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점(滿點) 낙방'
1980년대에 대학을 가려면 학력고사를 봐야 했다. 12년 치른 학력고사에서 340점 만점을 받은 수험생은 한 명도
없었다. 1992년 마지막 학력고사에서 민세훈씨는 339점으로 만점을 놓쳤다. 민씨는 서울대 법대에 수석 합격했다. 그해 300점을 넘긴
수험생이 예년 열 배 가까운 3만여명이었다. 난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320점대로도 명문대 인기 학과에 떨어진 학생이 숱했다.
대입 수능시험은 1993년 200점 만점으로 시작했다. 첫해엔 두 차례 수능 후 본고사를 봤다. 2차 수능이 너무 어려워 1차를
잘 치른 수험생이 유리하게 돼 불만이 터져 나왔다. 입시 때 혼나고 외환 위기 때 직장을 구해야 했던 94학번들은 스스로 '저주받은 세대'라고
부른다. 수능 만점은 96년 400점으로 바뀌었다. 98년에 나온 첫 만점자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간 오승은씨였다. 과목별 정리 노트를 출간하며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을 끌었다.
가장 쉬웠던 입시 시험이라는 2000년 수능에선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왔다. 58명이 서울대 특차에
지원했고 한 명이 서울대 법대에 낙방했다. 내신이 안 좋았다고 한다. 만점자도 떨어지는 이상한 시험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듬해 시험은 너무
어렵게 출제됐다. '물수능 다음해는 불수능'이라는 경험법칙이 생겼다.
올해 서울대 정시 모집에서 자연계 유일하게 만점을 받은 전
모씨가 서울대 의예과에 떨어졌다. 수능 60%, 면접 30%, 학생부 10%씩 반영했기 때문이다. 전씨는 인터넷에 글을 올려 네티즌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저보다 훨씬 더 인품 좋은 사람들이 의료계에 많이 왔다는 것을 뜻할 수 있으니 한편으로 좋기도 하네요.' 전씨는 수능
점수만으로 심사하는 다른 대학 의예과에 합격했다고 한다.
2000년 고려대 특수재능보유자 전형에서 토플 만점을 받은 수험생이
면접에서 0점을 받아 낙방했다. 수험생 아버지가 불합격이 부당하다며 가처분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무엇이든 하나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기각했다. 서울대 의예과가 수능 만점자를 떨어뜨린 것은 '시험 점수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얘기인 셈이다. 최고 득점자가
공식처럼 으레 어느 대학, 어느 과에 가던 것을 생각하면 새롭기도 하다. 한편으론 200여개 대학 전형 방법이 3000개를 넘는 현실도 돌아보게 된다. 수시·정시 모집에 대학마다 계열마다 수능·면접·학생부 반영 비율이 제각각이다. 누구나 쉽게 납득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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