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공간’이다. 뉴턴 이전에는 모든 변화를 ‘운동’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뉴턴은 단지 ‘물체의 위치 이동’만이 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물질의 양’이 존재하는 그릇이 필요했는데, 이게 바로 ‘공간’이었다. 뉴턴이 제안한 공간 개념은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의 4차원 연속체로 확장됐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바로 이 4차원 시공간이 어떻게 물질로부터 정해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물질이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설명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이론이다. 공간을 둘러싼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논쟁, 그리고 역사적으로 계속된 철학적
논쟁을 이해한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의 참된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정처럼 시공간도 관계다?
‘공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들의 답변은 크게 실체론(substantivalism)과 관계론(relationalism)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시간과 공간이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시간과 공간을 마치 우정이나 사랑처럼 물체나 사건 간의 관계로 돌린다.
데카르트는 물질이 곧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진공’을 인정할 수 없었고, 공간은 ‘충만’하다고 주장했다. 허나 뉴턴에게는 물질과 공간이 같지 않았다. 공간 속에 물질이 들어 있으며, 전혀 부피를 차지하지 않는 물질도 생각할 수 있었다. 단지 물질의 양만이 물질을 대변할 뿐이다.
뉴턴의 절대공간은 사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공간과 개념이 비슷하다. 우주를 상상해보라. 좌우, 앞뒤, 위아래로 무한히 펼쳐져 있는 허공 속에 혼자 떨어져 있는 별이 다른 별들의 중력을 느끼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우주는 달랐다. 그는 뉴턴의 제자 새뮤얼 클라크(뉴턴의 ‘광학’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에게 편지를 보내 ‘텅 빈 절대공간’을 반박했다. 먼저 ‘시간’을 사건들의 ‘먼저’와 ‘나중’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간은 사건들 사이의 선후 관계를 모두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이 없다면 사건도 없을 것이며, 시간도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
이제는 물체들이 절대적인 공간 속에서 옆으로 옮겨지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물체들의 원래 배치를 ‘세계1’이라 하고, 모든 물체들이 나란히 옆으로 옮겨진 새로운 배치를 ‘세계2’라 하자. 모든 논증은 서로 동의하고 공유하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클라크는 라이프니츠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①모든 일에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는 원리(충분한 이유의 원리)와 ②구별할 수 없는 것은 동일하다는 원리를 공유했다.
이 원리에 비추어 두 세계를 비교해 보자. 우리는 ‘세계1’에 살고 있을까, 아니면 ‘세계2’에 살고 있을까? 모든 물체들이 나란히 옆으로 옮겨졌으므로, 사실 ‘세계1’과 ‘세계2’를 판가름할 수 있는 필연적 이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공간 자체를 보지 못하므로 물체들만 봐서는 두 세계를 구별할 방법이 전혀 없다. ‘세계1’과 ‘세계2’는 같은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설명을 통해 공간이 물체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한다. 물질이 없다면 사건도 없고, 공간도 없다. 텅 빈 채 누군가 물질을 채워주길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공간은 없다는 말이다. 논리학에서 자주 쓰이는 ‘오컴의 면도날(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뜻)’도 라이프니츠 편이다. 실체론이든 관계론이든 공간을 눈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점은 똑같다. 그럴때면 ‘절대 공간’은 없다는 가정이 더 단순하다.
여기까지 보면 라이프니츠가 이긴 것 같다. 그런데 뉴턴에겐 필살기가 남아있었다. 바로 처음 나왔던 ‘양동이 논변’이다. 관성운동에서는 물체가 정지해 있는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지 판가름할 방법이 없지만, 회전처럼 비관성운동에서는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움직이지 않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즉 회전한다는 사실로부터 절대적인 참된 운동과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인 운동을 구분할 수 있으며, 절대공간이 실제로 존재함을 추론할 수 있다. 뉴턴은 절대적인 가속도가 절대공간의 존재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절대공간은 진짜 있을까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논리에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의문점이 하나 남는다. 물이 사실은 절대공간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진 별을 기준으로 돌고 있다고 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독일로 훌쩍 넘어가서 에른스트 마흐의 논의를 살펴봐야 한다. 마흐는 별이나 은하들이 물에 모종의 힘을 작용해서 물 표면이 오목해진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런 별이나 은하 같은 물질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물만 있다면, 제아무리 물이 돈다고 하더라도 표면이 오목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 표면이 오목해지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절대운동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자연스럽게 절대공간의 유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도대체 이런 문제가 상대성이론에 뭐가 중요할까? 상대성이론은 물리학 중에서도 동역학이라는 이론에 속한다. 동역학은 시간이 흘러가는 중에
공간 속에서 물체가 어떻게 운동하는가를 밝히는 이론이다. 만일 물체 없는 공간이 의미가 없다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옳다면 뉴턴의 역학은 기초부터
흔들리게 된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논의를 물리학에 구현한 탁월한 이론인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사상적
또는 원리적 뿌리에 마흐가 있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1952년에 출판된 ‘상대성: 특수 및 일반 이론’의 15판 서문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시공간이 물리적 실재인 실제 물체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이려 했다. 공간 속에 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들이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텅 빈 공간’이란 개념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인슈타인은 절대공간의 논쟁에 대해 라이프니츠의 편을 들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일반상대성이론이 공간의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을 지지하는 걸까? 1980년대 이래 물리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살펴보면서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음 편에 전개 될 비유클리드 기하학 이야기는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우정처럼 시공간도 관계다?
