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전기역학을 완성한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그는 양자역학에 내재돼 있는 역설에서 또 다른 역설을 끄집어낸다.
“상식적으로 볼 때 양자역학은 정말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자연을 서술합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은 실험 결과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자연이라는 것 자체가 본시 터무니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 뉴욕시립대 석좌교수로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미치오 가쿠는 2005년 출간된 ‘평행우주’(김영사)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오랜 논란을 소개하며, 양자역학은 지금도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는 “나는 평생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학 이론에 매달리면서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과학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론이다. 양자역학의 ‘표준모형’은 수십 년간 축적되어 온 실험데이터를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양자역학을 물리학의 왕좌에 올려놓았다. 미치오는 “양자역학은 이유는 잘 모르지만 기가 막히게 맛을 내는 조리법 안내서와 같다”고 설명한다.
아마도 양자역학의 가장 기괴한 대목은 물체가 관측이 행해진 후에야 ‘비로소’ 확고한 실체가 된다는, 관측이 행해지기 전에는 물체가 모든 가능한 상태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이다. 우라늄 원자의 방사능 붕괴와 같이 어떤 양자적 사건이 상자 안 고양이의 생사를 좌우한다고 했을 때, 고양이가 살거나 죽는 것은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인가?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는 함께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뉴턴과 마찬가지로 결정론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세계의 불확정성을 이렇게 꼬집었다. “저기 떠 있는 달을 보세요. 쥐 한 마리가 달을 보았다고 해서 없던 달이 갑자기 나타났겠습니까?”
하지만 양자론의 계승자들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며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고자 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는 “궁극적인 진리는 우리의 의식에 담겨 있다”며 “외부의 물리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인식론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동양적 사유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원리로서 브라만과 아트만(자아)의 조화와 일치를 상징하는 힌두 시바신의 춤이 ‘양자적 춤’으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춤사위는 ‘양자적 물음’ 속에 끝없이 계속된다.
그렇다면 내가 무언가를 관측했을 때, ‘나’의 상태를 결정하는 요인은 또 무엇인가? 나의 상태가 ‘지금의 나’로 결정되려면 다른 누군가가 나를 관측해야 한다(물리학자들은 ‘무언가를 관측하고 있는 나’를 관측하는 또 다른 인물을 ‘위그너의 친구’라고 부른다). 위그너의 친구는 ‘위그너의 친구의 친구’에 의해 관측될 수도 있고, 이 사람은 또 ‘위그너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눈에 관측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측의 연결고리를 결정하는 우주적 의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친구의 친구의 친구… 는 끝없이 계속되는 것일까? 우주와 우리는 의식의 세계 속에 하나로 존재하는 것일까?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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