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는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사회 사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환경은 풍족하였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무척 병약했어요. 선천적으로 혀가 기형이어서 생후 9개월 만에 수술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나 병약한 몸과 달리 학문에 대한 열의는 매우 높았어요. 서너 살에 책을 읽기 시작해 다섯 살 때는 아버지 서재의 책을 읽었다고 해요. 건강을 염려한 어른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다 결국 '무도병'이란 병에 걸리고 말았지요. 무도병은 얼굴이나 손, 발, 혀 등이 저절로 심하게 움직이는 병이에요. 의사는 약한 몸으로 지나치게 많이 공부하여 병이 생겼다고 진단했지요. 결국 케인스의 부모님은 공부를 금지하고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놀이와 운동만 할 수 있게 하였답니다.
- ▲ (왼쪽 사진)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새로운 경제 이론을 제시하여 세계대전 후 피폐한 경제를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어요. (오른쪽 사진)미국의 후버댐이에요. 경제 대공황을 겪던 미국은 케인스의 주장에 따라 댐 공사 등으로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지요. /Corbis 토픽이미지·토픽이미지
그런데 얼마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혼란이 찾아왔지요. 은행들이 줄줄이 망할 위기에 처하자, 영국 정부는 케인스를 찾아와 조언을 구합니다. 케인스는 영국 중앙은행이 은행들을 지원하는 방법을 생각하여 영국 정부가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도와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도 그는 무너진 경제를 수습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었어요. 케인스는 피폐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 학계에서도 그의 주장을 외면하였어요. 당시에는 '국가는 경제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을 100년 넘게 믿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경제 대공황으로 위기에 빠진 미국이 케인스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미국 정부는 극심한 실업 문제와 경제 불황을 극복하고자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벌여 국민에게 일자리를 줍니다. 케인스의 의견대로 여러 가지 복지 정책도 마련했고요. 그 결과 국민의 소득이 올라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였어요. 그제야 비로소 학계에서도 케인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였지요.
케인스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경제 이론을 구축하여 세계경제를 위기에서 구한 훌륭한 경제학자였답니다.
[1분 상식] '케임브리지대학'은 어떤 곳인가요?
13세기에 설립된 케임브리지대학은 옥스퍼드대학과 함께 영국의 유서 깊은 명문 대학으로 꼽힙니다. 여러 단과대학 중에서도 수학과 자연학 연구에서 큰 업적을 남기며 성장하였지요. 특히 케임브리지대학은 기본적 강의 외에 교수와 학생의 1대 1 교육을 하여 깊이 있는 지식을 심어주는 전통이 있어요. 진화론을 창시한 생물학자 찰스 다윈,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 경험론을 창시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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