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비자아’와 구별해 인식하는 것이 아마도 면역학의 기초일 것이다.
- 맥팔레인 버닛
아토피, 천식, 비염.
이 질환들의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방 ‘알레르기(알러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환의 공통점은?
류머티스 관절염, 크론병, 제1형(소아) 당뇨병, 갑상샘저하증.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신체 부위의 질병들이라 고개를 갸웃할 독자들도 있겠지만 자가면역질환(autoimmune disease)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병들이다.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 모두 면역계의 이상으로 인한 질병이지만 작동 양식은 다르다. 즉 알레르기는 별 것도 아닌 외부 물질에 과민하게 반응해 신체에까지 악영향을 미친 결과이지만(‘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운 격’이라는 속담에 해당), 자가면역질환은 면역계가 내 몸의 물질을 외부 물질로 인식해 공격한 결과 신체가 손상을 입는 현상이다(‘자중지란(自中之亂)’이란 사자성어에 해당).
자가면역질환이 생소한 독자들도 많겠지만 이 질환은 대체로 알레르기보다 증세가 더 심각하고 사실상 완치가 되지 않는 만성질병이다. 미국의 경우 여성 사망원인 10위 안에 들어간다. 알레르기도 근본적인 치료제는 없지만 어쨌든 알레르기 유발물질(항원)과 접촉하지 않으면 되지만(물론 쉽지는 않다) 자가면역질환은 내 몸이 항원이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 면역계가 오작동을 해 공격하는 신체 부위에 따라 다양한 질병으로 나타나는데 현재 자가면역질환의 목록에 오른 질병은 80가지가 넘는다.
게다가 자가면역질환은 알레르기와 마찬가지로 환자가 점점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2400만 명으로 추정돼 전체 인구의 7%에 이른다. 이런 추세는 범세계적이서 홍콩의 경우 염증성장질환(자가면역질환인 크론병이 포함돼 있다) 환자수가 수십 년 사이 30배가 됐다. 우리나라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이런 추세의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필자 주변을 봐도 갑상샘저하증(가장 흔한 하시모토갑상샘염이 자가면역질환이다)이나 갑상샘항진증(역시 가장 흔한 그레이브스씨병이 자가면역질환이다)인 사람이 여럿이다.
자가면역(autoimmunity)이란 용어는 1957년 5월 25일자 의학 학술지 ‘랜싯’에 처음 등장했다. 올해는 자가면역질환이 의학계에 데뷔한지 60년이 되는 해다. 자가면역 60주년을 맞아 지난 2014년 출간된, 자가면역의 역사를 다룬 ‘Intolerant Bodies(불관용의 몸)’의 내용을 중심으로 자가면역질환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지난 2014년 자가면역질환의 역사를 다룬 책 ‘불관용의 몸’이 출간됐다. 표지에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는 환자의 손이 보인다. - amazon.co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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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면역 용어 데뷔 60주년
자가면역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고 병도 수십 가지나 되지만 불과 60년 전에야 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용어가 쓰이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병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았기 때문이다. 즉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낭창(루푸스) 같은 과도한 염증을 증상으로 하는 질환은 당연히 바이러스나 세균에 감염된 결과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병원체를 찾는 데만 집중했고 항생제 투여 같은 효과 없는 치료에 매달렸다.
다음으로 면역계에 대한 굳은 믿음이 걸림돌이었다. 20세기 들어 이런 질환을 앓는 환자의 혈청에서 인체의 분자에 대한 항체가 존재한다는 발견이 간헐적으로 보고됐다. 그럼에도 주류 의학계에서 무시됐는데 면역계가 자신이 속한 몸을 공격한다는 발상은 말이 안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이런 예가 여럿 보고되면서 면역학자들은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고(그럼에도 알레르기의 일종이라고 얼버무렸다) 1951년에야 ‘자가면역(autoimmune)’이라는 형용사적 표현이 문헌에 처음 등장했다.
자가면역질환을 확립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호주의 의사 맥팔레인 버닛이다. 버닛은 면역관용의 메커니즘인 클론선택이론을 제안해 196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사람이다. 면역관용이란 우리 면역계가 자기, 즉 우리 몸을 공격하지 않는 현상이다. 따라서 자가면역질환은 우리 몸에 대한 면역관용을 잃어 발생한 질환이다. 자가면역질환의 역사를 다룬 책의 제목이 ‘불관용의 몸’인 이유다.
