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끈기와 아이디어로 노벨화학상 2회 수상
미국국립보건원(NIH) 제공
“난 (노벨상을 탄 것보다) 내가 한 연구가 더 자랑스러워요. 알다시피 어떤 사람들은 (노벨)상을 타려고 과학을 하지요. 하지만 내게 동기부여가 되는 건 그게 아니죠.” - 프레더릭 생어
지난 11월 19일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를 수식하는 단어가 하나 줄었다. 이날 생어가 향년 95세로 영면하면서 이제 그는 생명과학의 ‘살아있는 전설’에서 그냥 ‘전설’이 됐다. 프레더릭 생어(Frederick Sanger)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도 꽤 되겠지만, 생화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어떤 면에서 그가 DNA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이상의 거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프레더릭 생어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해 호르몬 인슐린이 아미노산 51개로 이뤄졌음을 밝혀 195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20여 년 뒤 이번에는 핵산(DNA와 RNA)의 염기서열을 해독하는 방법을 고안해 198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2003년 완성된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생어의 DNA염기서열분석법으로 30억 염기쌍을 해독한 것이다.
참고로 지금까지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사람은 생어를 포함해 네 명뿐이다. 마리 퀴리가 방사능 연구로 물리학상(1903년)과 화학상(1911년)을 받았고, 라이너스 폴링이 화학결합 연구로 화학상(1954년)을, 반핵운동으로 평화상(1962년)을 수상했다. 그리고 존 바딘이 트랜지스터 개발과 초전도이론 정립으로 물리학상(각각 1956년과 1972년)을 받았다.
생어의 타계 소식을 접하며 필자는 노벨재단 사이트에서 그의 1958년 노벨강연원고와 1980년 노벨강연원고를 다운받아 읽어봤다. 각각 13쪽, 17쪽으로 요즘 원고들에 비하면 분량이 적은 편이다.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업적을 소개하고 아울러 그의 삶을 스케치해본다.
●“저는 학문적으로 뛰어나지 못합니다”
1918년 8월 13일 영국 글로스터셔의 마을 렌드콤에서 아버지가 개업의인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생어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생물에 관심이 많았고 커서는 의사가 될 거라는 꿈을 꿨다. 그러나 중고교 시절을 거치며 점차 과학 자체에 관심이 커졌고 1936년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해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케임브리지대는 트라이포스(Tripos)라는 독특한 졸업시험 체계가 있는데, 개론을 다루는 1부와 전공을 다루는 2부가 있다. 물리학과 수학에서 고전한 생어는 보통 2년이면 끝내는 1부를 3년 만에 통과했다. 그 뒤 생화학을 전공했고 2부 시험을 통과해 1940년 12월 졸업장을 받았다.
이해 10월 대학원에 진학한 생어는 처음에는 풀에서 식용 단백질을 얻는 연구를 맡았는데, 얼마 안 있어 교수가 자리를 옮기면서 알버트 뉴버거 교수의 실험실로 옮긴다. 이곳에서 생어는 아미노산 라이신의 대사에 관하 연구로 194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해에 뉴버거는 자리를 옮겼고 생어는 단백질 화학자인 찰스 시놀 교수팀에 합류한다. 돌이켜보면 두 차례 지도교수의 이동이 생어가 위대한 연구를 하는 길로 이끈 셈이다.
지난 11월 19일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를 수식하는 단어가 하나 줄었다. 이날 생어가 향년 95세로 영면하면서 이제 그는 생명과학의 ‘살아있는 전설’에서 그냥 ‘전설’이 됐다. 프레더릭 생어(Frederick Sanger)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도 꽤 되겠지만, 생화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어떤 면에서 그가 DNA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이상의 거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프레더릭 생어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해 호르몬 인슐린이 아미노산 51개로 이뤄졌음을 밝혀 195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20여 년 뒤 이번에는 핵산(DNA와 RNA)의 염기서열을 해독하는 방법을 고안해 198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2003년 완성된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생어의 DNA염기서열분석법으로 30억 염기쌍을 해독한 것이다.
