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8일 수요일

초의에게 준 다산의 당부

다산과 초의는 사제간이다. 다산시문집에는 다산이 초의에게 준 5항목으로 된 〈초의승 의순에게 주는 말(爲草衣僧意洵贈言)〉이란 글이 실려 있다. 그 외에 문집에 실린 초의에게 준 글은 서울로 돌아온 후인 1830년에 지은 시가 한 수 있을 뿐이다. 다산초당에서 초의와 나눈 교감에 견주어 남은 글이 너무 빈약하다. 한편 초의의 문집에는 다산에 관련된 시 몇 수와 편지 한 통이 실려 있다.1)
놀랍게도 신헌(申櫶)의 《금당기주(琴堂記珠)》에 초의에게 준 다산의 글이 무더기로 실려 있다.2) 지난 호에 살핀 〈초의의 눈보라 속 수종사 유람〉이란 글에서 밝혔듯이, 《금당기주》는 신헌이 초의가 보관하고 있던 여러 두루마리와 수창시문첩 등을 베낀 것이다.3) 여기 실린 다산의 글 속에는 문집에 실린 증언(贈言) 내용이 수록된 것은 물론, 비슷한 시기에 초의에게 써준 훨씬 더 많은 글들이 연속해서 수록되었다. 이를 통해 초의에 대한 다산의 각별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고, 두 사람 사이에 나눈 대화나 관심사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금당기주》에 실린 다산의 글을 통해 두 사람의 각별한 사제 관계를 살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문집에 누락된 다산의 산문을 보완하는 의미도 있다.


2

초의는 1809년에 초당으로 다산을 처음 찾아갔다. 당시 다산이 48세, 초의가 24세였다. 초의는 다산의 아들 뻘이었다. 초의는 이후 〈봉정탁옹선생(奉呈籜翁先生)〉(1809)과 〈비에 막혀 다산초당에 가지 못하고(阻雨未往茶山草堂)〉(1813) 등의 시를 지어 다산을 향한 애틋한 숭모의 정을 피력했다. 또 〈정승지께 올리는 글(上丁承旨書)〉에서는 자신이 초당에 들락거리는 것을 두고 대둔사 승려들 사이에 그가 유가로 귀의할 것이라는 악성 루머가 파다하게 퍼진 일을 말하며, 다산에게 누가 될까봐 자주 찾지 못하는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금당기주》에는 다산이 초의에게 준 글이 꽤 여러 편 실려 있다. 〈수종시유첩발(水鐘詩遊帖跋)〉(1830)과 〈제초의선게후(題草衣禪偈後)〉(1814), 〈다옹시순독서(茶翁示洵讀書)〉 3칙, 〈다산노초서(茶山老樵書)〉 4칙, 〈증언(贈言)〉(1813) 23칙 등이 그것이다. 1830년에 써준 〈수종시유첩발〉을 빼고는 모두 1813년과 1814년 사이에 써준 글이다. 이 가운데 〈증언〉 23칙 중 5칙만이 다산시문집에 수록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문집에 누락되고 없다.4) 이들 글이 다산의 문집에서 누락된 것은 불교 승려와의 가까운 교분이 쓸데없는 말을 낳을까 염려한 것 외에 글 속에 불가어가 상당수 들어 있는 것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이들 글에는 초의에게 주는 다산의 가르침과 당부,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짧은 편지 등 다채로운 내용을 담았다. 이 가운데 먼저 공부하는 마음가짐과 차례에 관한 당부를 담은 내용을 몇 항목 살펴본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와 근(勤)과 적(寂)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다. 고요하지 않으면 오로지 정밀하게 하지 못한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는 요체다. 
(學者必具慧勤寂三者, 乃有成就. 不慧則無以鑽堅; 不勤則無以積力; 不寂則無以顓精. 此三者, 爲學之要也.)

위학삼요(爲學三要)로 혜(慧)․근(勤)․적(寂)을 설정하고, 다시 찬견(鑽堅)․적력(積力)․전정(顓精)의 단계를 제시했다. 지혜로 난관을 돌파하고, 근면으로 힘을 축적하며, 침묵으로 정밀함을 더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불가적 표현을 써서 초의에 대한 배려를 담았다. 구체적 공부의 장면은 이렇다. 

《주역》에서는 “아름다운 바탕을 간직하여 곧게 하되 때로 발휘한다.”고 했다. 산사람이 꽃 심는 일을 하다가 매번 꽃봉오리가 처음 맺힌 것을 보면 머금어 이를 기르는데, 아주 비밀스레 단단히 봉하고 있다. 이를 일러 함장(含章) 즉 아름다운 바탕을 간직한다고 한다. 식견이 얕고 공부가 부족한 사람이 겨우 몇 구절의 새로운 뜻을 익히고는 문득 말로 펼치려 드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易曰: “含章可貞, 以時發也.” 山人業種花, 每見菩蕾始結, 含之蓄之, 封緘至密. 此之謂含章也. 淺識末學, 纔通數句新義, 便思吐發, 何哉.)

