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도 되는 식의 '빨리빨리' 획일화 시대는 갔다
다가오는 AI시대는 결과보다 과정을 풀어낼 줄 아는 사고 능력이 중요해지는 시대
순수 우리말에 '내일'은 없지만 모레, 글피, 그글피란 말은 있다
늘 위기설 속에 살아온 한민족… 위기감이 오늘보다 나은 미래 불러
이어령(86) 전 문화부 장관이 다음 100년 우리 사회의 주축이 될 청년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전 장관과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가 문화·교육 분야에서 한국·한국인의 미래 과제를 이야기했다.
이어령(왼쪽) 전 문화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 서재에서 정과리 연세대 교수와 문화 분야를 주제로 한국의 미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북돋는 교육으로 청년 세대에게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늘 한국적인 것이 세계에 통하는 미래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100년을 준비하는 관점에서 우리 문화와 세계성(世界性)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어령-내가 젊었을 때 우리말에 절망했던 적이 있다. 그제, 어제, 오늘은 다 우리말인데 '내일(來日)'만 한자어더라. 과거를 가리키는 말은 다 있는데 정작 내일이라는 고유어가 없다. 내일을 빼앗긴 민족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모레, 글피, 그글피가 있더라. 우리 말고 그글피라는 말까지 있는 나라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한국 문화가 늘 이렇다. 위기설 속에서 살지 않았던 날이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위기감 때문에 오히려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불러왔다.
원숭이들은 아침에 먹이를 넷 주고 저녁에 셋을 주어야 좋아하는 조사모삼(朝四暮三)파다. 하지만 반대로 저녁을 위해 아침을 덜 먹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은 허리띠를 조일 줄 알았기 때문에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과거 대학을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비웃던 시절이 있었지만, 소를 판 아버지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이다.
정-그러나 'N포 세대'라고 하는 지금 젊은 층은 현실에 자신들이 정당하게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절망하고 좌절한다.
이-나는 N포 세대보다 오히려 제대로 포기할 줄조차 모르는 젊은이들이 더 걱정스럽다. 하려거든 엄살이 아니라 철저하게, 치열하게 포기하라. 그러면 마지막 남는 것이 있다. n이라는 수학 기호와 포기라는 언어 기호이다. 그게 수학과 문학이다. 내가 6·25 전란의 바닥에서도 살아남았던 철학이다. 당시 외우고 다닌 시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바닷가의 무덤'이었다. "바람이 인다. 살아야 한다." 무덤은 죽음이다. 그런데 바다와 무덤 사이에 무엇이 있었나. 바람이 있었다. 이상(李箱)의 단편소설 '날개'에서 마지막 구절의 '날자'를 '살자'로 바꾸면 "살자, 살자, 한 번만 더 살아 보자꾸나"이다. 그런데 발레리도 이상도 수학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정-문학과 수학이 하나로 연합하는 활동은 정신의 첨단을 추구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났다. 시인과 과학자들이 함께 내는 프랑스 문학잡지 '울리포(Oulipo)'가 좋은 예다.
이-방금 말한 발레리는 시단(詩壇)에 등장한 다음 절망적인 침묵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때 그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정신을 단련하고 재기했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는 되지 말아야 한다. 과거 우리 세대를 구한 것이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었다면 오늘날 청년 세대의 앞날을 좌우하는 것은 인공지능(AI)의 알고리즘이다. 영국 시인 바이런의 피를 받은 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어머니로부터 수학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됐다. 우리 젊은이들이 주의 깊게 봐야 할 대목이다. 피가 뜨거울수록 냉정함을 요구하게 되고, 에이다는 그것을 '포에틱 사이언스(poetic science)'라고 불렀다. 과학과 인문학을 함께 구축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갈 다음 100년의 문명이다.
정-전적으로 공감한다. 수학·물리와 문학·음악을 공통 기초 교과목(liberal arts)으로 다룬 고대 교육의 초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단순히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와 같은 시류를 좇으라는 말이 아니다. 수학의 해답은 하나지만 푸는 방법은 수천 가지이다. 정답보다 그 풀어가는 과정, 요즘 말로 하면 알고리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난해한 시의 은유(metaphor)도 언어에 숫자를 대입해 집합론으로 풀면 쉽게 그 구조를 밝힐 수가 있다. 앞으로 오는 미래는 과정을 풀어가는 사고(思考)의 알고리즘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라 전체가 수포자다. 우리 교육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결과만을 보려고 한다. 한국의 바둑과 반도체가 세계를 제패한 원인이 무엇이냐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정부 관료들이 바둑과 반도체가 뭔지 몰라서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맞는 말 같다. 기원(棋院)을 학원 다루듯 규제했다면 알파고와 이세돌이 대결하는 일이 있었겠나. 그리고 세계 사람들이 삼성 스마트폰으로 그 중계 화면을 보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정-우리나라 사람은 계산을 잘하지만 깊은 수학의 원리는 모른다.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 중시하게 되고, 결국 '빨리빨리'와 획일화에 대한 조급증을 낳는다.
