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양돈업의 씨앗을 뿌리다… 아일랜드 신부 맥그린치
- 아일랜드 출신인 벽안(碧眼)의 가톨릭 선교사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4월 제주 서쪽 한림읍에 내렸다. 그리고 오늘까지 60년을 머물렀다. 그는 제주 사람들에게 ‘그거 안 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황무지를 개척해 돼지와 양을 기르고 제주도민 자립을 위한 일자리를 계속 만들어냈다. 그는 지난 4일 제주에서의 60년을 돌아보면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아는가. 좋아함은 기분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초월과 의지더라”고 말했다. /사진작가 준초이
"좀 더 위생적인 방법으로 돼지를 길러 팔아 보십시오.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4·3사건과 6·25전쟁을 잇따라 겪은 제주도 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당시 제주에서 돼지는 경조사 때 잡아먹거나 빚에 너무 치이면 급전(急錢)을 마련할 수단일 뿐 가난을 벗어날 발판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흐른 1950년대 말 맥그린치 신부는 인천에서 전남 목포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그의 곁엔 동행자가 하나 있었다. 요크셔 품종 암퇘지였다.
지난 4일 제주 서부 한림읍 '성(聖) 이시돌목장' 옆 사제관에서 만난 맥그린치(86) 신부는 꽤 유창한 한국말로 "목포까지 기차로, 제주까지는 배를 타고 갔다. 사람들이 우릴 보고 깔깔대며 재미있어했다"고 말했다. "경기도에 피정(避靜·가톨릭 신자의 일상에서 벗어난 수행) 갔다가 새끼 밴 돼지 한 놈을 사온 겁니다. 놓을 데가 없어 성당 마당에 놓고 길렀죠."
놀거리 없던 시절이었다. '성당에 거대한 꽃 돼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수많은 사람이 '사제의 돼지'를 보러 왔다. 이 돼지가 후일 제주 경제를 부축해 세운 양돈(養豚) 사업의 발화점이 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없었다. 돼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열 마리를 낳았다. 신부는 이 돼지를 제주의 아이들에게 돈 받지 않고 나누어 주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돼지를 변소에 넣지 말 것. 암퇘지가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를 돌려주는 방식으로 돼지 값을 상환할 것.' 아이들은 신이 나서 돼지를 길렀다. 어선(漁船)에서 내던진 생선 찌꺼기에 클로버와 보릿겨를 섞어 사료를 만들었다. 한림 일대에서 돼지들이 쑥쑥 자랐다.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맥그린치 신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말했다.
"아휴, 바보! 나 말입니다. 제주를 너무 몰랐어요. 쉽게 성공할 줄 알았던 그 계획은 오래지 않아 실패했어요."
아일랜드 레터켄 출신인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4월 선교사로 제주에 왔다. 올해로 제주 생활 60년째다. 선교에 앞서 먹고사는 문제를 급하게 해결해야 할 시절이었다.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소속돼 한국에 온 그는 이후 황무지였던 제주의 산기슭을 개간해 목장을 만들었다. 그가 일군 성 이시돌목장에선 그동안 돼지·양·소·말을 길러내 제주 사람들을 도왔다. 또 실습 농장을 만들어 축산업·낙농업을 가르쳤다. 덕분에 성 이시돌목장이 있는 한림은 현재 제주에서 양돈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제주 양돈 농가의 절반 정도인 120여 농가가 한림읍에 있다.
12세기 스페인에 살았던 농부 출신 가톨릭 성인(聖人) 이시도로(Isidore)에서 이름을 딴 성 이시돌목장의 면적은 여의도보다 약간 작은 16만5000㎡다. 단지 안엔 목장뿐 아니라 양로원·성당·어린이집·수녀원·호스피스병원이 있다. 돌과 바람밖에 없었던 폐허의 제주 위에 일군 맥그린치 신부의 '동산'은 성공적 지역 개발의 상징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 많은 걸 다 성공하게 했나"라고 묻자 맥그린치 신부는 답했다. "여러 번 실패하면서. 때로는 실패가 기적을 낳거든요." 실패의 기적을 듣기 위해 그와 마주 앉았다.