꽃봉오리는 안으로 꽉 차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좀체로 단단히 여민 제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침내 봉우리가 벙그러지면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아름다운 자질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공부는 이런 온축의 과정이다. 얕은 식견으로 경솔하게 뽐내려 들면 천박한 바탕이 그대로 드러나 남의 손가락질만 받고 만다.

재주와 덕 둘 다 없는 것은 세상이 온통 그런지라 없다고 욕할 것이 없다. 오직 재주가 있은 뒤라야 덕이 없다는 비방이 있게 된다. 그래서 재주와 덕은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만약 둘 다 갖추기 어렵다면 아예 둘 다 없는 것만 못하다. 때문에 사한(詞翰)과 필묵의 재주는 절대로 남에게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 경계하고 경계하라. 
(才德兩亡者, 滔滔皆是, 泯然無訾. 唯有才而後, 乃有無德之謗. 故才之與德, 不可相離. 如難兩備, 莫若兩亡. 故詞翰筆墨之藝, 切不可宣露示人也. 戒之警之.)

덕을 갖추지 못한 재주는 비방을 부를 뿐이다. 그러니 얕은 재주를 함부로 뽐내려 들지 말고, 오로지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이렇게 했다.

시에 능한 사람은 시로 나를 피곤하게 하고, 그림에 능한 사람은 그림으로 나를 괴롭힌다.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나를 괴롭히고, 쌀 있는 사람은 쌀로 나를 피곤하게 한다. 이로 본다면 벙어리 거지 선비가 가장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能詩人困我以詩, 能畵人困我以畵. 有錢人困我以錢, 有米人困我以米. 由是觀之, 啞羊乞士, 爲無上方便.)

이 또한 섣불리 자기의 재주를 드러내서 다른 사람에게 시달림을 당하지 말고, 차라리 말 못하는 벙어리 거지가 되어 내실을 다지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 내용이다.

인간 세상은 몹시도 바쁜데, 너는 늘 동작이 느리고 무겁다. 그래서 1년 내내 서사(書史)의 사이에 있더라도 거둘 보람은 매우 적다. 이제 내가 네게 《논어》를 가르쳐 주겠다. 너는 지금부터 시작하도록 하되, 마치 임금의 엄한 분부를 받들 듯 날을 아껴 급박하게 독책(督責)하도록 해라. 마치 장수는 뒤편에 있고, 깃발은 앞에서 내몰아 황급한 것처럼 해야 한다. 호랑이나 이무기가 핍박하는 듯이 해서 한 순간도 감히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의리만을 찾아 헤매고, 반드시 마음을 쏟아 정밀하게 연구해야만 참된 맛을 얻을 것이다.
(人世甚忙, 汝每動作遲重. 所以終勢書史之間, 而勳績甚少也. 今授汝魯論, 汝其始自今. 如承王公嚴詔, 刻日督迫, 如有將帥在後, 麾旗前驅, 遑遑汲汲. 如爲虎狼蛟龍所逼迫, 一瞬一息, 無敢徐緩. 唯義理尋索, 必潛心精硏, 乃得眞趣.)

《논어》 강학을 시작하면서 느긋한 태도를 버리고 다급하고 황급한 마음으로 한 순간도 방심함 없이 전심전력할 것을 주문했다. 초의는 처음 다산에게서 《주역》 공부를 시작했고, 시작(詩作)도 병행했다. 이어 공부는 점차 확산되어 《논어》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시작하면서 그 마음을 다잡고자 이렇듯 맵게 말한 것이다. 
초의는 다산초당을 왕래하면서 시학 공부에도 잠심했다. 다음은 학시의 단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다산시문집에는 뒷부분만 실려 있다.