참고로 지금까지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사람은 생어를 포함해 네 명뿐이다. 마리 퀴리가 방사능 연구로 물리학상(1903년)과 화학상(1911년)을 받았고, 라이너스 폴링이 화학결합 연구로 화학상(1954년)을, 반핵운동으로 평화상(1962년)을 수상했다. 그리고 존 바딘이 트랜지스터 개발과 초전도이론 정립으로 물리학상(각각 1956년과 1972년)을 받았다.
생어의 타계 소식을 접하며 필자는 노벨재단 사이트에서 그의 1958년 노벨강연원고와 1980년 노벨강연원고를 다운받아 읽어봤다. 각각 13쪽, 17쪽으로 요즘 원고들에 비하면 분량이 적은 편이다.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업적을 소개하고 아울러 그의 삶을 스케치해본다.
●“저는 학문적으로 뛰어나지 못합니다”
1918년 8월 13일 영국 글로스터셔의 마을 렌드콤에서 아버지가 개업의인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생어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생물에 관심이 많았고 커서는 의사가 될 거라는 꿈을 꿨다. 그러나 중고교 시절을 거치며 점차 과학 자체에 관심이 커졌고 1936년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해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케임브리지대는 트라이포스(Tripos)라는 독특한 졸업시험 체계가 있는데, 개론을 다루는 1부와 전공을 다루는 2부가 있다. 물리학과 수학에서 고전한 생어는 보통 2년이면 끝내는 1부를 3년 만에 통과했다. 그 뒤 생화학을 전공했고 2부 시험을 통과해 1940년 12월 졸업장을 받았다.
이해 10월 대학원에 진학한 생어는 처음에는 풀에서 식용 단백질을 얻는 연구를 맡았는데, 얼마 안 있어 교수가 자리를 옮기면서 알버트 뉴버거 교수의 실험실로 옮긴다. 이곳에서 생어는 아미노산 라이신의 대사에 관하 연구로 194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해에 뉴버거는 자리를 옮겼고 생어는 단백질 화학자인 찰스 시놀 교수팀에 합류한다. 돌이켜보면 두 차례 지도교수의 이동이 생어가 위대한 연구를 하는 길로 이끈 셈이다.
펩티드 호르몬 인슐린의 구조. 생어 그룹은 1955년 인슐린이 아미노산 21개와 30개짜리 두 가닥이 결합된 구조임을 밝혔다. - 노벨재단 제공
시놀 교수는 소의 인슐린의 아미노산 조성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생어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겼다. 췌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인슐린은 혈당을 조절한다는 기능이 밝혀지면서 주목을 받고 있었고 당연히 그 구조가 관심사였다. 인슐린은 단백질인데, 당시는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이뤄져 있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생어는 운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인슐린은 아미노산 51개로 이뤄진 작은 단백질(펩티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생어는 그때까지 알려진 각종 화학적 분석법을 동원해 인슐린의 구조를 하나둘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DNP방법’을 써서 인슐린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가운데 자유 아미노기(-NH2)가 있는 게 글리신과 페닐알라닌 두 가지임을 확인했다. 이는 인슐린이 한 가닥의 펩티드가 아니라 두 가닥이 연결된 구조임을 시사했다. 당시 아미노산 시스테인이 서로 이황화결합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알려져 있었으므로 생어는 인슐린도 그럴 것으로 추정했다.
인슐린에 이황화결합을 끊는 반응을 시키자 정말 두 가닥으로 나누어졌고, 생어는 자유 아미노기가 있는 글리신이 포함된 짧은 사슬을 A부분, 자유 아미노기가 있는 페닐알라닌이 포함된 긴 사슬을 B부분이라고 명명하고 각각의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했다. 그는 아미노산 사이의 펩티드 결합을 끊는 화학반응과 효소반응을 교묘히 이용해 각 사슬을 아미노산 서너 개 길이의 작은 조각으로 잘라 이를 분석한 뒤 전체 서열을 재구성했다.