◇"내가 바보였어요. 제주를 몰랐어요"
제주 돼지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아이들에게 분양한 돼지는 계획대로 빠르게 자랐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 돼지를 본 부모들이 '똥 돼지'보다 현대적 방식이 훨씬 낫다고 마음을 바꿀 줄 알았다"고 말했다. 오판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기르는 돼지를 다 크기도 전에 팔거나 잡아먹었다.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고 신부를 찾아와 "신부님, 큰일 났어요. 돼지가 없어졌어요!"라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 60년 전 아일랜드 선교사로 한국 제주도에 부임하던 즈음의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 /임피제(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
"당연하죠. 그런데 당시엔 제주 농가에 집집마다 빚이 있었고 모두 배가 고팠어요. 돼지가 클 때까지 6개월 동안 기다릴 수가 없었을 거예요. 이해합니다."
―애초에 왜 아이들에게 돼지를 분양한 겁니까.
"나는 제주 사람들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산기슭에 양을 기릅시다' '돼지를 번식해 수입을 늘립시다' '산에 돌을 치우고 목초지를 만듭시다'같이 제 나름대로 고민해서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안 됩니다'였어요. 그래서 어른 대신 아이들을 공략해 보자고 한 겁니다. 1950년대 중반에 나는 당시 '4H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머리(Head)·마음(Heart)·건강(Health)·손(Hands)의 앞글자를 딴 세계적 청소년 계몽 운동이었는데 그걸 제주에 들여온 것이지요."
―어른들도 '안 된다'고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전에도 해봤는데 안 됐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많았습니다. 중산간(中山間·제주도의 해발 200~600m 구릉 지대)을 개간해 목초를 심자고 하면 '안 된다. 일본 사람도 했는데 실패했으니까' 이런 식이었지요."
―그래서 아이를 통한 변화를 꾀했는데 그 역시 안 되더라는 거군요.
"당시 한국, 아니 동양 문화권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걸 몰랐어요. 결국 그나마 남은 돼지라도 살려보려고 나누어 줬던 돼지를 거두어서 직접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성당에 돼지 냄새가 진동했어요. 결국 중산간에 땅을 매입해 돼지를 길렀어요. 그게 성 이시돌목장의 시초였지요."
―갑자기 땅이 어디서 나오던가요.
"제주도에 물이 귀하거든요. 그런데 정착 초기에 꿩 사냥하러 다니다 산 중턱에서 우물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어요. 험한 땅이긴 했지만 가축을 기르려면 물이 있어야 하니까 그 언저리가 적당해 보였어요. 땅 임자를 수소문했더니 한림 사는 할아버지래요. 땅을 파시라고 하니까 냉큼 파세요.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3000평(약 9917㎡)짜리 땅을 평당 0.5원씩 1500원에 샀어요. 소문이 나서 제주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서 땅을 줄줄이 팔았어요. '정신 나간 외국인이 쓸모없는 땅을 사간다'고 소문이 난 거죠. 그때 산 땅이 나중에 목장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실패가 성공의 기적으로 이어지다
맥그린치 신부는 선교회와 선진국의 자선단체를 설득해 땅과 돼지를 살 돈을 모았다. 그래도 모자라면 아일랜드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여건이 되는 대로 돈을 보내주다가 한 번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아들! 선교를 하러 한국에 간다더니 왜 자꾸 돼지와 땅만 사는 것이냐.' 그즈음 맥그린치 신부는 한국 안팎에서 '돼지 신부'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농장은 계속 커졌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건가요.
"그렇게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되진 않지요, 하하. 몇 년 있다가 우리는 농장에서 돼지를 번식시켜서 농가에 분양하는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축사를 만들어주고 적어도 20마리씩 무상으로 돼지를 빌려 줘 기르게 했어요. 그리고 미국에서 원조 차원에서 제주에 보내온 옥수수로 배합사료를 만들어서 나눠 줬어요. 최고 좋은 사료였어요. 그런데 참… 또 실패했어요. 왜냐? 돼지가 자라지를 않더라 이거죠."
- ①1960년대 제주 한림읍 성당 근처에서 돼지와 놀고 있는 어린이. ②젊은 맥그린치 신부(가운데)가 미국 휴스턴 텍사스에 모금하러 갔을 때 모습. 뒤편에 ‘한국의 돼지 신부’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③1960년대 말 이시돌 농촌개발협회가 기른 돼지를 홍콩으로 수출하는 모습. ④맥그린치 신부가 양털로 짠 옷을 만들던 ‘한림수직’ 직원들에게 편물 짜는 법을 지도하는 모습. ‘제주 젊은이들이 일자리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자’는 목표로 세운 이 회사엔 한때 1300여명이 근무했다. /임피제(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 제주도청 제공
"그게… 많은 농가에서 사료에 들어 있는 옥수수를 술 공장에 팔고 있었어요. 돼지한테는 보릿겨를 주고요. 물론 나는 화가 엄청 났죠. 사람들을 때리려고도 했고, 하하. 추궁했어요. 그랬더니 빚 없는 농가가 없고 한 달에 이자를 5~6%씩 내야 한다고 했어요. 한 달에! 이번에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결국 돼지 대부분을 농장으로 다시 거두어 왔어요. 그때 생각한 것이 신용협동조합(신협)이었어요. 제주에 제대로 된 금융기관이 없어서 농민들이 사채를 얻어 쓰는 것이 문제였어요. 그 고리를 끊고 싶었죠."