시를 배우는 것은 모름지기 《시경》에서 근원을 삼아 아래로 한위(漢魏)와 육조(六朝)에 미치고, 당나라에서는 영화(英華)로운 것만을 가려 뽑는다. 오직 두보만을 배우되, 마치 십철(十哲)이 성인을 배운 것처럼 해야 한다. 왕유와 맹호연, 위응물과 유자후, 왕건과 이상은 등은 모두 마땅히 법으로 본받아야 한다. 송에 있어서는 소식과 육유, 진사도와 진여의, 그리고 진소유 등이 가장 좋다. 원나라에 있어서는 원유산과 살천석, 게혜사와 야율초재, 양렴부 등을 취한다. 명나라에서는 고계와 이서애, 왕봉과 원중랑, 서문장과 전겸익 등을 취해 백가를 망라하여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한다. 환골탈태하여 진부한 것을 변화시켜 새롭게 해야 하니, 이것이 시가(詩家)의 대법(大法)이다.
시란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본시 낮고 더러우면 비록 억지로 청고(淸高)한 말을 짓는다 해도 이치를 이루지 못한다. 뜻이 원체 하잘 것 없으면 비록 억지로 통 큰 말을 한다 해도 사정이 꼭 맞지 않는다. 시를 배우면서 그 뜻을 쌓지 않는 것은 똥덩어리에다가 맑은 샘물을 거르는 것이나,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기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죽을 때까지 해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도심(人心道心)의 분별을 살펴, 그 찌꺼기를 깨끗이 하고 청진(淸眞)함을 펼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연명이나 두보 같은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말미암아 힘을 쏟았던 것일까? 도연명이야 정신과 육체가 서로를 부리는 이치를 알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두보는 천품이 본시 높고, 충후하고 정성스런 어짐을 지닌 데다 아울러 호방하고 사나운 기상마저 갖추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토록 마음을 다스려도 그 본원의 맑고 투철함은 두보에 미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이하의 제공들 또한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바탕과 모방할 수 없는 재능이 있다.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지, 또 배우는 자가 능히 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學詩須從風雅頌溯源, 下逮漢魏六朝. 掇其英華於唐. 唯老杜是學, 學之宜如十哲學聖人. 王維孟浩然韋應物柳子厚王建李商隱, 皆當師法. 於宋唯蘇軾陸游二陳秦少游最好. 於元取元遺山薩天錫揭徯斯耶律楚材楊廉夫之等. 於明取高啓李西涯王逢袁中郞徐文長錢謙益之等, 搜羅百家, 捨短取長, 換骨奪胎, 化腐生新. 此詩家之大法也. 詩者言志也. 志本卑汚, 雖強作淸高之言, 不成理致. 志本寡陋, 雖強作曠達之言, 不切事情. 學詩而不稽其志, 猶瀝淸泉於糞壤, 求奇芬於臭樗,  畢世而不可得也. 然則奈何? 識天人性命之理, 察人心道心之分, 淨其塵滓, 發其淸眞, 斯可矣. 然則陶杜諸公, 皆用力由此否. 曰陶知神形相役之理, 可勝言哉. 杜天品本高, 忠厚惻怛之仁, 兼之以豪邁鷙悍之氣. 凡流平生治心, 其本源淸澈, 未易及杜也. 下此諸公, 亦皆有不可當之氣岸, 不可摹之才思. 得之天賦, 又非學焉者所能跂也.)

다산의 시관(詩觀)을 명쾌하게 잘 정리해서 보여준 글이다. 다산은 친절하게 《시경》에서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모범으로 삼을만한 제가의 이름을 열거했다. 학시의 방법은 수라백가(搜羅百家), 사단취장(捨短取長), 환골탈태(換骨奪胎), 화부생신(化腐生新)의 16자로 압축했다. 이상 열거한 제가의 시문을 반복해서 익히되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해, 같지만 결코 다른,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질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시는 뜻을 말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좋은 시를 쓰려면 바탕 공부를 통해 뜻을 닦아 마음 속 찌꺼기를 걷어내서 청진(淸眞)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산은 시에 일종의 천부적 요소가 있음도 부정하지 않았다.    


3
   
초의가 승려 신분이었으므로 불교와 유교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일깨움을 준 내용도 적지 않다. 다시 몇 대목을 살펴보자.

내가 평생 독서하려는 소원이 있었다. 때문에 귀양을 오게 되자 비로소 크게 힘을 쏟았다. 쓸 데가 있다고 여겨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승려들은 매번 글을 지어봤자 쓸데가 없다고 하면서, 게으르고 산만한 곳에 몸을 내맡기니 자포자기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독서하기 편한 것은 비구만한 것이 없다. 절대로 이런저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힘을 쏟아 나아가야 한다. 법신(法身)이란 유가에서 말하는 대체(大體)다. 색신(色身)은 유가의 소체(小體)에 해당한다. 도심(道心)은 불가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이고, 인심(人心)은 불가에서는 무명(無明)이라 한다. 존덕성(尊德性)을 너희는 ‘정(定)’으로 여기고, 도문학(道問學)을 너희는 `혜(慧)‘라고 한다. 피차가 서로 합당하나 함께 섞어 쓰지는 못한다. 다만 근래 불가에 무풍(巫風)이 크게 일어나니 이것이 참 고약하다.  
(余平生有讀書之願. 故及遭流落, 始大肆力, 匪爲有用而然也. 僧徒每云, 績文無用處, 任其懶散, 自暴自棄, 孰甚於此. 讀書之便, 莫如比丘. 切勿推三阻四, 着力前進也. 法身者, 吾家所謂大體也, 色身者, 吾家所謂小體也. 道心汝家所謂眞如, 人心汝家謂之無明. 尊德性汝以爲定, 道問學, 汝以爲慧. 彼此相當, 互不相用. 但汝家近日巫風太張, 是可惡也.)

유가의 대체(大體)와 소체(小體)를 불가의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에 대응시키고,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은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으로 풀이했다. 존덕성(尊德性) 도문학(道問學)은 정(定)과 혜(慧)에 해당한다고 했다. 본문 중에 ‘추삼조사(推三阻四)’란 표현이 나온다.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 때문에 제 뜻대로 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이 염불에 힘쓰지 않고 유가 경전에 잠심하는 것을 두고 말이 많았던지, 다산은 유가와 불가의 가르침이 비록 한데 섞을 수는 없지만 원리는 다를 게 없다고 풀이했다. 하지만 근자의 불교는 무당 푸닥거리하듯 그저 부처님 전에 복이나 비는 풍조가 성행하여 도무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열정이 사그러들었음을 다산은 통탄했다. 

