자립할 때까지 2년만 더 해보자”고 했다. 왜 말리지 않았는지 아내에게 묻자 또 이렇게 답했다. “2년이라니까(웃음).”
자기 연봉 깎아 외과 의사 충원
가난한 나라에서는 진료가 좀 달라진다. 환자에게 약값이 없기 때문이다. “검사도 정말 필요한지 자문합니다. 환자보다 병원 수익에 더 이롭다면 하지 말아야죠.” 환자 중심으로 판단해 과잉 진료가 없다는 뜻이다.
―귀국하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나요.
“돌아오면 개업해야 하는데 확신이 없었어요. 평범한 의사의 길을 간다면 나중에 은퇴하고 남는 게 뭘까. 망하지 않는다면 건물 하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과연 그게 행복할까 싶고. 환자가 밀려드는데 나 몰라라 떠날 순 없었지요.”
―결핵 환자에겐 ‘치료 보증금’을 받았다고요?
“가난한 나라엔 결핵이 흔해요.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줘도 증상이 가라앉으면 병원에 오질 않아요. 결핵은 치료를 중단하면 100% 재발합니다. 환자에게 먼저 보증금으로 1000타카(약 1만4000원)를 받고 ‘완치해야 돌려준다’고 했더니 저항감이 크지 않았고 완치율도 높아졌어요.”
―현지 상황은 얼마나 열악했습니까.
“정전이 잦아 촛불 켜고 진료하곤 했어요. 경운기 발전기를 제가 개조해 비상 전력을 마련했습니다(웃음). 초기에는 혼자서 진료와 마취, 간단한 수술까지 도맡았지요. 틈틈이 공부하면서 방사선과와 마취과 기술을 배웠어요. 빈민에게 ‘수술해야 한다’고 말하면 선택은 둘 중 하납니다. 전 재산 팔아 수술받거나 안 받고 죽거나. 그들에게는 약이 아니라 수술, 즉 외과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외과 의사를 구하려고 연봉을 자진 삭감했다면서요?
“제 연봉이 4만달러였어요. KOMMS가 3만달러만 직접 주고 1만달러는 퇴직금처럼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생을 고치고 있으니 내 퇴직금은 필요 없다. 2만달러만 받을 테니 나머지 2만달러로 외과 의사를 보내달라’고 제가 제안했지요. 그분이 2002년에 오시면서 병원이 더 성장했습니다. 2009년엔 안과를 개설했어요. 눈이 안 보여도 숙명이겠거니 하고 살던 가난한 사람 얼굴이 백내장 수술 후 환해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지인들과 갈등은 없었나요.
“저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까지 10년쯤 걸린 것 같아요. 언젠가 떠날 사람이잖아요. ‘코람톨라 병원이 자립하려면 수익을 병원에 재투자해야 한다’고 저는 주장했어요.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 현지인들과 갈등이 생겼지요. 싸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악함도 보고 제 부족함도 절감했어요. 미국 후원 단체가 ‘이석로가 철수하면 후원을 끊겠다’고 하면서 결국 2003년부터 병원을 제가 책임지게 됐습니다. 의료 장비를 구입하고 진료비도 올렸지만 여전히 현지 병원의 3분의 1 수준이에요.”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까.
“한국은 이미 시스템이 굳어져 의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무료로 진료하고 싶어도 불법이 되잖아요. 소신을 밀어붙이다 큰일이 날 수도 있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입술 갈림증(언청이) 아이를 수술했는데 다음 날 갑자기 숨졌어요. 그런데 부모가 ‘이런 무료 수술이 지속되길 바란다. 아이를 돌봐줘 감사하다’고 하는 겁니다. 의료 행위가 누군가를 만족시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그 모습에서 어떤 지향점을 발견했어요. 병원이 지역사회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냐”
이석로 원장 부부는 공동체를 일으키는 일에도 사랑을 쏟았다. 교육 기회를 잡기 어려운 여성을 위해 간호 학교(3년제 무료)를 설립했고,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지 않도록 청년 장학 사업도 하고 있다. 단 장학금은 학비의 49%만 지원한다. 아내는 빈민가에서 무료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왜 학비의 49%만 지원합니까.