반복되는 화학반응과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한 분리, 정제와 분석 등 웬만한 과학자라면 벌써 나가떨어졌을 ‘고된 노동’을 생어는 12년 넘게 묵묵히 수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B부분의 아미노산 30개 서열과 A부분의 아미노산 21개 서열을 밝혔다(1953년). 그리고 A분과 B부분이 두 곳의 이황화결합으로 연결된 인슐린의 실체를 규명했다(1955년). 그리고 3년 뒤인 195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세 번 받을 뻔?
인슐린의 아미노산 서열을 밝힌 건 단백질 연구의 전환점일 뿐 아니라 당시 막 밝혀진 DNA이중나선의 생물학적 의미를 성찰하는데 결정적인 힌트가 됐다. 즉 프랜시스 크릭은 생어의 연구로부터 아미노산이 일렬로 배열된 단백질의 구조가 핵산(염기)이 일렬로 배열된 DNA의 구조와 대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DNA는 단백질에 대한 정보(이 부분을 유전자라고 부른다)를 갖고 있는 분자인 것이다. 훗날 크릭은 DNA염기서열이 메신저RNA를 거쳐 단백질 아미노산 서열을 지정하는 과정을 도식화한 ‘센트럴도그마’를 내놓는다.
생어 역시 단백질에서 핵산으로 관심을 돌렸다. 웬만한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100개가 넘기 때문에 인슐린에 쓴 방식대로 서열을 분석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담고 있는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할 수 있다면 돌파구를 찾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DNA는 너무 덩치가 큰 분자이기 때문에 생어는 먼저 핵산 70여개로 이뤄진 운반RNA(tR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기로 했다. 분석 방법은 기본적으로 인슐린에 쓴 방법과 같다. 즉 화학물질이나 RNA분해효소를 약하게 처리해 tRNA를 몇 개 조각으로 나눈 뒤 각 조각의 염기서열을 분석해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1965년 미국 코넬대의 로버트 홀리 교수팀이 염기 77개로 이뤄진 효모의 알라닌 tRNA의 염기서열을 먼저 해독해 발표했다. 생어 그룹은 2년 뒤 염기 120개로 이뤄진 5S 리보솜RNA의 서열을 밝히는데 만족해야 했다. 홀리 교수는 이 업적으로 196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제 생어는 본격적으로 DNA염기서열을 해독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DNA 한 가닥을 주형으로 삼아 상보적인 가닥을 합성하는 효소인 DNA중합효소를 이용해 염기서열을 알아내는 기막힌 방법 두 가지를 고안했다. ‘더하기빼기(plus and minus)법’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아이디어는 중합 과정에서 들어오는 네 가지 염기(삼인산의 형태) 가운데 방사능 표지를 한 것을(예를 들어 아데닌(A)의 경우 dATP)를 조금만 넣어줘 중합반응이 임의로 중단되게 하는 방법이다. 어떤 경우는 얼마 못가 중합이 끝나고 어떤 경우는 좀 더 진행한 뒤 끝난다. 이런 상태의 혼합물을 전기영동으로 분리하면 분자 크기에 따라 나뉘면서 DNA에서 A의 위치가 드러난다. G(구아닌), C(시토신), T(티민)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분석하면 결국 전체 DNA염기서열을 해독할 수 있게 된다. 생어 그룹은 더하기빼기법으로 1977년 DNA 5386개로 이뤄진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 파이엑스(φX)174의 게놈을 거의 완전히 해독했다.
이 와중에도 생어는 좀 더 효율이 높은 분석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 ‘다이데옥시(dideoxy)법’ 또는 ‘생어방법’으로 불리게 될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 방법은 중합반응을 할 때 서열을 알고자 하는 염기에 다이데옥시 형태(A의 경우 ddATP)를 소량 섞어준다. 다이데옥시는 수산기(-OH)가 두 곳 없어졌다는 뜻이다. 참고로 DNA의 D는 데옥시(deoxy), 즉 RNA에서 당분자(리보오스)의 수산기가 하나 없어진 분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다이데옥시의 경우 염기사슬을 이어가는데 꼭 필요한 위치의 수산기까지 없앤 분자이기 때문에 DNA중합반응에서 이 분자가 참여할 경우 그 자리에서 반응이 끝난다. 시약에서 다이데옥시는 데옥시에 비해 소량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일찌감치 반응이 끝날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좀 더 오래갈 수도 있다. 이렇게 얻은 혼합물을 전기영동으로 분리하면 염기서열이 드러난다.
