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최고의 선망 직업 중 하나다. 고교에서 이과 상위권은 대부분 의과대학을 희망할 정도다. 하지만 청소년은 물론 학부모 대부분 의대를 졸업하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가능성이 열려있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 아니, 큰 관심이 없다. 그저 돈 잘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이라는
점만 고려한다. 그래서인지 의대 진학 후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의사 자격증을 갖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진로에 대해
알아봤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의대, 길고 고되다
의대를 나오면 꼭 환자 보는 의사만 하는 걸까. 아니다. 의학엔 크게 3가지 영역이 있다. 해부학·생리학 같은 기초의학, 성형외과·피부과 등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임상의학, 마지막으로 법의학·의료법윤리학 같은 사회학적 측면이 포함된 인문사회의학이다. 어떤 영역이든 공통점은 있다. 수련과정이 길고 고되다는 점이다.
연세대 의대 본과 3학년 배재영(21)씨는 “고교 때 의대 입학한 선배를 보면서 의대만 들어가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험난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줄 미처 몰랐다는 거다. 배씨는 “본과 1학년에 딱 올라오니 그야말로 살인적인 공부량이더라”고 했다. 같은 학년 박서진(24)씨는 “본과 1학년이 된 순간부터 늘 오전 6시 40분에 일어나 밥 먹을 때 빼고는 계속 공부만 했다”며 “매일 새벽 2시쯤 자는데 평소 운동안한 걸 후회할 만큼 체력이 달린다”고 말했다.
전우택 연대 의대 교무부학장은 “의학은 10년 이상 공부해야하는 마라톤 학문”이라며 “트레이닝 과정이 워낙 긴 직업이다보니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전병율 연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의대를 지원하기 전에 역사 속 의학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전 교수는 “의학 발전 초기와 산업혁명 이후, 그리고 현대의학 진입과정, 나라별 발전상 등 의학 흐름을 살펴보면 의학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 알 수 있다”며 “의학이 왜 필요한지, 의사가 되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미리 가늠해 보면 진로선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36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정신의학 강의
장면
|
김성완 서울대 의대 의공학과(석·박사 전공) 교수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차세대 우주왕복선을 만들던 과학자다. 과학자가 왜 의대 교수로 있는 걸까. 김 교수는 “내시경 카메라, 미세수술을 위한 로봇팔, 인공장기 등은 의학과 항공우주공학을 융합한 의공학 분야”라며 “의공학은 인체에 대한 이해와 공학적 기술을 두루 갖춘 융합형 전공”이라고 말했다. 국내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다. 현재 서울 의대 의공학과에는 의대 출신 50명뿐 아니라 공대 출신 80명이 함께 연구하고 있다.
의대 졸업 후 전공할 수 있는 분야는 의공학과 외에 법의학도 있다. 미국 드라마 CSI를 떠올리면 된다. 유성호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국내에 드문 법의학자 중 하나다. 법의학은 인턴까지는 일반 임상을 하고 레지던트 과정에서 병리학을 전공한다. 국내에 법의학 교수는 15명, 법의학자는 43명 뿐이라 앞으로 수요가 늘어날 분야다. 유 교수는 “전문의 이후 국방과학연구소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들어가 부검이나 유전자검사 등의 작업을 한다”며 “사망률·자살률 같은 국가 기초 자료를 확립하는 데도 기여한다”고 말했다.