“100%를 다 주면 그 가치가 훼손되니까요. 51%는 스스로 마련하라는 뜻입니다. 무차별적으로 평등하게 도우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걸 그곳에서 배웠어요. 릭샤(인력거)를 사서 ‘10개월간 나눠 갚으면 된다’며 빈민에게 대여해준 적이 있어요. 대부분 팔아먹거나 잃어버리고 10명 중 1명만 성공하더군요. 자립하려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아요. 어디까지 도와줘야 하고 언제는 도움을 안 줘야 하는지 늘 고민합니다. ‘가족과 공동체가 당신을 돕지 않는데 왜 나는 당신을 도와야 하느냐’며 때론 외면하고요.”
―방글라데시에 비하면 한국은 파라다이스(천국)에 가깝군요.
“한국은 지난 25년간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는데 정신적으로는 거꾸로 불안해진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마음에 여유가 없고 불친절해지고 화도 잘 내고요.”
―다 같이 가난한 시절에는 서로 도우며 살았는데.
“이제 국가에 다 맡겨놓고 ‘나는 안 해도 된다’로 흐르는 것 같아요. 사실 세금을 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직접 봉사하는 게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요. 지금 세금을 지원받는 사람들은 나라가 아니라 이웃이 돕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요.”
―지난 3월에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상금 5000만원)을 받곤 수상 소감으로 ‘돈이 진짜 필요했다’고 말했지요?
“병상이 부족해 환자를 바닥에 눕히고, 수술 환자를 장정 넷이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어요. 봄에 받은 상금으로는 수술실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언젠가 되겠지 하고 기둥만 박아 놓았는데 이번 아산상 상금으로 설치하고 입원실도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바르게 쓰기가 더 어려워요. (가족에겐 떡고물도 없냐고 묻자 아내를 향해) 뭐 먹고 싶은데? 하하하.”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 있습니까.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방글라데시에서 빈민들과 살다 보니 뭐랄까, 제 몸을 감싸고 있던 옷과 가면이 다 벗겨졌어요. 그제야 제 내면을 보았습니다. 한국에선 경제적 안정을 기대하며 의대에 지원하는 학생이 많다지요. 그런데 헬렌 켈러도 말했지만, 인생은 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글라데시로 가는 건 제게도 모험이었어요.”
―성공 기준을 너무 세속적이고 획일적으로 잡는 경향이 있지요.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게 성공이라면 결국 없어질 안개와 같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면을 살찌우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학벌이나 직업, 돈이 변변찮아도 사람은 내면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상태로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게 행복이에요.”
―자녀들(2남 1녀)은 거기서 보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아이들에게는 기름진 음식이나 좋은 교육 환경이 중요하진 않아요. 부모와 함께 열악한 조건에서 어려움을 극복해본 경험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가지지 않은 것에서 자유롭고요. 딸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맡은 역할에 긍지를 느끼는 것 같아요.”
―의료 봉사를 하며 얻은 깨달음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봉사를 받고 또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지금 입고 있는 옷, 오늘 먹을 음식도 누군가 수고해 만든 것입니다. 자기 문제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 문제를 볼 수 있다면 봉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봉사를 하면서 불필요한 데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됐어요.”
코람톨라 병원은 이제 의사 14명(한국인 3명)이 근무하며 하루에 외래 환자 약 300명을 돌보는 종합 병원(50병상)으로 성장했다. 다시 서른 살로 돌아간다면 방글라데시로 갈 것인지 묻자 이석로 원장은 “살던 세계를 떠나 다른 경험을 하면서 본질을 깨달을 때가 있다”며 “어디든 내가 필요한 곳에서 사람을 섬기며 살 것”이라고 했다. 키 작은 의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다 삶에 대한 처방전을 받아 온 사람처럼 보였다. 조선일보
이석로 원장 부부는 공동체를 일으키는 일에도 사랑을 쏟았다. 교육 기회를 잡기 어려운 여성을 위해 간호 학교(3년제 무료)를 설립했고,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지 않도록 청년 장학 사업도 하고 있다. 단 장학금은 학비의 49%만 지원한다. 아내는 빈민가에서 무료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왜 학비의 49%만 지원합니까.
