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3일 금요일

독감 예방 접종해도… 홍역 앓고나면 효과 사라져요


美 연구진, 어린이·동물 항체 분석… 홍역 감염 후 항체 최대 73% 파괴
병원체 기억하고 항체 생성 돕는 기억세포 파괴하고 성장 방해
백신 맞았거나 겪은 질병도 감염

날씨가 추워지면서 인플루엔자(독감) 예방접종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예방접종을 하면 우리 몸에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에 실제로 공격받았을 때 이를 퇴치할 항체를 만들어 방어할 수 있지요. 몸의 '기억세포'가 상당 기간 해당 병원체를 막을 방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죠. 그런데 최근 홍역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몸의 항체와 기억세포가 사라져 면역력이 약해진다는 연구가 나왔습니다. 홍역 바이러스가 우리 면역체계를 '기억상실'에 빠지게 한다는 거죠. 스마트폰을 '공장초기화'하면 안에 담긴 내용이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항체 파괴하는 홍역 바이러스

지난 10월 미국과 영국·네덜란드 공동 연구팀이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했어요. 홍역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하면 기존에 알려진 홍역 증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체내에 형성돼 있던 다른 항체들을 파괴한다는 것이었지요. 항체는 우리 몸에 침입한 병원체에 달라붙어 침투를 막거나 죽이거나 백혈구가 먹어 치우기 좋게 표시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항체가 사라지면 그만큼 면역력이 약해지겠죠.
홍역 정리 그래픽
 /그래픽=안병현
마이클 미나 하버드대 교수가 주도한 연구팀은 홍역 집단 발병이 일어났던 지역의 어린이 110명의 혈액 속 항체를 분석했어요. 분석 결과, 홍역에 걸렸던 어린이들은 홍역을 앓고 난 뒤 항체가 11~73%까지 사라졌고, 백신 접종을 해 홍역에 걸리지 않은 아이들은 기존 항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확인됐어요.

연구진은 동물을 대상으로 이를 실험해봤어요. 레서스원숭이를 홍역에 감염시키고 5개월 동안 다른 병원체에 대한 항체를 관찰해봤죠. 역시 40~60%에 달하는 항체가 사라졌습니다. 인플루엔자 백신을 맞은 흰족제비에 홍역 바이러스를 감염시키자 백신으로 형성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항체가 크게 줄었습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흰족제비를 노출시키자 백신을 맞았음에도 매우 심한 인플루엔자 증상이 나타났어요.

기억세포 파괴돼 면역계 기억상실 일어나

이렇게 항체가 줄어든 데는 홍역 바이러스가 직접 항체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과거 만났던 병원체를 기억해 항체를 만들도록 돕는 기억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연구도 곧이어 나왔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공동 연구팀은 '사이언스 이뮤놀로지' 11월호에 이 같은 연구를 발표했죠.

연구진은 홍역 바이러스가 기억세포를 감염시킨다는 기존의 연구 결과에 착안하여 홍역에 걸렸던 네덜란드 어린이들의 혈액 속 기억세포를 분석해봤어요. 그 결과, 홍역 바이러스가 기억세포를 파괴하거나, 기억세포가 홍역만 기억하게 하거나, 기억세포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기억력이 없도록' 만든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홍역 바이러스가 기존에 획득했던 면역 기억을 손상시키는 일종의 기억상실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 결과, 제대로 항체를 만들지도 못하고요.

홍역 예방접종 하면 걱정 없어

홍역에 걸렸다가 나으면 다시는 홍역에 걸리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면역계가 축적해온 다른 질병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니까 안 걸리는 게 최선입니다.

방법은 뜻밖에 간단합니다. 홍역 예방주사를 맞으면 됩니다. 그럼 홍역에 안 걸리거든요. 사실 홍역은 백신 개발 전 세계적으로 매해 1억3000만 명이 감염됐던 전염병이었지만 백신이 보급되며 한 해 감염자가 3000만 명 정도로 줄었어요.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 백신 접종률이 낮아지면서 다시 여러 국가에서 발생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를 들으니 2019년 상반기 전 세계에서 발생한 홍역 감염은 2006년 이후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방심하지 말고 홍역 예방접종을 꼭 해야겠죠. 병원체를 기억하는 우리 기억세포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같은 소리를 하지 않게 하려면요.
[기억세포는 백혈구의 일종]
우리 몸은 한번 들어왔던 병원체를 어떻게 알고 구분할까요? 우리 면역계 대표 선수는 백혈구인데, 사실 여러 종류로 나뉩니다. 그중에서도 'B 림프구(B 세포)'가 병원체를 기억하고, 항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B 세포는 침입한 외부 병원체(항원)를 기억하고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수용체를 가지고 있거든요.

B 세포는 항체를 만드는 형질세포와 병원체를 기억하는 기억세포로 나뉩니다. B세포는 병원체를 인식하면 먼저 형질세포로 변신하고 급격히 수를 늘려서 항체라는 무기를 만들어냅니다. 항체는 침입자인 병원체에 달라붙어서 세포에 침투하는 걸 막거나, 병원체를 먹어 치우는 백혈구가 더 잘 알아봐 잡아먹도록 돕습니다. 항체는 병원체에 구멍을 뚫어 터져 죽게 만드는 과정도 돕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B 세포의 일부는 기억세포로 변신하죠. 기억세포는 말 그대로 침입한 병원체를 기억하는 세포입니다. 이 기억 덕분에 나중에 같은 녀석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2차 침입) 더욱 빨리 항체를 생산해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예방접종은 바로 이 기억세포를 활용해 면역체계를 강화합니다. 홍역 바이러스는 이 기억세포를 파괴하니까 문제인 거고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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