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7일 화요일

“슬픈 날은 견디라. 지나가면 그리움 되리니”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발소 그림’처럼 나지막한 소리의 시 … 잔잔한 울림, 오래 가
⊙ ‘드높은 열정의 불, 나의 입술은 침묵으로 닫치기를’(〈나의 기도〉 중에서)
지난 2013년 11월 1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앞에서 열린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했다. 푸시킨 동상은 양국간의 문화교류 활성화와 한·러간 문화인문외교 강화를 위해 기획됐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If by life you were deceived,
  Don’t be dismal, don’t be wild!
  In the day of grief, be mild,
  Merry days will come, believe!
 
  Heart is living in tomorrow,
  Present is dejected here,
  In a moment, passes sorrow
  That which passes will be dear.
 
  (*러시아 시를 미국 시인 넬러(M. Kneller)가 영역한 것이다.)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
  러시아의 천재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이 비참한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세상을 향한 순수함과 열정이 시와 소설 속에 번뜩인다. 러시아 황제는 그런 그가 미워 시베리아로, 북극 아래 백해(白海)의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유배시킨다. 이후 푸시킨은 가난과 엄격한 검열에 시달린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신의 강골’로 푸시킨은 문학을 놓지 않았다. 예컨대 농민 폭동의 주모자를 그린 소설 《대위의 딸》을 쓰며 귀족과 농노계급의 대립과 증오를 그리려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암송해 본 시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해외시 중의 하나다. 어쩌면 ‘이발소 그림’처럼 특별할 것도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의 시지만 잔잔한 울림이 오래간다. 힘들어하는 ‘지금’을 이겨내면 먼 날 그리움이 된다는 내용. 정말 그럴까. 푸시킨의 시처럼 가끔 인생을 압축시킨 듯한 시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시는 묵직하다.
 
 
  마흔. 삶은 두 번째 고개로 넘어갔다.
  난 사랑했고 사색했고 싸웠다.
  어딘가에 머물렀었고, 무언가를 보았으며,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었다.
 
  분노는 나를 피해 갔고, 화살도 비켜 갔다.
  총을 맞아 두 군데 작은 상처를 얻기도 했다.
  날개에서 흩뿌려진 물방울처럼 재앙은 날아가 버렸고,
  물처럼 재앙은 옆으로 비켜섰다.
 
  난 첫 번째 고개를 점령했고, 두 번째 고개를 정복하련다,
  어깨에 걸머진 내 짐이 무거울지라도.
  산 너머엔 대체 뭐가 있는가? 산 아래엔 대체 뭐가 있는가?
  내 관자놀이는 위에서부터 희끗해졌다.
 
  마흔. 마지막 휴식처는 그 어딘가에 있을까?
  내 궤도는 어디서 끊어지게 되려나?
  마흔. 삶은 두 번째 고개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 잔은 다 비워지지 않았다.
 
  -사모일로프(박선영 옮김)의 시 〈마흔. 삶은 두 번째 고개로 넘어갔다〉 전문
 
 
  이 시는 러시아의 시인인 다비트 사무일로치 카우프만(줄여서 ‘사모일로프’)이 1960년대 초에 쓴 시다. 관자놀이가 희끗해진 마흔. 어딘가로 달려갔고, 어딘가에 머물렀던, 가끔은 행복한 시간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마지막 휴식처는 알 수 없다. 이 잔이 아직 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모일로프는 1920년 6월 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혈통을 타고났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후방에서 참호를 파야 했다. 1942년 티흐빈 근교 볼홉스키 전투에서 중상을 입게 된다.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다. 그는 푸시킨을 좋아했다. 그의 시집들은 ‘푸시킨적인’ 시집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푸시킨〉은 푸시킨 시를 인용하며 전쟁과 황폐한 내면을 노래한다. 자못 비극적이다.
 
  부서진 역 부근에서
  까마귀 소리처럼
  라디오가 사정없이 고함치고 있었다네. 그러나 갑자기,
  귀 기울여 들어 보고서 난 알아 버렸지,
  내가 그의 말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푸시킨의 시를 읽어주고 있었어.
 