이-가까운 예로 지명(地名)을 보면 안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지은 지명들은 진고개, 동평마을 등 길고 짧은 말이 다양하다. 가장 긴 지명의 하나로 '도야지둥그러죽은골'의 9글자짜리도 있다. 이걸 행정관리들이 복잡하게 그대로 놔두겠나. 그래서 나라가 지은 지명은 두 글자로 통일돼 있다. 북쪽의 함흥·원산·평양·개성부터 시작해 한양(서울)·대전·대구·부산·광주·목포, 그리고 남단의 제주·한라까지 모두 두 자이다. 원조는 한자 종주국 중국이다. 그 큰 땅덩이의 지명들이 놀랍게도 대부분 두 글자다. 덩달아 일본은 한자를 수입하면서부터 법령으로 도쿄(東京)·교토(京都) 등 두 글자로 획일화했다. 이런 관료적 획일주의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아시아의 시대가 오겠는가. 우리 지식인들은 지금도 두 글자를 겹쳐 만든 '사자 숙어'의 사고 프레임에 갇혀 지낸다.
정-그래도 한국인이 21세기에 자랑스러운 문화로 내놓은 '한류(韓流)'가 있다. 한국 문화의 기성 중심인 문학이나 예술에 연결되지 않는 신종이다. 이게 전통의 새로운 분출인지, 세계 대중문화의 극단적 프레임인지 궁금했다.
이-한류는 그동안 우리가 천시하고 부정적으로 소외시킨 '막' 자 붙은 토착문화에서 나온 것이 많다. 국내에서는 개 밥그릇으로 천대받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 찻잔으로 국보가 됐다. 관광버스 춤이라고 비웃는 촌부의 막춤이 싸이의 말춤이 되어 세계 50억 명이 내려받아 함께 추는 기록을 세웠다. BTS(방탄소년단)의 랩을 따라 하려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글을 배운다. 막걸리·막사발·막춤·막국수 등 그동안 천시하고 부정하던 '막 문화'가 지금은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를 만들고 있지 않나.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 줄 모른다.
정-전통은 옛것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옛날에 억눌렸던 것이 새롭게 부상하고, 옛 지배문화는 밑의 토양으로 돌아간다는 게 김현의 '단절과 감싸기'론이다.
이-철학자 헤겔은 변증법 이론에서 '아우프헤벤(Aufhebe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내에서는 한자로 양기(揚棄)라고 번역하지만, 버린다는 뜻과 보존한다는 정반대의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리 토박이말에는 "버려둬"라는 아주 흔한 말이 있다. 버리다와 두다의 반대말이 한데 합쳐져 다이내믹한 개념을 만들어 낸다.
어릴 때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는 놀이를 한 적이 있다. 늘 보던 풍경이 낯설고 아름답게 보이더라. 젊어서 엉거주춤이라는 말을 싫어했는데 그것도 다시 보니 경직된 서양식 부동자세보다 훨씬 유연하고 가변성이 있다. 기마 자세나 스키 탈 때가 바로 엉거주춤한 오금에 중심을 둔 자세이다. 한국 사람은 오금이 풀어져야 행동할 수 있다. 앉거나 서는 진퇴(進退)를 마음대로 하는 가장 융통성 있는 자세이다.
정-결국 상극(相剋)이 통하는 게 한국 정신의 기본이고 새로운 세기의 모본(模本)이라는 얘기로 들린다. 선생님은 청년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우리 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일까.
이-시를 비롯한 우리말 교육, 더 높게는 새로운 문학 교육이다. 시대마다 유토피아(Utopia) 문학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리스말로 '유'는 노(no)라는 부정사이고 '토피아'는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아무 곳에도 없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유토피아가 아닌 유크로니아(Uchronia)의 문학과 사고가 나와야 한다. 100년의 가상세계를 만드는 소설이다.
인공지능 시대 혹은 양자컴퓨터 시대의 기술을 이용하면 과거의 역사나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시뮬레이션해 정밀한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다.
가령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20세기 초 일본이 대륙 진출을 하지 않고 해양 쪽으로 역사의 진로를 잡았다면 아시아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러면 내일이라는 한자어가 아닌 토박이말 '할재(轄載)' 또는 '날새(飛鳥)' 같은 말을 복원할 수가 있다. "미래는 과거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는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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