공무원이 되는 길도 있다. 연대 전병율 교수가 대표적이다. 전 교수는 특채로 공직에 들어가 의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보건복지부 대변인을 역임한 후 2011년 질병관리본부장에 취임했다. 2013년 임기를 마치고 대학에 왔다. 전 교수는 “그 어려운 의대 공부를 하고는 왜 의사가 아닌 공무원을 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의사로의 소명도 있지만 예방의학자로의 소명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보건분야 공무원은 의사 면허가 있는 사람이 공무원 특채 시험에 응시하면 된다. 채용되면 의료 정책이나 질병관리 정책 등의 업무에 투입된다. 예를 들어 조류독감(AI) 등 전염병을 관리하고 건강보험제도나 장애인 복지, 학교 보건 등 국민 건강에 관련한 모든 부분을 의사의 시각을 더해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전 교수는 “의대 나왔으니 의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구태의연한 생각”이라며 “의학을 기반으로 사회 전반에 기여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할 뿐더러 수요도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임상의는 질병만 다루는 게 아니라 환자와 대면한다. 임상의 중 환자와의 직접적 접촉이 가장 적은 게 마취과다. 전윤석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수술장에서 환자 상태를 지켜보며 마취액을 조절한다”며 “자동차 운전하는 것처럼 수술 내내 핸들을 잡고 운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레지던트 과정 이후 통증과와 마취과로 나뉘는데, 통증과는 환자를 직접 만나 통증 관련 시술이나 진료를 하고 마취과는 수술장에서 환자 상태에 맞춰 마취를 한다. 미국에선 최고의 인기 전공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전윤석 교수는 “의학은 인류에 기여하는 학문”이라며 “임상의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가 고루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의대는 곧 임상의라는 편견을 깨고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전문 분야로 도전하라”고 덧붙였다
꿈 없는 사람은 도태된다
서울 모 의대 본과 3학년까지 다녔던 이모(35·여·패션 디자이너)씨는 의대 5년이 가장 힘겹고 괴로웠던 시기였고 회고한다. 이씨는 “겁이 많아 피는 물론 주사바늘 보기도 힘들어 본격적인 실습을 시작하는 본과 3학년 2학기 말에 자퇴했다”며 “아버지가 의사인 데다 공부를 잘해 당연히 의대를 갔는데 너무 후회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며 “자퇴할 때 주변에서 남들 다 하는 걸 왜 못 참았느냐고 핀잔을 주는 것도 싫었다”고 했다. 이씨는 “인간애 있는 친구가 의학공부도 잘하더라”며 “남 살리겠다는 의지 없이 덤볐더니 나만 죽겠더라”고 덧붙였다.
연대 본과 3학년 박진우(25)씨는 의학전문대학원(이하 의전원) 학생이다. 의전원은 본과 학생과 수업을 같이 듣는다. 박진우씨는 “대학에서 생화학 전공하고 졸업 후 의전원에 들어왔다”며 “목표만 확고하다면 꿈을 이룰 방법은 반드시 있다”고 말했다. 의대 출신이 아니어도 꿈이 있다면 의사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같은 학년 박준철(25)씨도 남다른 이력의 소유자다. 박씨는 “의대에 가고 싶은데 그 성적에 무슨 의대냐고 비웃을까봐 말도 못꺼내는 학생도 있을 것”이라며 “나도 지방의 일반고 출신이라 그런 시선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꿈이 있다면 계획을 세우라고 권했다. 자신은 5개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5년간 학과를 기계공학과에서 생명과학과, 다시 생명공학과, 그리고 의예과로 4번 바꾸며 편입 한 것도 목표에 다가서는 과정이었다. 박씨는 “수능을 못 봐 의대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꿈에 많이 다가와 있다”고 했다. 박씨는 “의사가 되는 방법이 반드시 재수만은 아니다”고 조언했다.
대학에서 다른 학과 전공 후 들어가는 의전원은 최근 많이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다. 2015년이면 의전원에서 의대로 전환하는 학교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의전원을 운영하는 학교가 적지 않고 의대로 전환하며 편입생에게 문호를 넓혔기 때문에 의전원과 의대편입은 충분히 노려볼만한 루트다.
‘사’자 직업의 매력과 함정
의사는 변호사·회계사·약사 등 소위‘사’자 돌림의 대표적 직업이다. 이 직업의 공통점은 전문성과 안정성이다. 그럴듯하게 보여 심심찮게 청소년 희망직업 1순위로 꼽히기도 한다. ‘하얀거탑’이나 ‘뉴하트’‘신드롬’ 등 메디컬 드라마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주인공 의사가 현실 세계와는 사뭇 동떨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칫 이를 본 청소년이 의사라는 직업의 세계를 잘못 이해할 우려가 있다는 말이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인간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 관심과 예의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미국의 한 의과대학에서는 건물 청소부의 이름을 쓰는 시험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자기가 공부하는 곳의 청소부에게 인간적 관심을 갖는 학생에게 후한 점수를 주겠다는 게 교수의 의도였으리라.