내 몸은 아(我)요, 남은 피(彼)다. 하지만 기림은 나를 괴롭힘에서 나오고, 헐뜯음은 나를 즐겁게 함에서 나온다. 찬미함은 상대를 두터이 하는데서 생기고, 원망은 상대를 박하게 여기는 데서 생긴다. 나만을 위해 수고로우면 죽을 때까지 애를 써도 조그만 공조차 이루지 못한다. 남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몸을 마치도록 고결하게 지내도 1만 개의 쇠뇌가 동시에 발사될 것이다. 네가 어찌 떠벌리며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쌀로 밥지어 먹는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너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양주는 일찍이 터럭 하나로도 천하를 이롭게 하려들지 않았고, 또한 이웃에게서 터럭 하나조차 취하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악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양주를 자기를 두터이 하고 남에게 각박하게 한 우두머리로 꼽는다. 의순은 성품이 담박해서 남에게 구하는 법이 없다. 또한 만물을 이롭게 할 뜻도 없다. 내가 그래서 이를 경계한다.         
(身者我也, 人者彼也. 然譽從苦我生, 訾從樂我生. 讚自厚彼生, 詛自薄彼生. 勞由我, 則畢世喘喘, 而寸功不錄. 不爲彼役, 則終身潔潔, 而萬弩俱發. 你胡得云 囂囂然我飮我泉, 我食我稻. 曾莫之欺女也. 揚朱固未嘗以一毛利天下, 亦未嘗取一毛於隣人. 然凡言惡者, 首揚朱爲欲厚己而薄彼也. 意洵性冲澹, 無求於人, 亦不以澤物爲意. 余是以箴之.)

초의가 맑고 담백한 성품을 지녀, 웬만한 일에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구도의 열의에 불타는 것을 양주의 위기설(爲己說)에 빗대서 나무란 내용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그만큼 사랑해야 하는 법, 그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그들에게 바라는 것도 없이, 내 샘물 마시고 내 양식 먹으며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초의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다. 초의의 태도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힘을 쏟아 진로장(塵勞障)을 제거하고서, 쇄탈문(洒脫門)에 마음을 보존하리라.” 이 두 구절의 화두를 항상 기억해 두고, 설법하는 자리 위에서 온갖 갈등에 얽히지 않도록 해라. 평생 자기 일을 하면 온통 다른 사람에게 속하게 되고, 평생 다른 사람의 일을 하면 도리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 혹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해, 다른 사람을 위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 들지 않으니, 이제 와서 마침내 무엇을 이루겠느냐?   
(力去塵勞障, 情存洒脫門. 這二句話頭, 常常記取, 愼勿於狻猊座上, 綰取千葛万藤. 平生做自己事, 都屬別人, 平生做別人事, 還益自己. 或不曉此理, 一指不肯爲他動. 如今竟有何成.)

소아(小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힘껏 노력하여 애를 써도 결국은 진로장(塵勞障)에 떨어지고 말 뿐이다. 쇄탈문(洒脫門)에 마음을 두려면 남을 위해 기꺼이 제 한 몸을 내던지는 희생이 필요하다. 남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깨달음을 이루려 드니 이것이 어찌 될 수 있는 일이겠느냐고 나무랐다.

내가 불서(佛書)를 보니, 예컨대 개는 불성(佛性)이 없다거나,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이나, 뜰 앞의 잣나무라거나, 서강의 물을 다 마셔 버렸다는 등의 여러 가지 화두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구경(究竟)의 법이란 온통 적멸(寂滅)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찌 몸과 마음에 보탬이 있겠는가? 의심이 없는 곳에서 의문이 있고, 의심이 있는 데로부터 의문이 없기를 기필한 뒤라야 독서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유교와 불교가 갈라지는 까닭이다.
(余觀佛書, 如狗子無佛性, 祖師西來意, 庭前栢樹子, 吸盡西江水, 多般話頭, 無非要人起疑. 其究竟法, 則都歸於寂滅. 何益於身心哉. 必也自無疑而有疑, 自有疑而無疑, 然後可謂讀書也. 此儒釋之所以分也.)

이번에는 유교와 불교의 차이를 독서 방식의 차이로 설명했다. 다산은 불교가 주체를 세우기도 전에 화두로 의심을 일으켜 주체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허무적멸로 돌아갈 뿐임을 비판했다. 이에 반해 유교의 독서는 먼저 수기(修己) 공부로 주체를 세워 아무 의심이 없게 한 뒤에 비로소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을 밀어붙여 석연하게 의심을 풀어버리는 공부라고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먼 산의 맑은 이내를 바라본다. 유연히 주목하느라 곁에 사람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계에서 누리는 것은 여산의 혜원(惠遠) 선사를 만나 한 차례 묻기를, 수능엄선(首楞嚴禪)이란 것은 진(晉)나라 유자들의 논의를 부연한 것이지 석가세존이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겠다. 아미타불이 세웠던 48장의 서원(誓願) 외에는 모두 부연한 말일 뿐이니, 어찌 반드시 수능엄 뿐이겠는가?  
(朝起觀遠山晴嵐, 悠然注目, 傍人呼之不應. 是疇所享, 思逢廬山遠禪師, 一問首楞嚴禪者, 謂是晉儒演說, 非世尊所說. 不知四十八章之外, 都是演說, 何必首楞嚴而已.)