면역관용 현상을 오랫동안 고민하던 버닛은 어느 날 클론선택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즉 개체 발생 과정에서 유전자 재조합으로 각각 고유한 항체를 만들 수 있는 수백 만 가지 면역세포가 만들어지는데 우리 몸의 물질과 결합할 수 있는 세포(클론)는 소멸되거나 활성을 잃게 된다. 따라서 남아 있는 면역세포들은 우리 몸에 대해 관용을 지니게 된다는 설명이다.
흥미롭게도 버닛이 이런 이론을 내놓을 때 실험실의 연구원들은 몇몇 만성염증 환자의 혈청에서 인체조직을 항원으로 하는 항체를 발견했고 버닛은 면역관용에서 면역불관용으로 관심을 돌려 자가면역질환의 개념을 확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 면역계는 자기 조직에 대해 관용을 버리게 되는 것일까.
호주의 바이러스 학자 맥팔레인 버닛은 1950년대 면역관용이론을 제안해 196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버닛은 면역관용의 실패의 결과인 자가면역질환 분야도 개척했다. - 위키피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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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바이러스와 길랭-바레증후군
실망스럽게도 이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원인이 매우 다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알레르기도 그렇지만 이럴 때 흔히 써먹는 ‘유전과 환경의 복합요인’이라는 표현에 해당한다. 아무튼 자가면역질환이 꾸준히 늘고 있고 이는 환경요인의 비중이 꽤 큼을 시사한다. 즉 음식, 감염, 흡연 등 생활방식이 발병률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발병률이 세 배 정도 더 높다.
자가면역이 유발되는 주요 메커니즘의 하나가 분자구조의 유사성(molecular mimicry)에서 비롯된 면역계의 착각이다. 즉 외부 물질(음식이나 병원체)을 항원으로 하는 항체가 형성될 때 불운하게도 이 항원의 구조가 우리 몸의 물질과 비슷할 경우 이 항체를 만드는 림프구가 우리 몸의 물질을 항원으로 인식해 계속 항체를 만들어내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지난 2015년 브라질을 강타해 소두증 공포를 불러일으킨 지카바이러스의 경우 임신부가 아니면 몸살을 앓고 지나가는 수준이라 별로 걱정할 게 없다고 하지만(이런 증상을 지카열이라고 부른다)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길랭-바레증후군이라는 신경계질환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길랭-바레증후군은 면역계가 신경계(뉴런의 축삭을 둘러싸고 있는 수초)를 공격해 염증과 마비가 일어나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심할 경우 호흡근육이 마비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즉 지카바이러스를 항원으로 하는 항체가 수초를 공격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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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로이드 약물 치료의 효시
그렇다면 자가면역질환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걸까(증상의 정도와 병의 진행속도에 개인차가 크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비록 완치할 수 있는 약물은 없지만(물론 치료를 통해 증상이 사라진 경우도 있다) 증상을 완화하는 약물은 많이 나와 있다. 즉 비스테로이드계 소염진통제에서부터 스테로이드제제, 면역억제제 등 다양한 치료법을 병행하고 있다.
한편 증세가 나타났을 때는 이미 해당 조직이 많이 파괴된 경우도 있는데 하시모토갑상샘염(갑상샘저하증)이나 제1형 당뇨병(췌장의 베타세포가 파괴됨)이 그런 병들다. 이 경우 감상샘호르몬이나 인슐린호르몬을 평생 투여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흥미롭게도 각종 염증질환의 ‘특효약’인 스테로이드제제의 발견이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1948년 미국 메이요클리닉의 류머티즘전문의 필립 헨치에게 ‘진상’ 환자가 배정된다. 극심한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던 이 젊은 여성은 치료가 효과가 없음에도 병실을 떠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쳐달라고 떼를 썼다.
고민에 빠진 헨치는 마침 같은 병원의 생화학자 에드워드 켄들이 부신에서 화합물E라는 물질을 분리했다는 얘길 듣고 이를 써보기로 한다. 힘들게 추출한 물질이었기 때문에 켄들은 마지못해 미량 나눠줬고 헨치는 이를 환자에게 투여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이 여성은 48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며 헨치에게 같이 춤을 추자고 농담을 던졌다.
