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7일 화요일

도자기, 불완전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의 재해석

곽경태 / 수레질 항아리_
72×72×70cm, 옹기토, 산청토, 옹기성형기법인 타렴질, 수레질 기법으로 성형, 귀얄 분청하여 재유, 시유 후 1250도 환원 소성, 2010.
  〈수레질 항아리〉와 〈청자 상감다완〉
 
  한국의 경기도 이천 도자기가 영국에 간다. 오는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나흘 동안 런던 사치(Saatchi Gallery)에서 영국 공예청(Crafts Council)이 주최하는 14번째 컬렉트(Collect)를 개최한다. ‘갤러리LVS & CRAFT’(서울 신사동 소재)는 한국의 현대도예 작가를 조명하며 영국에 선보여 왔다.
 
  영국은 ‘본차이나’의 나라다. 뜨거운 홍차를 좋아한 탓에 도자기 문화가 발달했다. 안목이 남다르지만 한국 도자기를 대하는 시선도 특별나다. 이번 전시에 출품될 곽경태의 〈수레질 항아리〉는 자기에 흙냄새가 배어 있을 듯한 형상이다. 도자기 너머의 울림이 있다. 한국 전통인 ‘옹기’ 만드는 기법과 ‘분청’의 페인팅 기법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오래 두고 가만히 쳐다보면, 자연스러운 형태미와 질료의 힘을 느끼게 한다. 좌우 대칭인 아닌 불완전한 형태의 미(美)가 속삭인다. 이 불완전함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은 독특하다. 매끈한 유약을 (발랐을 테지만) 바르지 않아도 그만이다. 인간 내부의 일그러진 ‘심성’이 덩그렇게 녹아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 ‘원죄(原罪)’에 돌을 던질 수 없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둘러싼 군중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고 하셨다. 그 여인 같은 도자기다.
 
  곽경태의 〈수레질 항아리〉는 옹기를 재해석한 자기다. 유약의 재(ash·불에 타고 남은 가루) 함량을 조정해 가마 내부의 불이 지나가는 이동경로, 온도의 높고 낮음의 변화를 리드미컬하게 흘러내리게 해, 재의 색감 변화를 자기에 고스란히 담았다.
 
김복한 / 청자 상감다완
15×15×6cm, 청자토, 청자유약, 2011.
  김복한의 〈청자 상감다완〉은 우선 은은한 느낌이 든다. 자기 선의 흐름이 고급스럽다. 실용적인 그릇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다완(茶碗)은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사발을 뜻한다. 김복한의 다완은 투박하게 한 손으로 쥘 수 없을 것만 같다. 항상 양손으로 떠받쳐야 할 것 같다. 사랑하는 이를 대하듯.
 
  박경리의 《토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천천히 작설을 덜어서 넣고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부은 뒤 다완에 옮겨 붓고 두 손으로 다완을 싸안는다.’
 
  다완은 ‘싸안는다’는 서술어와 잘 어울린다. 〈청자 상감다완〉 안에는 투명한 구름이 노닐고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기물의 두께감을 최소화시켜 40% 빛이 투과되도록 반투명하게 제작된 작품이다. 놀랍다.
 
 
  〈빗살문 발〉과 〈청자 달항아리〉
 
김판기 / 빗살문 발
50×50×20cm, 청자토, 철유, 청자유약, 2017.
  김판기의 〈빗살문 발(Comb-pattern Bowl)〉은 인상적이다. 빗살무늬가 신라토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오래된 무의식의 전통이 도자기에 잠재돼 있다는 의미에서다. 빗살무늬는 선이 엇비슷하게, 어긋나게, 촘촘하게, 직선적으로 반복된 형태다. 마치 여름날 소낙비처럼, 가을 억새처럼 힘차게 기울어진 모습이다. 빗살무늬는 추상적인 무늬의 표현치고는 대단히 심오하다. 어떻게 그런 문양을 고안해 냈을까.
 
  김판기는 〈빗살문 발〉에 대해 “문양의 깊이에 따라 각기 다른 농도로 스며든 유약이 자연스럽게 빛의 변화를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자연스럽게’와 ‘빛의 변화’라고 한 표현이 함축하는 바를 떠올려 본다.
 
  표면에 사용된 철유(유약의 종류. 산화철)는 기물의 내부에 숨겨진 청자유의 깊이 있는 빛과 대조를 끌어낸다. 상반된 선명한 이미지가 윤곽선에 의해 강조된다. 전통기법과 현대적 형태의 질감이 결합된 모습이다.
 
서광수 / 청자 달항아리
44×44×44cm, 청자토, 1995.
  서광수의 〈청자 달항아리〉에 나오는 항아리는 흡사 보름달 같다. 둥둥 떠가는 달덩이다. ‘황색 청자’는 푸른빛이 도는 청자(예를 들어 고려자기의 주류인 순청자나 상감청자)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 구름 위 만월(滿月)처럼 넉넉하다.
 
  넓은 입 언저리, 어깨에서 내려와 동부(胴部)에서 최대로 팽창했다가 다시 좁아진 몸체, 그리고 입 언저리와 같은 굽다리… 균형 잡힌 완벽한 몸체다.
 
  ‘황색 청자’라 해도 청자는 청자다. 청자토를 썼기 때문이다. 황색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까. 굽는 과정에 산소가 충분한 경우 황색 혹은 붉은빛을, 산소가 부족한 경우는 푸른빛을 띠게 된다고 한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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