“100%를 다 주면 그 가치가 훼손되니까요. 51%는 스스로 마련하라는 뜻입니다. 무차별적으로 평등하게 도우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걸 그곳에서 배웠어요. 릭샤(인력거)를 사서 ‘10개월간 나눠 갚으면 된다’며 빈민에게 대여해준 적이 있어요. 대부분 팔아먹거나 잃어버리고 10명 중 1명만 성공하더군요. 자립하려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아요. 어디까지 도와줘야 하고 언제는 도움을 안 줘야 하는지 늘 고민합니다. ‘가족과 공동체가 당신을 돕지 않는데 왜 나는 당신을 도와야 하느냐’며 때론 외면하고요.”
―방글라데시에 비하면 한국은 파라다이스(천국)에 가깝군요.
“한국은 지난 25년간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는데 정신적으로는 거꾸로 불안해진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마음에 여유가 없고 불친절해지고 화도 잘 내고요.”
―다 같이 가난한 시절에는 서로 도우며 살았는데.
“이제 국가에 다 맡겨놓고 ‘나는 안 해도 된다’로 흐르는 것 같아요. 사실 세금을 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직접 봉사하는 게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요. 지금 세금을 지원받는 사람들은 나라가 아니라 이웃이 돕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요.”
―지난 3월에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상금 5000만원)을 받곤 수상 소감으로 ‘돈이 진짜 필요했다’고 말했지요?
“병상이 부족해 환자를 바닥에 눕히고, 수술 환자를 장정 넷이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어요. 봄에 받은 상금으로는 수술실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언젠가 되겠지 하고 기둥만 박아 놓았는데 이번 아산상 상금으로 설치하고 입원실도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바르게 쓰기가 더 어려워요. (가족에겐 떡고물도 없냐고 묻자 아내를 향해) 뭐 먹고 싶은데? 하하하.”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 있습니까.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방글라데시에서 빈민들과 살다 보니 뭐랄까, 제 몸을 감싸고 있던 옷과 가면이 다 벗겨졌어요. 그제야 제 내면을 보았습니다. 한국에선 경제적 안정을 기대하며 의대에 지원하는 학생이 많다지요. 그런데 헬렌 켈러도 말했지만, 인생은 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글라데시로 가는 건 제게도 모험이었어요.”
―성공 기준을 너무 세속적이고 획일적으로 잡는 경향이 있지요.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게 성공이라면 결국 없어질 안개와 같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면을 살찌우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학벌이나 직업, 돈이 변변찮아도 사람은 내면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상태로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게 행복이에요.”
―자녀들(2남 1녀)은 거기서 보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아이들에게는 기름진 음식이나 좋은 교육 환경이 중요하진 않아요. 부모와 함께 열악한 조건에서 어려움을 극복해본 경험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가지지 않은 것에서 자유롭고요. 딸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맡은 역할에 긍지를 느끼는 것 같아요.”
―의료 봉사를 하며 얻은 깨달음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봉사를 받고 또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지금 입고 있는 옷, 오늘 먹을 음식도 누군가 수고해 만든 것입니다. 자기 문제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 문제를 볼 수 있다면 봉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봉사를 하면서 불필요한 데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됐어요.”
코람톨라 병원은 이제 의사 14명(한국인 3명)이 근무하며 하루에 외래 환자 약 300명을 돌보는 종합 병원(50병상)으로 성장했다. 다시 서른 살로 돌아간다면 방글라데시로 갈 것인지 묻자 이석로 원장은 “살던 세계를 떠나 다른 경험을 하면서 본질을 깨달을 때가 있다”며 “어디든 내가 필요한 곳에서 사람을 섬기며 살 것”이라고 했다. 키 작은 의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다 삶에 대한 처방전을 받아 온 사람처럼 보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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