문맥이 소연치 않으나, 여산 혜원선사를 만나 《수능엄경》의 그 많은 가르침은 사실 석가세존의 말이 아니라 위진 현학(玄學)을 부연한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묻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 내용이다. 아미타불의 48대 서원 외에 불교 경전의 모든 주장은 사실 중국의 현학을 부연 설명한 것이 아니냐고 반박한 것이다. 다산의 불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다음 글에서도 반복적으로 피력된다. 

도연명의 〈감피백하(感彼柏下)〉의 시를 보면 평소에 혜원(惠遠)의 현론(玄論)을 듣고 있었음을 알겠다. 소동파가 물아부진(物我不盡)을 노래한 <적벽부>를 보더라도  당시에 늘 참료(參廖)와 아화(雅話)를 나눈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매번 봄바람이 불어와 초목에 싹이 트고, 나비가 갑자기 방초에 가득해지면, 스님 몇 사람과 함께 술병을 들고서 옛 무덤 사이를 노닌다. 무덤들이 연이어 울멍줄멍 돋아난 것을 보며 술 한 잔을 따라 주며 말한다. “무덤에 묻힌 이여! 능히 이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그대가 예전 세상에 있을 적에도 송곳과 칼끝 같은 이익을 다투며 티끌과 찰나의 재물을 모으느라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부라리며 수고로이 애쓰면서 오직 이것을 굳게 움켜쥐려고만 했겠지? 또한 무리를 사모하고 짝을 찾아 육정은 불타고 음욕은 솟구쳐 따스하고 나긋나긋한 곳만 찾고, 부드럽고 따스한 집에서 지내느라, 천지간에 달리 무슨 일이 있는지조차 몰랐겠지? 또한 가세를 빙자하여 오만스레 행동하고 남을 우습게 알며 불쌍한 사람 앞에 으르렁거려 스스로를 높이지는 않았던가? 그대가 세상을 떠날 적에 손에 동전 한 닢이라도 지녀갔던가? 이제 그대 부부가 한데 묻혔으니 능히 평소처럼 즐겁기는 한가? 내 이제 그대를 이처럼 곤경에 빠뜨려도 그대가 능히 큰 소리로 나를 꾸짖을 수 있겠는가? 이같이 수작하다 돌아오노라면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 있다네.  
(陶元亮感彼柏下之詩, 知平日得聞惠遠玄論. 蘇和仲物我無盡之賦, 驗當時常與參寥雅話. 每春風始動, 草木萌芽, 胡蝶忽然滿芳草. 與法侶數人, 携酒游於古塚之間. 見蓬科馬鬣, 纍纍叢叢, 試酌一醆, 澆之曰: “冥漠君能飮此酒無. 君昔在世, 亦嘗爭錐刀之利, 聚塵刹之貨. 撑眉努目, 役役勞勞, 唯握固是力否. 亦嘗慕類索儷, 肉情火熱, 淫慾水涌, 暱暱於溫柔之鄕, 頟頟於軟煖之窠. 不知天地間, 更有何事否. 亦嘗憑其家勢, 傲物輕人. 咆哮煢獨, 以自尊否. 不知君去時, 能手持一文錢否. 今君夫婦合窆, 能歡樂如平昔否. 我今困君如此, 君能叱我一聲否. 如是酬醋而還, 日冉冉掛西峯矣.)

도연명은 〈여러 사람과 주씨 집안 묘의 잣나무 아래서 노닐다(諸人同遊周家墓柏下)〉란 시에서 “저 잣나무 아래 사람 생각하노니, 그를 위해 어이해 즐기잖으랴. 感彼柏下人, 安得不爲歡”라고 했다. 이를 보면 사생을 뛰어넘는 달관의 심사가 혜원(惠遠) 선사의 현론(玄論)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더라고 했다. 또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펼친 물아부진(物我不盡)의 논의도 참료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얻어진 것이 분명한 듯이 보인다. 이렇듯 불교의 가르침과 유가의 논리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고 융섭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리하여 예전 도연명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스님 몇 사람과 함께 봄소풍을 나가 울멍줄멍한 무덤 들 사이에서 땅속에 묻힌 사람과 노닥거리다 돌아왔노라고 했다.   

광명등(光明燈)은 산로장(産勞障)과 따로따로가 아니다. 만약 따로따로라고 말한다면 이는 공(空)일뿐 등(燈)은 아니다. 선화자(禪和子)여, 한번 생각해 보게나. 바람이 물푸레 나무[木犀] 위로 불면 나무에서 향기가 난다. 바람이 없을 때는 마침내 이 향기도 없다. 선화자여, 한번 돌아보게나. 
(光明燈不離産勞障. 若云離得, 是空非燈. 禪和子, 且想一想. 風吹木犀, 犀乃有薌. 若無風時, 遂無是薌. 禪和子且顧一顧.)

