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물리학 하겠다는 고교생이 물리를 안배운다고?





위키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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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하고 싶은 학과와 관련 없는 과학 과목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다수예요. 기계공학을 전공하겠다는 애가 물리2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거죠. 심지어 물리학과에 진학하고 싶은데도 물리2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외국에서 본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 웃기는 상황입니다.”

올해로 15년차인 명덕고등학교 물리 교사인 이세연 씨(41). 이씨는 지난해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주는 ‘올해의 과학교사상’을 수상했고, 전국 단위 최대 규모 과학교사모임인 ‘신나는과학을만드는사람들(신과람)’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과학 교육 내용보다는 제도와 현실 여건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발칙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희망 전공과 ‘따로 노는’ 과학교육

창의적 인재 양성과 기술혁신,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로 이어지는 ‘국가적’ 비전을 위한 기초 체력은 교육에서 나온다. 식상한 논리이기도 하지만, 대학과 기업의 가교 역할을 하는 중등교육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어떤 대학, 어떤 학과에 들어가는가가 인생 전부를 결정짓는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교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입시가 최우선인 고등학교 교육의 부정적인 영향을 과학교육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진학과 적성, 도전의식보다는 당장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을 선택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얘기는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전공 선택과 관련 없이 점수가 잘나오는 과목을 선택하는 이과생들에게 조언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어차피 해야 할 공부니까 고등학교에서 배워두는 게 좋다고 얘기해도 소용없어요. 학생들이나 학부모의 최우선 가치는 대학 진학이기 때문에 큰 비전이나 인생 목표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거예요.”

현재 고등학교 이과생들은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1을 배운 후 심화과정인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2 중에서 한 과목을 택한다. 이 과정에서 희망하는 전공과 관련 없이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을 선택한다는 것.

“졸업생 중에서도 대학에 들어간 뒤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어려움을 토로하는 애들이 많아요.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대학은 '강건너 불구경'

사실 이런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에서 당연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입시 위주의 교육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무리였다. 그는 대학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강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뒷짐만 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단기간에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을 개선하기 어렵다면 어떤 대학의 무슨 과는 특정 과학 과목을 지정해서 응시토록 하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화학공학과는 반드시 ‘화학2’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는 식이지요. 대학이 먼저 의지를 보이면 됩니다. 하지만 잘 이뤄지지 않고 있죠.”

대학들은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해야 우수한 인재를 뽑을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운다. 응시 과목을 지정해 버리면 지원자 숫자가 줄어들 수 있는 만큼 ‘용감하게’ 먼저 나서는 대학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엔 대학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도 작용하고 있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것을 배우는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학이 먼저 전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지요. 입학 후 배우는 과목도 알려주고 최소한 고교 과정에서 배워야 하는 과목도 알려줘야 합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대학이 없다는 게 답답한 것입니다.”

대학이 나선다고 해도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선택 과목에 변화가 생기면 일선 고등학교 교사수도 달라져야 하고 연쇄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체계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교사의 주장이다.

●자율형 고교시스템은 과학교육의 毒!

고교 과학교육을 멍들게 하는 또다른 원인은 자율형 고등학교다.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자율형공립고(자공고)로 나눠지는 자율고등학교는 학교별로 다양하고 개성있는 교육과정을 정해 교육의 다양성을 높이는 취지로 만들어졌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이 교사는 지적하고 나섰다.

자율고등학교는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 외에 선택교육과정을 학교장 재량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돼 있는데 이것이 과학교육에 독이 돼 돌아왔다는 것이다.

“국어, 영어, 수학 이외의 과목은 자율학교에서 소외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 입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고등학교에서 선택과목을 자율적으로 학교장이 정할 수 있도록 하면 과학 과목은 순위가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과학 과목에만 한정됐다기보다는 사회나 예체능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문과생들은 1학년 공통과학 과정을 배운 후 물화생지 한두 과목 정도만 선택하고 교육과정 ‘단위수’를 채우는 데 그친다.

“사실 문과생들은 1학년 때 배우는 과학과목이 인생에서 배우는 마지막 과학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이과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조하는 것처럼 문과생들도 기본적인 과학 지식 소양을 갖춰야 당초 전인교육이 목표였던 자율형 고등학교의 취지에 부합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셈이지요.”

●지원도 없이 과학중점학교 운영하라고…

명덕고등학교는 과학중점학교다. 과학고처럼 특목고는 아니지만 과학, 수학교육을 위한 체계적인 인프라를 갖춰 과학고에 진학하지 못해도 과학에 관심있는 중학생들의 지원을 받아 창의적 체험활동과 실험학습 등을 제공해 주는 학교다.

“과학중점학교는 분명 과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전국에 100여개, 서울에만 20개 정도 과학중점학교가 있습니다. 문제는 지원이지요.”

과학중점학교를 운영하려면 1, 2학년 때 주로 하는 창의적 체험활동, 수준별 학습, 실험 활동을 진행해야 한다. 여기에는 인프라뿐만 아니라 인력 비용도 필요한데 연간 1억 원 규모로 지원되던 것이 이번 정부 들어 줄어들고 있다.

“국가 예산이 빠듯하다 보니 지원이 줄어들 수는 있습니다. 지원이 줄어들면 교육의 질도 함께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 살림살이가 어려워질수록 미래를 위한 투자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보편적 견해다.

미약한 부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과학중점학교에 대한 지원 축소는 미래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아쉬운 대목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만 탓하고 현실에 안주할수록 ‘창의적 인재 양성’ 기치는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과학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근본적인 처방보다는 단기 처방에 그치니까 여기저기서 풍선처럼 다른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 교사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면서 떠올랐던 단어는 ‘교육 백년지대계’였다. 과연 우리나라는 백년을 내다보고 교육을 설계하고 있는 것일까.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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