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2일 토요일

이중섭, 격동기 시대의 울분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이중섭(李仲燮·1916~56)은 격동기 한국 근대사의 풍운아다. 그의 그림에는 분노와 격정이 있지만 내면에는 더없이 따뜻한 가족애가 살아 숨 쉰다. 누가 그를 광기의 천재라고 했던가.

그는 단지 어렵고 힘든 시대를 만나 인간적인 정과 세상의 틈 사이에서 고뇌하고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며 열심히 내일을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꽃처럼 살다간 한 불행한 사내였다.

통영에 살던 시절 제작된 <황소>는 이중섭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는 생애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주제로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지내야 했던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자신의 실존을 반영한 것이다. 가난과 이산의 아픔을, 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을, 울부짖으며 휘저어 내뱉는 황소의 모습으로 승화시켰다.

황소
(부분), 1953~54년, 종이에 유채, 28.8×40.7cm, 리움 삼성미술관">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명문 지주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희주는 이중섭이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은 정주 오산학교 시절 서양화가 임용련에게 미술 지도를 받으며 시작됐다.

훗날 들판에 풀을 뜯는 황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소를 좋아해 소와 입맞춤한 아이라고 소문이 날 만큼 소는 이중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림의 소재가 됐다.

이중섭은 오산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할 때, 중섭을 한글로 풀어 ‘ㅈㅜㅇㅅㅓㅂ’이라고 썼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이름조차 일본 이름으로 바꿔야 하는 암울한 시기였기에 한글로 표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주장이었다.

1935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文化)학원 미술학부 양화과에 입학해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토대로 한 자유롭고 진취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학습은 프랑스 화가 루오의 거친 붓 터치를 닮은 <황소> 그림을 완성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중섭은 분카학원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평생의 반려자로 만나게 된다. 마사코는 미쓰이 그룹의 일본창고주식회사 사장의 딸로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가톨릭 가정의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마사코가 한국인과 사귀는 것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은 점도 이러한 연유가 있기에 가능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심해지자 원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그 해 연말부터 도쿄에 있는 마사코에게 그림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엽서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가 파도를 거슬러 오르고, 아이들이 물고기를 안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창세기 풍경과 당나귀, 말, 소와 여인이 함께 유희하는 신화적 풍경이 등장한다.

때로는 기하학적 추상무늬와 서커스의 줄타기 같은 순수 조형의 이미지도 보인다. 당시는 나혜석, 구본웅, 장욱진, 김환기 등 대다수의 조선 유학생들이 도쿄에 유학하면서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큐비즘, 그리고 근대 조형에 눈을 뜰 때였다.

이중섭도 이러한 시류에 편승해 고전주의적 사실기법에서 탈피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게, 물고기, 복숭아, 새, 황소 등으로 분화해 더욱 자유분방해졌고 인물의 풍부한 동작으로 자신의 내면을 펼쳐보였다.

1945년 4월, 편지로만 주고받던 연애는 마사코가 현해탄을 건너 원산에 도착함으로써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 해 5월에 둘은 전통 혼례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의미로 남덕(南德)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남덕. 일본인 마사코가 한국인 남편을 만나 이남덕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 해 8월 해방이 되고 원산에 서서히 공산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할 무렵 첫 아들이 태어났지만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중섭은 죽은 아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심심할까 봐 길동무 하라고 무릉도원에서 복숭아를 들고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노는 그림을 그려 함께 묻어 주었다.

1947년과 49년 태현과 태성 두 아들이 태어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집이 폭격을 당하자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원산부두에서 떠나는 해군 후송선을 겨우 얻어 타고 부산에 도착해 피난민 수용소에 머물게 됐다. 이때부터 이중섭의 인생은 끝없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제주도 풍경

, 1954년, 종이에 잉크, 35×24.5cm, 개인 소장">1951년 아직 봄기운이 싹트기도 전에 가족과 함께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건너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했는데, 피난민에게 주는 얼마 안 되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했다.

허기가 몰려오면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아 반찬으로 먹었는데 이때의 풍경이 바닷가에서 게, 물고기와 함께 노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중섭의 부인은 “제주도 시절 어찌나 먹을 것이 부족하던지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게나 조개를 잡아서 먹었는데 남편은 그것이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죽은 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게를 그린다고 말하곤 했지요”라고 당시의 곤궁한 상황을 회상한다.

1952년 2월 이중섭이 종군화가로 입대해 가족을 돌볼 수 없자, 그 해 7월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돌아갔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가 오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구상은 그 무렵의 이중섭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중섭은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나르다 쉬는 짬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파도처럼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섶 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 1951년, 나무판에 유채, 41×71cm, 개인 소장">
그 시절 이중섭은 그림 그릴 캔버스와 물감은 고사하고 연필과 종이조차 없어 미군들이 피우고 버린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은박지의 얇은 표면을 쇠못이나 뾰족한 꼬챙이로 긁어내면 선이 남는데 거기에 유화 물감으로 채워 넣으면 선이 보여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중섭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은지화의 탄생은 절실한 생활고에서 기인했다.

통영
, 1954년, 종이에 유채, 41.5×28.8cm, 개인 소장">아내와 꿈같은 시절의 사랑을 그리는가 하면 아이들이 해변에서 뛰어노는 풍경을 담기도 했다.