다이데옥시법은 한번에 300염기를 읽을 수 있어 본격적인 게놈해독 시대를 열었다. 생어 그룹은 이 방법으로 1978년 φX174의 게놈을 완전하게 해독했고, 1981년에는 염기 1만6569개로 이뤄진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해독했다. 다이데옥시법이 나오기 전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결과였다. 이 업적으로 생어는 1980년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했다.
생어는 1983년 65세로 정년을 맞자 일찌감치 은퇴해 케임브리지 근교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냈다. 1992년 영국의 자선재단인 웰컴트러스트와 의학연구위원회(MRC)는 생어센터를 설립했고, 이듬해 10월 4일 생어가 참석한 가운데 개소식이 거행됐다. 당시 인원은 50명이 채 안 됐으나 현재(생어연구소로 개명)는 900명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놈연구소가 됐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주도한 곳이 바로 생어연구소다.
노벨상 수상자가 수두룩한 영국이지만 2회 수상자로는 생어가 유일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그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생어는 한사코 사양한 채 현역일 때는 연구소에서, 은퇴해서는 자택에서 조용히 지냈다. 영국왕실은 1980년대 생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려고 했지만 생어는 정중히 거절했다. 자신의 이름에 경(Sir)이 붙는 걸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기사 작위는 사람을 달리 보이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전 다르게 보이기 싫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생어는 운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인슐린은 아미노산 51개로 이뤄진 작은 단백질(펩티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생어는 그때까지 알려진 각종 화학적 분석법을 동원해 인슐린의 구조를 하나둘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DNP방법’을 써서 인슐린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가운데 자유 아미노기(-NH2)가 있는 게 글리신과 페닐알라닌 두 가지임을 확인했다. 이는 인슐린이 한 가닥의 펩티드가 아니라 두 가닥이 연결된 구조임을 시사했다. 당시 아미노산 시스테인이 서로 이황화결합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알려져 있었으므로 생어는 인슐린도 그럴 것으로 추정했다.
인슐린에 이황화결합을 끊는 반응을 시키자 정말 두 가닥으로 나누어졌고, 생어는 자유 아미노기가 있는 글리신이 포함된 짧은 사슬을 A부분, 자유 아미노기가 있는 페닐알라닌이 포함된 긴 사슬을 B부분이라고 명명하고 각각의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했다. 그는 아미노산 사이의 펩티드 결합을 끊는 화학반응과 효소반응을 교묘히 이용해 각 사슬을 아미노산 서너 개 길이의 작은 조각으로 잘라 이를 분석한 뒤 전체 서열을 재구성했다.
반복되는 화학반응과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한 분리, 정제와 분석 등 웬만한 과학자라면 벌써 나가떨어졌을 ‘고된 노동’을 생어는 12년 넘게 묵묵히 수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B부분의 아미노산 30개 서열과 A부분의 아미노산 21개 서열을 밝혔다(1953년). 그리고 A분과 B부분이 두 곳의 이황화결합으로 연결된 인슐린의 실체를 규명했다(1955년). 그리고 3년 뒤인 195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세 번 받을 뻔?
인슐린의 아미노산 서열을 밝힌 건 단백질 연구의 전환점일 뿐 아니라 당시 막 밝혀진 DNA이중나선의 생물학적 의미를 성찰하는데 결정적인 힌트가 됐다. 즉 프랜시스 크릭은 생어의 연구로부터 아미노산이 일렬로 배열된 단백질의 구조가 핵산(염기)이 일렬로 배열된 DNA의 구조와 대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DNA는 단백질에 대한 정보(이 부분을 유전자라고 부른다)를 갖고 있는 분자인 것이다. 훗날 크릭은 DNA염기서열이 메신저RNA를 거쳐 단백질 아미노산 서열을 지정하는 과정을 도식화한 ‘센트럴도그마’를 내놓는다.