환자와 눈을 마주치며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태도, 환자와 공감하는 대인관계 능력,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위해 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의사라는 직업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정해진 스케줄대로 질서있게 살며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 또 환자의 병만 보고 사람은 보지 않는 사람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인생 최악의 함정이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와 직결된다. 자신의 장단점과 그 직업의 하는 일을 꼼꼼히 탐색해 직업 가치관과 삶의 가치관 모두를 펼쳐놓고 결정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지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진로직업정보센터장
의과대학은 예과 2년을 마친 후 본과부터 본격적인 의학 수업을 받는다. 연세대 임상실기 교육센터에서 본과
3학년 학생들이 응급의학과 심폐소생술(CPR)교육을 받고 있다.
|
예과 1학년땐 신문 정독, 2학년은 소설 쓰기로 인성 쌓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의 2015학년도 입시정원은 77명. 수시에서 55명, 정시에서 22명을 선발한다. 연대 의대는 의학과 타 학문간 연계한 영역으로 진출을 적극 권장한다. 의학과 IT, 의학과 경제 등 여러 학문을 아우른 융합전문가를 배출하겠다는 의도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모델이다.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미 아이비리그 명문 다트머스대 총장 역임 뒤 세계은행 수장이 된 김 총재는 하버드 의대에서 의학과 인류학을 함께 전공했다.
전우택 의대 교무부학장은 “연대 의대는 의학과 더불어 의대생의 인문사회학적 역량도 중시하는 독보적인 학교”라며 “인성을 갖춘 전문인을 길러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연대 의대에 입학하면 예과 1학년은 송도캠퍼스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 이곳에서 기본적 인문사회 소양과 기초 과학지식을 갖추고 사회성도 기른다.
연대 의대의 이런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게 예과 1학년 전원이 듣는 ‘의학의 이해’ 수업이다. 고교까지 공부만 한 우등생들에게 대학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갖게 해주기 위해 신문을 정독하는 독특한 커리큘럼이다.
신촌캠퍼스로 옮겨오는 예과 2학년엔 1년 동안 다른 학과 수업을 많이 들으며 죽음을 주제로 한 신춘문예 소설을 준비한다. 2학년 전원이 소설을 쓴다는 얘기다. 이는 생로병사, 그리고 삶의 소중함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다.
전 교무부학장은 “인성을 갖춘 의사로 기르기 위한 기초 트레이닝 과정”이라며 “이런 과정을 통해 임상의만이 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의학도가 인간을 대하는 기본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본과에 올라가면 본격적인 의학 수업이 시작된다. 공부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본과 2학년이 되면 임상 의학을 이론으로 배우지만 본과 3학년부터는 병원에서 실습을 한다. 본과 4학년 때는 ‘특성화 선택과정’을 통해 진로와 관련한 경험을 쌓는다. 8주간 국내외 대학병원이나 언론사·로펌·비정부기구(NGO) 등에서 일하며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는다. 꼭 의사만이 아니라 의학전문기자나 의학전문변호사 등 다양한 진로를 미리 체험하는 기회를 갖는 셈이다. 졸업과 동시에 의사국가고시를 치르는데 합격하면 일반의로 개원하거나 대학병원 등에서 인턴으로 수련한다.
의대는 필수 과목 수가 많기 때문에 학생 이수 과목과 이수 학점이 전원 동일하다. 그러나 연대 의대는 학생들 이수 과목이 다 다르다. 학생 개개인이 원하는 선택 과목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커리큘럼을 짜놓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융합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배려다. 또 국내 의대 최초로 2014학년도 본과 1학년부터 학점제를 폐지하고 전 교육과정을 절대평가(Pass/Non-pass)로 전환했다.
중앙일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