‘공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들의 답변은 크게 실체론(substantivalism)과 관계론(relationalism)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시간과 공간이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시간과 공간을 마치 우정이나 사랑처럼 물체나 사건 간의 관계로 돌린다.
데카르트는 물질이 곧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진공’을 인정할 수 없었고, 공간은 ‘충만’하다고 주장했다. 허나 뉴턴에게는 물질과 공간이 같지 않았다. 공간 속에 물질이 들어 있으며, 전혀 부피를 차지하지 않는 물질도 생각할 수 있었다. 단지 물질의 양만이 물질을 대변할 뿐이다.
뉴턴의 절대공간은 사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공간과 개념이 비슷하다. 우주를 상상해보라. 좌우, 앞뒤, 위아래로 무한히 펼쳐져 있는 허공 속에 혼자 떨어져 있는 별이 다른 별들의 중력을 느끼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우주는 달랐다. 그는 뉴턴의 제자 새뮤얼 클라크(뉴턴의 ‘광학’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에게 편지를 보내 ‘텅 빈 절대공간’을 반박했다. 먼저 ‘시간’을 사건들의 ‘먼저’와 ‘나중’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간은 사건들 사이의 선후 관계를 모두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이 없다면 사건도 없을 것이며, 시간도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
이제는 물체들이 절대적인 공간 속에서 옆으로 옮겨지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물체들의 원래 배치를 ‘세계1’이라 하고, 모든 물체들이 나란히 옆으로 옮겨진 새로운 배치를 ‘세계2’라 하자. 모든 논증은 서로 동의하고 공유하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클라크는 라이프니츠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①모든 일에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는 원리(충분한 이유의 원리)와 ②구별할 수 없는 것은 동일하다는 원리를 공유했다.
이 원리에 비추어 두 세계를 비교해 보자. 우리는 ‘세계1’에 살고 있을까, 아니면 ‘세계2’에 살고 있을까? 모든 물체들이 나란히 옆으로 옮겨졌으므로, 사실 ‘세계1’과 ‘세계2’를 판가름할 수 있는 필연적 이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공간 자체를 보지 못하므로 물체들만 봐서는 두 세계를 구별할 방법이 전혀 없다. ‘세계1’과 ‘세계2’는 같은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설명을 통해 공간이 물체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한다. 물질이 없다면 사건도 없고, 공간도 없다. 텅 빈 채 누군가 물질을 채워주길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공간은 없다는 말이다. 논리학에서 자주 쓰이는 ‘오컴의 면도날(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뜻)’도 라이프니츠 편이다. 실체론이든 관계론이든 공간을 눈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점은 똑같다. 그럴때면 ‘절대 공간’은 없다는 가정이 더 단순하다.
여기까지 보면 라이프니츠가 이긴 것 같다. 그런데 뉴턴에겐 필살기가 남아있었다. 바로 처음 나왔던 ‘양동이 논변’이다. 관성운동에서는 물체가 정지해 있는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지 판가름할 방법이 없지만, 회전처럼 비관성운동에서는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움직이지 않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즉 회전한다는 사실로부터 절대적인 참된 운동과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인 운동을 구분할 수 있으며, 절대공간이 실제로 존재함을 추론할 수 있다. 뉴턴은 절대적인 가속도가 절대공간의 존재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논리에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의문점이 하나 남는다. 물이 사실은 절대공간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진 별을 기준으로 돌고 있다고 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독일로 훌쩍 넘어가서 에른스트 마흐의 논의를 살펴봐야 한다. 마흐는 별이나 은하들이 물에 모종의 힘을 작용해서 물 표면이 오목해진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런 별이나 은하 같은 물질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물만 있다면, 제아무리 물이 돈다고 하더라도 표면이 오목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 표면이 오목해지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절대운동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자연스럽게 절대공간의 유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절대공간의 논쟁에 대해 라이프니츠의 편을 들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일반상대성이론이 공간의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을 지지하는 걸까? 1980년대 이래 물리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살펴보면서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음 편에 전개 될 비유클리드 기하학 이야기는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과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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