생어 역시 단백질에서 핵산으로 관심을 돌렸다. 웬만한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100개가 넘기 때문에 인슐린에 쓴 방식대로 서열을 분석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담고 있는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할 수 있다면 돌파구를 찾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DNA는 너무 덩치가 큰 분자이기 때문에 생어는 먼저 핵산 70여개로 이뤄진 운반RNA(tR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기로 했다. 분석 방법은 기본적으로 인슐린에 쓴 방법과 같다. 즉 화학물질이나 RNA분해효소를 약하게 처리해 tRNA를 몇 개 조각으로 나눈 뒤 각 조각의 염기서열을 분석해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1965년 미국 코넬대의 로버트 홀리 교수팀이 염기 77개로 이뤄진 효모의 알라닌 tRNA의 염기서열을 먼저 해독해 발표했다. 생어 그룹은 2년 뒤 염기 120개로 이뤄진 5S 리보솜RNA의 서열을 밝히는데 만족해야 했다. 홀리 교수는 이 업적으로 196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다이데옥시법으로 분석한 DNA염기서열 데이터를 보는 포즈를 취한 프레더릭 생어. 이 방법으로 30억 염기쌍인 인간게놈이 해독됐다. - 영국 케임브리지대 제공
이 와중에도 생어는 좀 더 효율이 높은 분석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 ‘다이데옥시(dideoxy)법’ 또는 ‘생어방법’으로 불리게 될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 방법은 중합반응을 할 때 서열을 알고자 하는 염기에 다이데옥시 형태(A의 경우 ddATP)를 소량 섞어준다. 다이데옥시는 수산기(-OH)가 두 곳 없어졌다는 뜻이다. 참고로 DNA의 D는 데옥시(deoxy), 즉 RNA에서 당분자(리보오스)의 수산기가 하나 없어진 분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다이데옥시의 경우 염기사슬을 이어가는데 꼭 필요한 위치의 수산기까지 없앤 분자이기 때문에 DNA중합반응에서 이 분자가 참여할 경우 그 자리에서 반응이 끝난다. 시약에서 다이데옥시는 데옥시에 비해 소량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일찌감치 반응이 끝날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좀 더 오래갈 수도 있다. 이렇게 얻은 혼합물을 전기영동으로 분리하면 염기서열이 드러난다.
다이데옥시법은 한번에 300염기를 읽을 수 있어 본격적인 게놈해독 시대를 열었다. 생어 그룹은 이 방법으로 1978년 φX174의 게놈을 완전하게 해독했고, 1981년에는 염기 1만6569개로 이뤄진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해독했다. 다이데옥시법이 나오기 전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결과였다. 이 업적으로 생어는 1980년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했다.
생어는 1983년 65세로 정년을 맞자 일찌감치 은퇴해 케임브리지 근교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냈다. 1992년 영국의 자선재단인 웰컴트러스트와 의학연구위원회(MRC)는 생어센터를 설립했고, 이듬해 10월 4일 생어가 참석한 가운데 개소식이 거행됐다. 당시 인원은 50명이 채 안 됐으나 현재(생어연구소로 개명)는 900명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놈연구소가 됐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주도한 곳이 바로 생어연구소다.
노벨상 수상자가 수두룩한 영국이지만 2회 수상자로는 생어가 유일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그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생어는 한사코 사양한 채 현역일 때는 연구소에서, 은퇴해서는 자택에서 조용히 지냈다. 영국왕실은 1980년대 생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려고 했지만 생어는 정중히 거절했다. 자신의 이름에 경(Sir)이 붙는 걸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기사 작위는 사람을 달리 보이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전 다르게 보이기 싫거든요.”
-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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