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7일 화요일

단테의 《신곡(神曲)》“운명은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꾼다”

왜 타고난 운명은 사람마다 다를까. 어떤 자는 번영하고 어떤 자는 망할까
⊙ 교황 베네딕토 16세 “모든 사람이 마더 테레사가 될 필요는 없다. 각자의 삶에는 나름의 소명이
    있다”
단테의 《신곡》.
  《신곡(神曲)》
  지옥편 제7곡 중에서.
 
  〈아, 미련하도다, 인간이란.
  어찌 이토록 무지몽매에 사로잡혀 있을까?
  너에게 내가 아는 이치를 알려 주마.
  그 지혜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께서
  모든 하늘을 만드시고 그것을 지도하는 천사를 임명하셨다.
  그 때문에 평등하게 빛을 나누면서
  하늘은 서로 마주 빛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속의 영화에 대해서도
  그것을 전적으로 맡아 보는 ‘운명’이라는 여인에게 지휘를 명하여
  헛된 부귀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떤 민족에서 다른 민족으로 어떤 혈족에서 다른 혈족으로,
  사람 재주로는 따를 수 없는 곳에서 옮겨가도록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선고에 따라
  어떤 자는 번영하고 어떤 자는 망하는 것인데,
  그 선고는 풀 속의 뱀처럼 밖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도 운명에는 못 당한다.
  운명이라는 여인은 다른 신들이 자기 영토를 다스리듯
  자기 세력 범위에서는 모든 일에 대비하여 판단하고 처리한다.
  운명은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꾸며
  필연은 운명을 빨리 움직이게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또 저렇게 변하게 되는
  이것이 운명이라는 여인이다.
  그런데 운명을 찬양해 마땅할 자들도 그녀를 원망하고 있다.
  엉뚱한 비난이다. 비뚤어진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축복받고 있으므로 그런 것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시초에 만들어진 다른 자들(천사들-편집자)과 함께 즐거운 듯이
  운명의 테를 돌리며 행복을 즐기고 있다.〉
 
  《신곡》, 허인 譯, 동서문화사, 2016년, p.69~70
 
 
연극 〈단테의 신곡〉 장면. 〈단테의 신곡〉의 단테(지현준 왼쪽)와 베르길리우스(정동환)의 지현준과 정동환. /국립극장 제공
  《신곡》은 단테가 1307년 집필을 시작해 1321년 완성한 작품이다. 《신곡》은 지옥과 연옥, 천국의 세계를 돌아보는 장편 여행담이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단테가 서른세 살 되던 해의 금요일 전날 밤,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 세 마리의 야수를 만난다. 야수들이 단테를 위협할 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야수를 물리친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길잡이가 되어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데 단테는 그곳에서 아파하고 고통받는 수많은 영혼을 목격한다. 그리고 지고천(至高天)에 이르러 단테가 한순간 신의 모습을 우러러 보게 된다는 것이 대략적 줄거리다.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제7곡은 고통받는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왜 타고난 저마다의 운명은 다를까. 어떤 자는 번영하고 어떤 자는 망할까.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운명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신곡》에 따르면, 운명은 ‘풀 속의 뱀처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도 운명에는 못 당한다. 심지어 운명은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꾼다. 그러니 실체를 알 수 없다. 또 ‘필연’이 운명을 빨리 움직이게 한다. 필연(必然)이란 ‘그리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음’을 뜻한다.
 
단테 《신곡》에 나오는 지옥 모습.
  이런 인간의 운명에는 복잡한 종교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가 신이 창조한 세계를 부정하며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고통 받아야 하지?”라고 반문한 것과 같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 2013년)가 추기경 시절에 쓴 《하느님과 세상》(2004년, 성바오로 간)에 인간 운명에 대한 기독교적 해답을 제시한다.
 
  교황은 “모든 사람이 마더 테레사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학자, 위대한 음악가 또는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기술자나 노동자도 성실하고 정직하며 충실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면, 그것이 성공적인 삶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교황 베네틱토 16세.
  베네딕토 16세는 “각자의 삶에는 나름의 소명이 있다”고 규정한다. “삶마다 각자의 표지가 있고 각자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다른 이의 복사본이 되지 않게 하려는 ‘창조적인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한다.
 
  〈삶이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더 높은 차원의 층위들로 올라가면 마침내 죽음을 넘어서 영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중략)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충만한 삶에 이르는 길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습니다.〉(《하느님과 세상》, p.338~340)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은 선택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어지는 것일까.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인 차동엽 신부.
  이 질문을 ‘인생의 목적은 선택하는 것일까, 주어지는 것일까’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몇 해 전 기자와 만난 차동엽 신부는 “둘 다 맞다”고 말했다. 차 신부는 대중신앙서 《무지개 원리》, 《잊혀진 질문》을 쓴 저자다. 그의 말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목적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미국 브루클린연구소에서 1960년부터 20년 동안 아이비리그 졸업생 1500명 중에서 백만장자가 된 101명을 조사했더니 100명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이었고 나머지 단 1명만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택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공의 길은 ‘선택’의 결과란 얘기지요.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 인생의 목적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를 우리는 ‘사명(使命)’이라 부릅니다. 스위스의 저명한 심리학자 카를 융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운명을 확신한 것이 아니라 운명이 나를 확신했다.’”
 
  ‘내’가 운명을 택하든, 운명이 ‘나’를 택하든 중요한 것은 운명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곡》에서 단테는 인간이 운명을 원망하는 것을 ‘엉뚱한 비난이고, 비뚤어진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맞서기보다 불안에 떨며 도망친다. 외면하며 숨어 버린다. 차 신부의 말이다.
 
  “어떤 사람이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쓰였나를 세어 보았다고 합니다.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해요.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차 신부는 “우연이긴 하지만, 신은 불안에 떠는 우리를 최소한 매일 한 번씩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해 준다”고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불안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그 불안을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겠지요. 불안하니까 더 준비하고 불안하니까 더 정진하고 불안하니까 더 노력하자는 얘기입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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