은박지 그림은 1955년 1월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기도 하는 소동이 있었지만, 그 해 5월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 전시된 은박지 그림 석 점을 사들인 당시 미국문화원 책임자 맥타가트는 작품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했다.

1953년 이중섭은 임시로 마련한 선원증으로 아이들과 부인을 보러 도쿄로 건너갔지만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 두려워 6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아름다운 그 짧은 순간들은 이중섭이 가족들과 함께 지낸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들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통영으로, 대구로, 서울로, 친구 집을 떠돌며 오직 그림 그리는 데 몰두했다.

아무리 그림에 몰두한다고 하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어린 아이들과 아내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길 떠나는 가족>은 그때의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길 떠나는 가족
, 1954년, 종이에 수채, 10.5×25.7cm, 개인 소장">
아빠가 고삐를 쥐고 있는, 꽃 장식을 한 황소 달구지에 엄마와 두 아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타고 있다. 이중섭은 삶의 기쁨으로 먼 길 떠나는 가족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그림 속에서나마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을 만나고 있다.

“태현에게. 나의 태현아, 건강하겠지. 친구들도 모두 잘 있니? 아빠도 잘 있단다. 아빠는 전람회 준비에 몰두하고 있어.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어. 이만, 안녕. 아빠 ㅈㅜㅇㅅㅓㅂ.”
편지 그림, 제작연도·크기 미상,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이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헤어져 살아야 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환을 아무리 그려내고 불러본들 이중섭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중섭은 서울과 대구에서 몇 번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후 경제 사정이 좋을 리가 없어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았다. 몇 점 팔았다고 해도 대부분 술값으로 탕진하고 말았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작품전이 물거품이 되자 “나는 그림을 그린답시고 세상을 속였어. 놀면서 공밥만 얻어먹고 뒷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저렇게 세상을 위해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 혼자 그림만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고…”라고 자조하며 작품이 팔리지 않는 것에 실망과 분노를 드러냈다. 그 후 폭음과 영양 부족까지 겹치며 극도의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린 마지막 시기의 그림 <나무와 달과 하얀 새>와 절필화 <돌아오지 않는 강>은 모두 예술가의 생의 마지막에 누렇게 뜬 얼굴빛처럼 창백하다.


, 1955년, 종이에 크레용과 유채, 14.7×20.4cm, 개인 소장">
1956년, 봄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했다가 정신 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그 해 여름, 간염이 악화돼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다시 입원했다.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병실을 찾아오는 친구들의 발걸음도 뜸해지고, 황달기가 있는 그의 몸은 점점 부어올랐다.

‘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 간장염으로 입원가료 중 사망. 이중섭 40세.’

신문 보는 사람
, 1955년, 은종이에 유채, 9.8×15cm, MoMA">이중섭의 주검은 무연고자로 사흘 동안 영안실에 방치돼 있었으며 하얀 시트에는 그동안 밀린 병원비 계산서만 덩그마니 붙여진 채 적십자병원 영안실 흑판에는 이렇게 짤막한 문구만 남아 있었다.

시인 고은은 <화가 이중섭>에서 ‘한 예술가의 비극적 삶과 예술의 성취’라는 부제를 달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술가에게는 그의 예술이 남겨져서 누리게 되는 예술적 명예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예술 이상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될, 여느 사람으로는 해득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그러므로 행복한 예술가란 없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행복을 설정하는 일은 고전적인 이해로서는 가장 어리석다. 그러나 예술가가 받아들이는 비극을 얼만큼 그의 예술에 관련시키느냐에 의해서 예술가와 예술적 치정(癡情)이 나누어진다. 예술가가 비극의 용도를 모를 경우만큼 비참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가가 너무나 일찍 비극 따위를 벗어나서 행복한 노인이 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비참한 일이다.”
돌아오지 않는 강
, 1956년 무렵, 종이에 유채, 20.2×16.4cm, 개인 소장">예술가에게 비극이란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비극적 삶은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하는 일종의 장치다.

고은은 이중섭이 행복을 버리고 행복의 개념을 비극을 통해서 거의 생득적으로 알아버린 예술가로 “…나는 오래전부터 감탄해 왔다”라고 쓰고 있다.

과연 그럴까. 자신의 비극을 예견하고 정면으로 부닥치며 살아가는 예술가는 그 시대건 오늘이건, 아니 내일이건 언제라도 있겠지만, 스스로 비극적인 삶이 예술을 위해 필요하다고 자각하고 살아가는 예술가가 몇 명이나 될까.

화가도 평범한 인간이요, 가족과 세상을 행복하게 바라보며 작업하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평범과 행복은 예술의 조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남다른 비극과 불행이 예술가에게는 정신을 불사르고 열정을 꺼내어 혼신의 힘으로 창작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에서 주인공 소화의 아버지가 ‘소리’를 위해 딸에게 한약재인 부자(附子)를 넣어 먹여 눈을 멀게 하고 한(恨)이 담긴 소리를 얻어내는 비극적 이야기는 예술의 길이 얼마나 멀고 어려운 일인지 새삼 생각하게 한다.

서편제의 한 맺힌 소리나 이중섭의 울부짖는 황소 그림이나 모두 하나다. 비극은 희극보다 훨씬 울림이 크다. 예술은 비극을 먹고 태어나는 희극이다. “이중섭은 이 세상에 있다. 그는 어디로 떠나간 것이 아니다”라는 고은의 말처럼 그는 아직도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있다.

글·그림 최선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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