실패담도 아니고 성공담도 아닌 맥그린치 신부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맥그린치 신부는 1960년대 초 '한림신협'을 설립한다. 제주에선 처음, 전국에서 네 번째로 조직된 이 신협은 한림 지역 농민들의 자립을 위한 큰 힘이 되었다. 제주대 행정학과 양영철 교수는 "맥그린치 신부가 도입한 신협을 본떠 제주에 28개 신협이 곳곳에 생겨났다. 이 신협들은 제주 도민들이 고리대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제주를 떠날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들을 고향에 붙잡아두기 위해 만든 것이 양털을 이용한 수직물(手織物) 사업이었다. 아일랜드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부탁해 모은 돈으로 양 35마리를 사서 1960년대 시작한 '한림수직'에선 한때 제주 여성 1300여명이 일했다. 처음엔 실의 굵기가 일정치 않아 억지로 동료 신부들에게 양말을 팔아야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아일랜드 선교회에서 직조 전문가인 수녀 두 명을 초대해 제주 여성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품질 좋은 모직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현실이 된 예언… "우리도 외국처럼"
―선교보다 지역 개발에 열심이셨군요.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거든요. 1950년대 말이었어요. 한 여자아이가 신이 나서 찾아왔어요. 부산에 취직해서 떠난다고 그래요. 삼사 개월 됐을까. 한 남자가 성당 문을 두드렸어요. '우리 공장에서 일했는데 물탱크에 빠져 죽었다'면서 그때 그 아이 집을 찾아요. 화장(火葬)을 꺼리던 시절이었는데 유골함을 들고…. 아주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고향 떠날 필요가 없게 만들어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한림수직을 시작한 거예요."
―한림수직도 결국 접었지요.
"좋은 제품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서울서 필수 혼수품이 되었어요. 한때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잘 됐지만 1990년대 들어온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를 이길 수는 없었어요. 홍콩·일본에 수출까지 하던 돼지 사업도 돼지 파동(돼지고기 값 폭동에 따른 수출 중단) 나고 나서 1980년 그만뒀고요. 돼지는 지역 사람들에게 그냥 공짜로 나누어 주었어요."
맥그린치 신부는 목장과 한림수직에서 번 돈으로 1970년엔 병원을, 1981년엔 양로원을, 1985년엔 어린이집을 세웠다. 소를 키워 치즈와 우유를 팔았고 종마(種馬) 사업도 시작했다. 조직이 커지면서 그는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활동하다가 2011년 공식적으론 일선에서 물러났다. 성 이시돌목장에 수의사로 자원봉사를 하러 1976년 왔다가 제주에 결국 눌러앉은 아일랜드 출신 마이클 리어던(60) 신부가 이사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맥그린치 신부가 없었다면 제주도의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림읍장을 지낸 양승문(71) 전 제주도의원은 "신부님은 실패라고 했지만 신부님이 돼지를 나누어 준 것을 계기로 한림읍에 양돈 농업이 성업하게 됐다"고 했다.
'4H 클럽'에서 활동했던 신부삼(73)씨는 13세 때 수퇘지 한 마리를 받아 기르면서 처음 돼지에 손을 댔다. 그는 돼지 파동 직후인 1980년 성 이시돌목장이 양돈 사업을 접으며 돼지를 나누어 줄 때 돼지 300두(頭)를 받아서 본격적인 축산업을 시작했다.
"그때 신부님이 우리에게 그랬어요. '돼지를 잘 키우면 10년 후에 우리도 외국처럼 자가용을 끌고 다닐 수 있다'고. 뒤에서 친구들끼리 '신부님이 거짓말을 하다니'라고 엄청 웃었던 기억이 나요. 저 지금 돼지 4500두 기르면서 쏘렌토 몰고 다닙니다, 하하."