광명등은 지혜를 밝히는 등불이고, 산로장은 온갖 수고로움을 빚어내는 업장(業障)이다. 이 두 가지는 과연 별개인가? 바람이 없으면 향기도 없다. 인과(因果)의 사슬은 이렇듯 얽혀 있다. 다산은 이 두 질문을 초의에게 던져 곰곰이 따져보라고 주문했다. 불교의 논리를 끌어와 불교의 논리를 공박하려 한듯 한데 깊은 내용은 잘 알 수가 없다.    

법(法)이 색(色)과 논난하였다. “너 때문에 내가 괴롭다. 너는 강하고 나는 약하니 내가 장차 어디에 의지할꼬?” 색이 법에게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살겠다. 오직 네가 들어준다면 내가 할 일이 없다. 네 소송을 네가 결판내면 집안 일을 길이 맡기겠다.” 법은 아무 말도 못했다.    
(法與色難: “由爾之故, 我則桎梏. 汝强予弱, 我將何支?” 色謂法曰: “由爾之故, 我則機軸. 唯女是聽, 予無所遂. 汝訟汝決, 家事任長.” 法休多辯.)

마치 불경의 한 단락을 보는 듯한 재미난 글이다. 법(法)과 색(色)을 의인화 하여 문답의 방식으로 생각을 펼쳤다. 이렇듯 다산은 불교의 논리를 끌어와 정면에서 불교를 공박하기도 하고, 때로 친절하게 불교와 유교의 용어를 대비해가며 큰 가르침은 결국 다를 것이 없다고 일깨워주기도 했다. 초의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보니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해 결국 문집에 이들 글은 실리지 못했다.


3

다산은 초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다산은 틈만 나면 초의에게 제도의 그물을 박차고 나와 운유사방(雲遊四方) 하며 대자유의 경계를 누리고 큰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될 것을 당부하곤 했다.

“법희(法喜)를 아내 삼으면 규방의 드넓음보다 낫고, 법전(法傳)을 아들로 삼으면 문호가 기우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옛 사람이 선(禪)을 선망하여 한 말이다. 남들은 바야흐로 너를 선망하는데, 너는 도리어 수심에 쌓여 있다. 다만 물병 하나만 있다면 어디엔들 샘이 없겠느냐? 지팡이 하나만 있다면 어디 간들 길이 없겠느냐? 칡을 얽어 건(巾)을 짜고, 솔껍질을 찧어 죽을 만들어 먹으니, 이것이 운수간(雲水間)의 몸이니라.  
(“法喜爲妻, 勝如閨房勃谿. 法傳爲子, 不憂門戶傾圮.” 此古人羨禪語也. 人方羨汝, 汝反悄然. 但有一甁, 何處無泉, 但有一笻, 何往無路. 擩葛爲巾, 擣松爲鬻, 便是雲水閒身.)

일병일공(一甁一笻)으로 아무 얽매임 없이 법희(法喜), 즉 불법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을 아내로 삼고, 불법을 널리 전하는 소명을 자식으로 여긴다면 운수납자의 삶이 넉넉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비슷하게 이런 말도 있다.

굴속 개미는 1년 내내 돌아다녀야 10리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제 사는 굴에 마음이 매여 있기 때문이다. 선비가 되어 사는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공자께서도 오히려 옳지 않게 여기셨다. 그러니 승려로서 거처를 마음에 품는 것은 더더욱 우스운 일이 아니겠느냐? 사방을 구름처럼 노닐면서 나라 안의 이름난 산을 두루 다 보고, 나라 안의 이름난 선비를 죄 알아, 맵고 쓴 맛을 보면서 바람에 빗질하고 비로 머리 감는다. 만년에 찬 바위 아래 초가집을 하나 얻어, 죽이나 먹는 승려로 문 닫아 걸고 글을 저술한다면 후세에 전해질 것이 틀림없다. 이같이 한다면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말할만 하다.   
(穴螘終年行步, 不出十里之外. 以窠窟繫戀也. 士而懷居, 仲尼猶以爲非. 僧而懷居, 不尤可笑哉. 雲游四方, 盡觀國中名山, 盡識國中名士, 茹辛餐苦, 櫛風沐雨. 晩年得一寒巖草閣, 作粥飯僧, 杜門著書, 可傳無疑. 斯足云不虛生也.)

승려의 본분을 버려두고 유가의 경전에 잠심하는 것에 자격지심을 갖는 초의를 위해 쐐기를 박으려 한 말이다. 개미가 1년 내내 돌아다닌 데야 10리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제 굴로 돌아갈 생각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큰 일은 없다. 훌훌 벗어던져 운유사방(雲遊四方) 하며 명산을 편력하고 명사를 죄다 사귀어 가슴에 호연지기를 심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깊은 산 속에 초가집을 얽어 죽 먹으며 문 닫아걸고 저술에 힘 쏟는다면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만하다. 이 당부대로 초의는 이후 10년을 주유하며 공부하다가 일지암을 얽어 산속에 들어가 저술에 힘 쏟으며 삶을 마쳤다. 
스승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받들어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다산학단 제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인데, 특히 황상의 경우는 더했다. 초의도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고, 심지어 거처인 일지암의 조경조차도 다산초당을 연상시킬 만큼 흡사하게 가꾸었다. 