화합물E의 실체는 코티손(cortisone)으로 이 무모한 임상 이후 기적의 염증치료제로 널리 쓰이게 된다. 이처럼 황당한 생체실험을 한 헨치와 망설이다 시료를 건네 준 켄들은 이 업적으로 195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스테로이드 약물은 효과에 상응하는 엄청난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기 때문에 오늘날 의사들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주의해서 쓰고 있다.
자가면역질환의 증상이 심각할 경우 스테로이드제제와 면역억제제를 번갈아 쓰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치료제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새로운 치료제를 찾으려는 노력이 수십 년 째 진행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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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에 전기충격 줘 면역계 진정시켜
학술지 ‘네이처’ 5월 4일자에는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전혀 새로운 접근법을 소개하는 심층기사가 실렸다. 신경에 전기쇼크를 줘 이에 연결돼 있는 면역계의 활동성을 낮춰 염증반응을 줄여 증상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미국 페인스타인의학연구소 케빈 트레이시 박사가 개발했다.
1998년 트레이시 박사는 면역세포가 분비하는 염증반응 촉진 물질인 종양괴사인자알파(TNF-α)의 작용을 억제하는 CNI-1493이라는 약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 약물을 쥐의 뇌에 넣어 뇌졸중이 일어났을 때 항염증 효과를 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몸 전체에서 TNF-α의 수치가 떨어지는 현상을 관찰했다. 추가 연구를 통해 이 약물의 신호가 미주신경을 통해 몸 전체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주신경은 뇌와 몸 곳곳을 연결하는 신경계로 심장박동과 호흡, 장운동 등 불수의(의지와 무관) 기능을 담당한다.
트레이시 박사는 약물이 아니라 미세한 전류를 일으키는 장치를 미주신경에 부착해 자극을 주면 염증반응이 억제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트레이스 박사는 2011년 류머티스 관절염 환자 18명을 대상으로 임상을 시작했는데 12명에서 상당한 증상개선효과가 나타났다. 크론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진의 또 다른 임상에서도 7명 가운데 5명에서 증상이 호전됐다. 아직은 임상규모가 미미하지만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쇄골 아래 미세한 전기쇼크를 일으키는 작은 장치를 넣어 미주신경을 자극해 면역계의 염증반응을 억제해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크론병 같은 자가면역질환 증상을 완화하는 소규모 임상이 성공을 거뒀다. 전기쇼크로 자극된 미주신경의 신호가 비장으로 전달돼 면역세포(대식세포)의 활동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도식화했다. - 네이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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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의학적 접근도 활발
아무튼 아직까지 이렇다 할 치료법이 없는 상태에서 생활습관을 개선해 증상을 완화하고 더 나아가 치유에 이르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미국 마운트시나이대 예방의학부 수잔 블룸 교수는 오랫동안 만성피로에 시달렸고 체중조절에 애를 먹었는데 어느 날 검진결과 자신이 하시모토감상샘염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별 거 아니니 걱정 말고 갑상샘호르몬약을 복용하면 된다”는 주치의의 말에 반발심을 느낀 블룸은 그 뒤 자가면역질환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발견한다.
블룸은 일시적인 증상 완화에 그치는 부작용이 많은 약물치료로는 희망이 없다고 보고 환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기능의학에 주목한다. 즉 식생활 등 생활습관을 바꿔 몸의 자연치유력(이 경우 면역계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3년 블룸은 10년간의 치료경험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최근 ‘면역의 배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왔다).
이 책에서 블룸은 식단조절과 금연, 운동, 스트레스 관리 등 생활습관을 개선하면 자가면역질환 증상이 상당히 개선될 수 있음을 여러 임상사례를 곁들여 보여주고 있다. 사실 많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대사질환에 대한 처방과 겹치는 면이 많은데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책을 보면 자가면역질환의 전조증상으로 만성피로, 두통, 메스꺼움 등을 들고 있는데 현대인들이라면 다들 겪고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우리 몸 안에서 면역계가 우리 자신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된다. 앞으로 더욱 바른 생활을 해서 면역계가 몸을 배신할 마음을 먹지 않게 해야겠다.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