◇"그것은 정말로 기적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요즘 밀린 책을 읽으며 지낸다고 했다. 사제관엔 영어·한국어로 된 신앙 서적들이 빼곡했다. 낡은 TV 옆엔 '존 르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고 영어 제목이 쓰인 VHS 테이프가 보였다. 선반 위 꽃병은 꽃이 시들어 있었다. 10년 전 샀다는 재킷을 가리키며 그는 "검으니까 오래 입어도 되어서 좋다"며 웃었다.
- 제주 한림읍에 있는 성 이시돌 목장에서 지난 4일 말을 둘러보는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 /사진작가 준초이
"다리가 아파 전만큼은 일을 못하지만 꼭 정착시키고 싶은 게 있어요. 호스피스 사업이에요. 2007년 성 이시돌목장 안에 '이시돌 복지의원'이란 이름으로 호스피스 전문 시설을 만들었어요. 더는 치료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가 세상을 뜰 때까지 편히 지낼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에요. 10년 전 시작한 종마 사업이 꽤 잘 되고 있는데 그 돈을 이 의원에 투입합니다. 환자들에겐 돈을 받지 않고요. 죽기 전에 어디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울 호스피스 서비스가 한국엔 너무나 부족해요. 모든 사람은 존엄하게 죽을 자격이 있거든요."
―60년을 뛰었는데 할 일이 남으셨군요.
"하하, 그러네요. 제가 여태 한라산 한번 못 올라가 보았습니다. 바쁜 척하느라고 그랬죠, 뭐. 이제는 약해져서 시간이 나도 갈 수 없게 됐습니다. 한국말도 영어도 점점 어눌해지고… 증발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맥그린치 신부는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시편 118편 23절이라고 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신 일이고 정말로 기적이다."
1950년대 초 맥그린치 신부는 작은 종이 한 장에 적힌 짧은 문구로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통보받았다. 6·25전쟁의 참혹한 사진이 매일같이 전 세계 신문에 실리던 시절이었다.
―삶에서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입니까.
"우선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난다는 것. 전쟁으로 한두 달 안에 죽을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제주도와 한국 그 자체. 잿더미 위에서 사람들이 일어서는 걸 나는 보았으니까. 그리고 기억나는 또 하나의 기적은 60년 전 성당을 지을 즈음 일어났습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오래전 '기적'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성당을 지어야 하는데 목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림 앞바다에 큰 배가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선장은 맥그린치 신부를 만나 "진상조사단이 3일 후에 올 예정이니 그전에 얼른 부서진 배에서 목재를 가져다 쓰라"고 했다. 성당을 짓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운반할 사람이 부족했다. 당시 신도는 스물다섯 명 정도였다. 맥그린치 신부는 다음 날 새벽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바닷가에 나갔다. 그러고는 눈을 의심했다. 400명이 넘는 사람이 나와 있었다. "그분들은 '제주에 와서 고생하는데 구경만 할 수 있겠느냐'며 웃었어요. 왜 신자도 아닌 분들이 그날 새벽 나섰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 남을 도우려는 그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었다고 믿어요. "
왜 벽안(碧眼)의 사제를 돕겠다고 제주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갔을까. 제주 한림 토박이인 박승준(68)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아이고… 그 눈 파란 신부님이 제주에 왔는데 자꾸만 자꾸만 뭘 하겠대. 그러면서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다가 옥수수죽, 밀가루죽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고생을 해요. 신부님은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분 애쓰는 거 다 알았어요. 어떻게 도우러 나가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간 거지 머, 하하. 신부님도 참, 그게 무슨 기적이라고 그러신대요…."
맥그린치 신부, 한국이름은 임피제
제주 사람들 自立 도운 공 인정… 1975년 막사이사이賞 받아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는 수의사인 아버지와 신심(信心)이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1928년 6월 태어났다. 9남매 중 다섯째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가축 진료를 종종 다녔다. 그때의 경험은 후일 제주에 선교사로 와서 한림읍에 제주도민 자립을 위한 이시돌 목장을 일구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1953년에 아일랜드를 출발해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부산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부산과 전남 목포에서 한국어를 1년 동안 배운 후 제주에 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제주 사람을 위해 헌신한 점을 인정받아 1973년 제주도 명예 도민이 되었다. 그때 성(姓)인 맥그린치와 이름인 패트릭 제임스의 머리글자(M·P·J)를 따서 ‘임피제’란 한국 이름을 지었다. 전후 제주 사람들의 자립을 도운 공으로 1975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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