농사꾼의 자식을 붙들어 와서 하루 아침에 그 머리털을 깎고 그 팔뚝에 연비 뜨고 부처님 전에 무릎 꿇려 계율을 듣게 하고 예를 마치고 나와도, 변함없이 망칙스런 텁석부리다. 이에 가사를 입혀 《수능엄경》과 《금강경》, 《반야심경》을 가르쳐 제멋대로 시끄럽게 진(眞)이니 망(妄)이니 하고, 공(空)이니 색(色)이니 하며, 상(相)이 어떻고 식(識)이 어떻고 한다. 광대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면서도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으니 이러고서야 깨달음이 있겠는가? 이는 다만 제 몸뚱이를 이롭게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인생 백년은 몹시도 빨리 지나간다. 뉘라서 이를 즐겨 하겠는가? 질곡에 얽매여서 눈을 내리깔고 손을 내려 마치 며느리가 엄한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처럼 하면서, 모여서 가르치며 모두 그만그만한 생활을 하는 것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된다. 대장부는 마땅히 물병 하나와 바릿대 하나로 호탕하게 떠다니며 우주 안에서 소요하고 만물의 밖에서 노닐어, 문 틈 사이로 지나가버리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 눈앞에 닥친 강사의 작록이야 어찌 족히 사모하겠는가? 스스로의 미혹함도 깨치지 못하면서 하물며 남의 미혹함이야 말해 무엇 하랴?  
(捉農家子來, 一朝薙其毛, 炙其肘. 跽之佛前, 令聽戒律, 禮畢而出, 依然是외(鬼+畏)작(鬼+雀)邋遢子. 於是加之以田衣, 授之以首楞嚴金剛般若, 叨叨嘮嘮, 曰眞曰妄, 曰空曰色, 幾何是相, 幾何是識. 極廣大盡精微, 毋論是邪是正, 其有濟乎? 是唯利其○而爲之耳. 人生百年極匆匆, 誰肯爲此? 桎梏纏縛, 低眉下手, 如婦人之事嚴姑, 以聚以敎, 作都都平丈生活, 決不可爲也. 大丈夫當一甁一鉢, 浩蕩游泳, 逍遙乎宇內, 徜佯乎物表, 以遣此隙駒光陰. 逼逼講師之祿, 何足戀哉. 自迷未悟, 矧人迷哉?) 

고만고만한 텁석부리 승려가 가사를 걸쳐 입고 불경 몇 권을 배우고 나면, 진망(眞妄)의 분별과 색공(色空)의 나뉨을 말하고, 상식(相識)에 대해 논한다. 깨달음도 없이 입으로만 외우며 그만그만하게 사는 길을 따라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종다짐을 놓았다. 그러면서 호탕하게 우주를 소요하며 시원스런 깨달음을 참구해야지, 강사(講師)의 하찮은 지위에 연연하여 인생을 탕진하지 말라고 일깨웠다. 스스로 길을 잃고 헤매는 처지에 다른 사람의 미혹을 거두는 일이 가당키나 하냐고 일침을 가했다.
한편 다산은 사제의 그늘을 벗고 일생의 벗으로 초의와 함께 살고픈 소망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황효수와 녹효수 사이에 울창한 산이 허공에 솟았으니, 이것이 용문이다. 용문의 북쪽에 만학천봉이 소의 처녑 같다. 그 감돌아 안은 것이 주밀하여 마치 무릉도원처럼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두고 미원(米原) 옛 고을이라 한다. 옛 고을에 산이 있는데, 빼어난 빛이 허공에 서렸으니 이것이 소설봉이다. 소설봉은 태고 보우화상이 일찍이 숨어살던 곳이다. 옛날에는 절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퇴락하였다. 초의 거사는 마땅히 수리하여 이엉을 얹고 정갈한 가람 한 구역을 만들어 길이 마칠진저. 소설암에서 시내를 따라 몇 리 쯤 내려오면 녹요수와 만난다. 작은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20여리 내려오면 두 물줄기가 서로 합쳐지는 곳에 이른다. 이곳이 바로 유산별서(酉山別墅)다. 그 사이의 물빛과 산 빛, 삼각주와 모래톱의 자태는 모두 뼈에 저밀듯 해맑아, 깨끗함이 눈길을 빼앗는다. 매년 3월 복사꽃이 활짝 피면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면서 이 맑고 한가로운 경계에서 노니니, 이 또한 인간 세상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선남자(善男子)야! 뜻이 있는가? 만약 뜻이 있다면 나를 따르라. 다산 노초는 쓰노라.  
(黃驍綠驍之間, 有山萃然揷空, 是爲龍門, 龍門之北, 萬壑千峰, 如牛膍然. 其回抱周密, 無門不入. 如武陵桃源者, 曰米原古縣. 古縣有山, 秀色蟠空, 是爲小雪. 小雪者太古普愚和尙所嘗棲隱也. 舊有蘭若, 今頗圮廢. 草衣居士, 宜修茸, 爲精藍一區, 以終古焉. 自小雪庵, 沿溪下數里, 卽遇綠驍之水. 乘小航, 順流下二十餘里, 至兩水交衿之處. 是爲酉山別墅. 其間水色山光, 洲渚沙沚之容, 皆淸瀅徹骨, 明晶奪目. 每三月桃花盛開, 從流上下. 賦詩彈琴, 以遊乎蕭閑之域, 斯亦人世之至愉也. 善男子, 豈有意乎? 如其有意, 其從我. 茶山老樵書.) 

