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혹시 특별할까. 막상 그의 방 책상을 보니 평범 그 자체였다. 방에 놓인 가구는 책상과 책장·침대가 전부였다. 특이한 게 하나 있기는 했다. 지난해 8월부터 키우고 있는 애완용 도마뱀(레오파드게코)인 ‘호랑이’다. 독서실 책상까지 갖다놓으며 공부하는 애들도 많은데 이 평범한 책상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방법은 뭘까. 바로 학습 전 책상 정리다. 그는 “공부 시작 전 책상과 방을 깨끗이 정리해야 집중이 잘 된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청소다. 대원외고는 청소 시간이 오전 7시50분으로 정해져 있지만, 고군의 반은 오전 7시20분에 시작한다. 고군이 일찍 등교해 청소를 하고 있으면, 같은 반 친구들이 함께 돕는다. 덕분에 그의 반은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좀더 여유가 있다. 다른 반이 청소하느라 분주할 때 고군의 반은 수학 문제를 풀거나 그날 수업을 예습한다. 그는 “리더의 중요 덕목 중 하나가 솔선수범”이라며 “내가 먼저 청소를 시작하면 반 친구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말했다.
고군은 솔선수범뿐 아니라 상부상조(相扶相助)도 한다. 바로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중2 때 반 친구들이 고군에게 모르는 수학 문제를 물어본 게 시작이었다. 친구 4명이 똑같은 문제를 물어오면 4명에게 따로따로 설명해야 하니 시간낭비였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고민하던 중 멘토링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이때부터 친구 4명과 함께 수학·과학·역사 등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을 하나씩 정한 뒤 서로 잘하는 과목은 가르치고 부족한 과목은 배우면서 함께 공부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열반(당시 반포중은 수학 우열반이 있었다)에 있던 학생이 다음 시험에서 우반으로 올라간 거다.
고군은 대원외고 입학 후에도 이 학습법을 이어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대원외고는 우수한 학생이 많이 모인 곳이라 훨씬 더 효율적일 거라 생각했다. 지난해 5월 영어회화 수행평가인 ‘설득적 말하기’ 시간에 자기 생각을 말했다. 다른 학생들이 “견과류를 먹자”거나 “기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주제를 말할 때 고군은 “일대일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자”고 반 친구들을 설득한 거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다른 사람을 도우며 공부한 학생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 반 전체의 호응을 얻었고, 그렇게 멘토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잘하는 과목은 가르치고 못하는 과목은 배우는 방식이었다. 고군은 “멘토일 때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복습하고, 멘티일 때는 부족한 과목을 무료로 배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라며 “2학년 때도 계속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위부터)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책에 풀이 과정을 적는다. 집중이 잘 안 되면 피아노곡을 작곡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기타 연주는 취미 생활 중 하나다.
그가 우수한 성적을 받은 또 다른 비결은 공책에 있다. 초등 6학년 때 라디오에서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영어 교과서를 베껴 쓰라”는 광고를
들은 게 계기가 됐다. 중1 때부터 시험 기간마다 과목별 공책을 만들었다. 교과서와 교재를 공부한 뒤 머릿속에 저장한 내용을 공책에 써 보는
방식이었다. 초반에는 두서없이 적어 내려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하우가 쌓였다. 단원명, 소주제, 중요 포인트 등을 꼼꼼하게 표시하니 시중에
나온 교재보다 훨씬 훌륭한 ‘나만의 참고서’가 만들어졌다. 가장 유용한 건 역사·세계사 과목이었다. 공책 두 쪽에 시대별로 발생한 사건을
정리하다 보면 역사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든 공책이 60여 권이 넘는다. 그는 “시험 전 날 노트만 보면서 마무리
정리한다”며 “교과서나 자습서에 있는 내용은 노트에 다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고군이 이렇게 스스로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던 데는 외할머니 이창숙(80·서울 청파동)씨 영향이 컸다. 엄마 우정주(48·서울 방배동)씨가 직장맘(을지의대 교수)이라 초등 2학년 때까지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고군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문제집 채점을 도맡아 했다. 인성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는 꼭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습관을 기르게 했다. 고군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모두 할머니에게 배웠다”며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컸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고군의 뛰어난 발표력도 할머니 교육 덕분이다. 할머니는 병욱군이 말을 곧잘 하던 3~4살 때부터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스피치 연습을 시켰다. 빌라 정원 화단에 올라서서 자기소개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어머니 우씨는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며 “초등 1학년 때 공개수업을 갔더니 아이가 발표를 지나치게 열심히 해서 다른 엄마들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예술적 감성을 키운 것도 할머니 힘이다. 고군은 “할머니는 요즘도 시를 쓸 정도로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분”이라며 “어렸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자연스레 창작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공부도 잘하고 예의 바른 모범생. 너무 뻔하다. 그런 그에게 다른 전교 1등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거다. 많은 전교 1등이 고학년에 올라가면 집중이 안된다며 스마트폰을 반납하고 학업에 집중하는 것과 다른 모습이다. “스마트폰을 쓰는 게 불안하지 않냐”고 물으니 “내 손에 있을 때 자제를 못하면 내 손을 떠나도 마찬가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만큼 자기 관리에 자신있다는 얘기다. 그의 꿈은 뭘까. 현재는 대통령이다. 솔직히 초등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이 자신의 꿈을 대통령이라고 말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어서인지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뒤 한국국제협력단(KOICA) 남미지부에서 3년쯤 봉사하며 현장 경험을 쌓고, 로스쿨에 들어가 법조인이 되는 게 1단계란다. 의사·영화감독·국제기구 남미 전문가 등 그가 과거 꿈꿨던 직업은 다양했다. 공통의 키워드는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대원외고 스페인어과에 진학할 때는 남미의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남미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경제모델을 개발하는 게 목표였지만, 국내에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고는 대통령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소중한 한 표 부탁합니다. 더 살기 좋은 대한민국 만들겠습니다.” 그의 너스레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중앙일보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