  둘레엔
  아낙네들과 군인들이 잰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지.
  별로 비싸지 않은 군수품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어.
  이가 들끓는 장바닥이 끓어오르고 있었지.
  길 위 모든 것들이 울리고 있었어.
  “사랑, 희망, 고요한 영광의
  기만이 우리를 잠시 위로해 주었지.”(겹따옴표 안의 시는 푸시킨의 시 〈차다예프에게〉의 1~2행)
 
  우리들은 학교에서 이 시를 배웠지
  그리고 이내 잊어버렸어.
  전투와 부상의 기간에 말이야.
  돌진, 돌격, 강 건너기 …
  “젊은 날의 위안들은 사라졌다네,
  꿈처럼, 아침 안개처럼.”(겹따옴표 안의 시는 〈차다예프에게〉의 3~4행)
 
  정신 나간 처녀 둘과
  난 인사를 나눴지. 그녀들과
  장편소설을 써 갈 준비가 돼 있었다네.
  젊은 여자들은 웃고 있었어 …
  “사랑, 희망, 고요한 영광의
  기만이 우리를 잠시 위로해 주었지.”
 
  저 멀리 저녁 풍경이 빛나고 있었지.
  버드나무 위엔 가스 모양 둥지들이 있었어.
  난 처녀의 몸을 껴안았지.
  그녀의 말은 능글맞았어.
  “젊은 날의 위안들은 사라졌다네,
  꿈처럼, 아침 안개처럼.”
 
  그리고 갑작스런 폭탄 투하. 메세르슈미트 전투기들.
  우리는 길가 도랑으로 뛰어들었어.
  꼬질꼬질한 소년과
  준엄하고 풍채 있는 노인이 지뢰로 목숨을 잃었지.
  “사랑, 희망, 고요한 영광의
  기만이 우리를 잠시 위로해 주었지.”
 
  난 살아남았지. 처녀들도 살아남았어.
  안개 낀 날이었지만 청명했지.
  기차역이 화산처럼 폭발해 버렸어.
  구불구불 연기가 피어올랐지.
  “젊은 날의 위안들은 사라졌다네,
  꿈처럼, 아침 안개처럼.”
 
  -사모일로프(박선영 옮김)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푸시킨〉 전문
 
 
사모일로프.
  사모일로프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푸시킨〉은 푸시킨의 시 〈차다예프에게〉를 인용하며 시를 풀어 간다. 다큐와 같은 서사시처럼 그의 삶이, 동시대를 살았던 젊은이의 삶이 겹쳐 보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푸시킨이 ‘젊은 날의 위안들이 꿈처럼, 안개처럼 사라졌다’는 탄식에 사모일로프는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라디오에서 …〉를 썼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2차 세계대전의 무시무시한 공포를 체험한 사모일로프로서는 그런 슬픔이 불가피했으리라.
 
  사모일로프가 인용한 푸시킨의 시 〈차다예프에게〉는 1824년에 쓰였다. 푸시킨은 강골의 시인이다. 어떤 고통에도 패배하지 않으려고 했다. 2년 뒤인 1926년에 쓴 푸시킨의 〈나의 기도〉에는 다시 희망을 노래한다. 사모일로프가 〈나의 기도〉를 읽었을까.
 
 
사모일로프의 국내 시선집.
  마음을 죽이는 나태도
  독을 품은 눈을 가진 시기도
  아첨으로 발리워진 거짓된 친구도
  항상 희망의 갑옷으로
  나의 가슴 옷 입게 하기를
  복수의 세상의 변화가
  나를 화살로 관통치 못하게 하기를
  나의 마음을 헛된 희망의 제물로 바치지 말기를
  내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 차기를
  드높은 열정의 불
  나의 입술은 침묵으로 닫히기를
  -푸시킨의 〈나의 기도〉(양영란 옮김) 전문
 
 
  푸시킨도 때로 절망했지만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항상 희망의 갑옷으로 나의 가슴 옷 입게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드높은 열정의 불/ 나의 입술은 침묵으로 닫히기를’이라고 썼다. ‘이글대는 드높은 열정’이 ‘침묵하는 입술’이란 푸시킨의 역설이 오래 마음에 울린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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