초의에게 준 편지로, 훗날 자신이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집 근처 소설봉에 보우 스님이 숨어 살던 퇴락한 절집이 있는데 이곳을 수리해 살면서 배를 타고 서로 왕래하며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내용이다. 양수리 근처 미원촌(米原村) 부근과 자신의 유산별서(酉山別墅)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워하는 중에도 그 곁에 초의를 두고 일생을 오가며 함께 지내고 싶은 소망을 펼쳐 보인 내용이다. 초의에 대한 다산의 애정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 수 있다.

가을비가 갓 걷히자 갠 무지개가 나무에 걸리고 샘물은 못으로 쏟아진다. 내가 동암 가운데 앉아 필묵으로 시간을 보내며 한창 운승(韻僧)을 생각하고 있을 때 의순이 때마침 이르렀다. 그가 지은 새 시를 외우니 풍류가 거나하여, 임평(臨平) 우화(藕花)의 싯귀만 못지 않았다. 참으로 기뻐할만 하였다.
(秋雨新收, 晴虹掛樹, 瀑泉瀉池. 余坐東菴中, 筆墨蕭閑, 政憶韻僧時, 意洵適至. 誦其新詩, 風流挑宕, 不減臨平藕花之句, 良足欣也.)

가을비가 개인 어느 날 다산은 초당에서 초의를 생각하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둘 사이에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초의가 눈앞에 나타나 꾸벅 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 사이에 지은 시도 한 묶음을 가져왔다. 스승과 제자는 지은 시를 함께 외우고 점검하며 신통한 마음의 계합(契合)을 기꺼워하였다.

너와 헤어져 오래 기다리려니 그리운 마음을 견디기 어렵다. 근황은 어떠하냐? 들으니 훈(訓)은 근자에 막부로 나아갔다 하니 공부를 잃을까 염려스럽다.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말을 삼가 눈과 코와 귀 등 여섯 창문을 막는다면 어디로 간들 수도하는 도량이 아니겠느냐? 보내온 시편은 아직 비정(批定)하지 못했다. 잠시 다른 날을 기다려 보기로 하자.  
(別汝等久, 思念良苦. 近況如何? 聞訓也近赴幕府, 恐奪工夫. 節飮愼言, 以杜六窓, 安往而非修道之場也. 所來詩篇, 尙未批定. 姑俟他日也.)

두 사람은 만나면 기쁘고, 헤어지면 그리워 안타까웠다. 훈(訓)은 승려의 이름인 듯하나 분명치 않다. 공부를 계속 놓지 말 것을 말하고 나서, 훈석(訓釋)에게 주는 말로,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말을 조심하여, 외물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어디로 간들 수도하는 도량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때도 초의는 자신이 지은 시편을 다산에게 보내와 비정을 청했던 듯하다.  

오래 소식 끊겨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근자에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들으니 동쪽으로 지리산에 놀러가서 스승을 구해 강(講)을 마치려 한다더구나. 어떤 이름난 중이 있어 능히 수백 리 밖에 있는 이미 잘 아는 승려를 끌어당길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세월은 황금과 같고, 학업은 하나도 이룬 것이 없으니, 빠져 즐김이 이러해서는 안 될 듯싶다. 다시 더 생각해보아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久阻爲悵, 近所業何事? 聞欲東游智異, 求師畢講云. 未知有甚名宿, 能句引數百里外已熟之闍梨耶. 歲月如金, 學業全空, 恐不得躭擱如是也. 更加商量, 勿貽後悔也.)

다산은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초의의 근황을 물었다. 다산이 초의에게 붓을 든 것은 초의가 지리산으로 가서 불경의 강학을 마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산은 초의가 그런 공부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세월은 황금 같고 학업은 이룬 것이 없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매진해도 시원치 않은데, 그까진 불경 공부에 발목을 붙들려서야 되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초의를 자신 곁에 바짝 묶어두고 경전 공부에 붙들어 두고 싶은 속내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이상 《금당기주》에 수록된 다산이 초의에게 준 일문(逸文)을 갈래별로 나눠 읽어 보았다. 이밖에도 분량 상 이글에서 다 소개하지 못한 글이 10칙 가량이다. 이글의 존재로 다산과 초의의 사제 관계와 교학의 실상이 명백하게 정리되었다. 다산은 본격적으로 불가의 비유를 끌어와 초의를 끊임없이 채근하고 닦달하며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다. 중간중간 불법의 허망함을 지적하여 유가 쪽으로 이끌려는 욕심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개인적인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몇 편의 글은 초의에 대한 다산의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