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7일 화요일

교육으로 민족을 지켜낸 유대인 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를 아십니까?

▲ 사진은 아래 내용과는 관계 없음.
보통 나라들은 국가가 멸망하면 50년 내지 100년도 안되어 역사에서 그 흔적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2000년 가까이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했음에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교육의 힘’으로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던 민족을 구해낸 한 위대한 학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탈무드에 소개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그 학자입니다. 
 
그는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의 ‘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유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聖殿)이 불태워지고, 결국 국가를 잃어버리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그리스어,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유대의 파멸을 초래한 이 끔찍한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요? 
 
로마제국 중흥기의 영웅 '카이사르'는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처음 유대 나라를 로마제국으로 편입할 때 대단히 우호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유대인 최고 제사장에게 종교적 통치권을 인정하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군사적 방어권도 허락했습니다. 
 
주요 항구 '야파'와 해상무역권을 돌려주었고, 그리스인과 해상교역의 경쟁관계에 있는 유대인에게 경제적으로 그리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덕분에 유대인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당시 유대인 인구는 바빌론의 1백만을 포함해서 대략 8백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서기 66년의 반란은 지금의 트리폴리인 ‘카이사리아’에서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큰 소송에서 그리스인이 승소한 직후에 발발했습니다. 승소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며 승리를 축하하는 동안 로마군 수비대는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에서도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로마총독 플로루스가 유대인들의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몰수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신성한 성전을 모독한 행위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건 다 참아도 그들의 종교를 건드리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성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로마 수비대를 급습해 병사들을 참살했습니다. 그 뒤 급파된 시리아 주재 로마군마저 성난 폭도들에게 참패당해 퇴각했습니다. 이에 로마황제 네로는 로마제국 최고의 명장인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영국 정복에 참전했던 제10군단 등 최정예 3개 군단과 다수의 외인부대를 주면서 유대를 정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탈출
 
베스파시아누스는 부대를 이끌고 유다왕국을 공격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68년에 그는 유다왕국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유대 열심당 정예군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예루살렘만은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주민들이 굶주려 항복하기를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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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
그 무렵 강경파인 열심당의 무장투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견하는 한 유대인 평화주의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유명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였습니다. 바리새파였던 그는 상황판단과 통찰력이 뛰어난 학자로 유대전쟁이 결국에는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유대교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평화를 얻기 위해 항복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강경파인 열심당에 의해 거절당하자 그는 유대 민족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마침내 길은 하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자신이 직접 로마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포위되어 있던 예루살렘은 아비규환이었고,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하루에도 수천 명씩 죽었으나 아무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자신의 확신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함께 탈출계획을 짰습니다. 제자들은 길거리로 나가 옷을 찢으며 슬픈 목소리로 위대한 랍비 요하난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에게 존경하는 랍비의 시체를 도심 외곽에 매장하여 도시에 전염병인 흑사병이 돌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랍비가 든 봉인된 관을 메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장군을 만나 머지않아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뒤,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유대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조그만 학교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에 놀랐지만 예언이 이루어지면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멸과 랍비학교 개교
 
같은 해 로마황제 네로가 자살했습니다. 그 뒤 세 명의 정치군인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 만에 살해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유대 원정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고 서기 69년 로마 원로원이 그의 즉위를 허락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랍비의 예언이 성취된 데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랍비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황제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임사령관인 아들 '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파멸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도시에 유대학교 ‘예시바’를 세우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이로써 유대 교육과 문화유산이 소멸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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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유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로마제국 최초의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포로로 잡힌 유대인 수는 9만 7천 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유대인은 무려 11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제1차 로마-유대 전쟁으로 인해 유대 민족 태반이 전멸했습니다.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 대지주· 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되고 오직 바리새파만 살아남았습니다. 이제 유대교는 사두개파의 소멸로 예배를 이끌 제사장 곧 사제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후 유대교는 사제 없이 평신도들이 지키는 종교가 되어 평신도 모두가 성경을 읽고 돌아가면서 강론을 하기 위해 글을 익혀야 했고 이후 유대 공동체는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인 랍비가 이끄는 전통이 세워졌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를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로 갔습니다. 거기서 율법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하고 율법학교를 개설했습니다. <토라>를 가르쳐 매년 소수의 랍비를 길러내어 유럽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 마을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시나고그를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전쟁으로 패망한 유대인들의 생존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교육은 곧 신앙입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라는 비록 망해서 없어졌지만 예시바를 통해 유대교와 전통이 전승되기만 한다면 유대 민족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민족을 살려낼 교육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적처럼 지켜낸 것입니다.
 
유대에서는 랍비를 길러내는 율법학교인 예시바 1학년을 ‘현자’라 불렀고, 2학년을 철학자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최고 학년인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생’이라 불리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겸허한 자세로 배우는 자가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 학생이 되려면 수년 동안 수업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율법의 기존정신, 정의와 평등 
 
이러한 전통 속에 율법학교를 졸업한 랍비들은 스스로 ‘평생학생’이라는 자각을 품고 평생 공부하며 살았습니다. 랍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대인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학습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랍비들은 교육을 통해 율법의 기본정신 곧 ‘정의와 평등’ 개념을 유대인들에게 철저히 각인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정의란 공동체 내의 약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능력껏 돈을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습니다. 돈은 자본주의의 효율을 활용해 벌지만 그들은 이를 개인이 쓰지 않고 공동체에 다 내놓아 필요에 의해 나누어 썼습니다. 곧 분배는 공산주의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디아스포라가 2000년 가까이 버텨온 힘입니다. 이러한 원형이 현재에도 살아 있는 게 이스라엘의 키부츠입니다. 
 
또한 평등이란 개념은 세상에 통치자는 하느님 한 분이며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나이 고하, 직위 유무에 불구하고 서로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 사상에 입각해 그들은 도전적으로 질문하고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는 ‘후츠파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 창의성의 근원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비록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 생활을 하면서도 교육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전통과 정체성 곧 민족혼을 2천년 동안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칼 보다 무서운 게 펜’이라는 사실을 역사에서 증명한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이렇듯 교육의 힘이 단절의 위험에 처한 민족혼을 구해내어 그들의 동질성을 지켜내고 이를 토대로 더욱 융숭한 발전을 이루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교육의 힘은 무서운 것입니다. 공동체의 전통과 정체성은 물론 공동체의 미래도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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