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자신의 점과 선에 대해, 선을 찾아 볼 수 있는 노력과 통찰력에 대해 이렇게 연설했다. 잡스에게도 ‘이어짐’이 중요했다. ‘컴퓨터’ ‘애플’ ‘캘리그래피’ ‘픽사’ 같이 서로 연관돼 보이지 않는 그의 ‘점’들은 맥북과 아이팟,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이어져 하나의 ‘선’이 됐다.
잡스의 이런 생각과 ‘통하는’ 이론은 바로 ‘행위자네트워크이론’(ANT)이다. 과학기술과 사회를 융합적으로 이해한다는 새로운 학문인 ‘과학기술학’에 속한 ANT는 사람이나 사물 어떤 한 가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나가는 기존의 학문을 비웃듯 이들 ‘모두’를 이해하려고 한다.
“발가벗겨 놓으면 나폴레옹이나 거리의 노숙자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힘이 있는 인간 행위자나 기업, 정부와 같은 권력 기관은 이종적인 네트워크를 건설한 결과 권력을 얻었고, 이들의 권력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협상할 수 있었던 ‘번역’의 능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
ANT는 사람이나 펜·책·컴퓨터·스마트폰 할 것 없이 모두 하나의 ‘점’으로 본다. ANT는 점보다는 점과 점의 동맹, 즉 ‘선’에 주목한다. ANT에서 점은 ‘행위자’라고 불린다. 행위자와 행위자가 동맹을 만드는 과정을 ‘번역’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과학과 기술이 개입한다. 우리가(행위자) 타이핑을 하는 기술(번역)이 있어야 컴퓨터(행위자)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
따라서 ANT는 나폴레옹이나 노숙자도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나폴레옹이 특별히 ‘대단해’ 질 수 있었던 것은 ‘무기’ ‘군대’ ‘재산’ ‘책략가’ 같은 또 다른 점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번역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나폴레옹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영향력 있는 행위자들이 너무 많아졌다. 펜이나 종이라는 행위자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다. '번역' 기술도 화려해졌고 수많은 '번역'들이 빠르게 반복되며 새로운 동맹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네트워크가 훨씬 거대해졌음은 물론이다.
신속하고 거대한 현대사회 네트워크에서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행위자와 동맹을 맺을 것인가를 판단하는 게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동맹을 맺었다가도 그 동맹을 유지하는 게 옳은지, 효율적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즉, ‘비판’을 통해 성찰하는 번역기술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들리지 않는다. 시시각각 바뀌는 동맹의 흐름 속에서 정신을 잃어 버리기도 하고,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안정감'을 느껴버리기 때문이다. 거대한 네트워크 내부의 행위자는 어느새 다른 행위자와의 동맹을 고민하기보다는 도리어 ‘나이브’해져 버렸다. 신문과 방송은 정부가 내놓은 ‘미화’ 중심의 보도자료만 ‘받아쓰고’, 노동자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외면한다.
이런 상황일수록 비판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비판의 목소리는 분명히 차별적인 '번역기술'로 행위자들을 자기 네트워크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봤자 변하는 게 없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네트워크나 다름없다. 설령 비판이라는 번역에 따른 대가가 크다고 하더라도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의 지향점은 분명 비판이 아닐까.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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