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보어, 드브로이, 슈뢰딩거,아인슈타인,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디랙, 러더퍼드 -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양자역학! 알면 알수록 참 난해해서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난감한 건 양자역학을 만든 사람이 따로 없다는 것. 천재 열 몇 명이 수십 년에 걸쳐서 다 같이 완성했다. 양자역학 탄생에는 작당들이 있었을 뿐 히어로가 딱히 없었다.
“모든 항들이 일사분란하게 에너지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머릿속에 그려왔던 양자역학이 수학적으로 타당하다는 확신이 들면서 깊은 경외감을 느꼈다. 원자의 내부에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온갖 수학으로 장식된 경이로운 자연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_하이젠베르크
● 세계대전과 함께한 물리 혁명
토고의 아인슈타인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1925년 6월 7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는 꽃가루 때문에 알레르기성 비염에 시달리다가 북해의 섬 헬골란트로 휴양을 떠났다. 이곳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이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전자의 궤도를 포기하고 오직 관측 가능한 물리량만으로 양자역학을 기술해야한다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필자도 봄마다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데, 한 번도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은 없다). 당시 하이젠베르크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하이젠베르크의 10대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독일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을 일으킨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그를 혁명적 아이디어로 이끌었던 걸까.
사이 좋은 하이젠베르크(왼쪽)와 보어 - 위키미디어 제공
보어는 철학자의 분위기가 강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보어의 강연은 매우 애매모호한 것으로 유명했다. 1927년 9월 볼타 사망 100주년 기념학회에서 보어는 상보성과 불확정성 원리를 처음 소개했다. 그때 좌중에 앉아 있던 유진 위그너(1963년 노벨물리학상)는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체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모르겠네. 이 강연을 듣고 양자역학에 대한 관점을 바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걸?” 이런 모호함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알버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물리학상)도 보어가 주장하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양자역학을 여러모로 비판하던 아인슈타인의 든든한 우군은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물리학상)였다.
● 카사노바 슈뢰딩거와 아버지 ‘백’을 덕 본 드브로이
오스트리아의 슈뢰딩거 지폐 - 위키미디어 제공
양자역학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인 슈뢰딩거는 전설적인 바람둥이였다. 알려진 애인만도 한둘이 아니다. 동료 교수의 아내를 임신시키기도 했다니, 말 다했다. 슈뢰딩거의 아내는 그의 외도를 인정하다 못해 여자를 소개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치에 반대했던 슈뢰딩거는 망명을 해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북아일랜드에 머물렀는데, 이때도 그의 여성편력은 지칠 줄 몰랐다.
덴마크의 보어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1925년 발표된 루이 드브로이(1929년 노벨물리학상)의 이론에 기반을 뒀다. 드브로이는 프랑스의 제5대 브로이 공작인 빅토르 드브로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에펠탑의 통신센터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그가 지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드브로이는 처음에 중세사와 법학을 전공했지만, 형의 영향으로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됐다.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1923년 드브로이는 전자의 파동성에 대한 논문을 파리대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논문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높은 가문 출신이 제출한 논문을 퇴짜 놓기 싫었던 심사위원들은 독일에 있는 아인슈타인에게 자문을 구했다. 책임회피라고나 할까? 뜻밖에도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의 연구는 물리학에 드리운 커다란 베일을 걷어냈다”는 의견을 보냈다. 아인슈타인의 지지 덕분에 드브로이의 논문이 빛을 보았고,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으로 이어졌다.
보어(왼쪽)의 주장에 대해 시큰둥한 반등을 보이는 듯한 듯한 아인슈타인(오른쪽) - 위키미디어 제공
하이젠베르크, 보어,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드브로이. 이들은 1927년 10월 2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작된 솔베이회의에서 격돌했다. 솔베이는 이 회의를 후원한 벨기에 기업가의 이름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파상공격이 이어졌지만, 보어는 모두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학회가 끝나갈 무렵 참석자 대부분이 보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조금도 설득되지 않았고, 보어에게 “신이 주사위 놀음이나 한다는 것을 정말 믿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물리학자 입에서 신 이야기가 나오면 게임 끝난 거다. 이렇게 여러 물리학자들의 좌충우돌 끝에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 완성됐다.
● 양자역학의 시작은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양자혁명이 언제 시작됐냐고 물으면 보통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물리학상)의 흑체복사이론부터라고 한다. 플랑크는 ‘빛이 입자일 수도 있다’는 이론을 1900년 10월 독일물리학회에서 처음 발표했다. 이 때문에 베를린대는 2000년에 양자역학 100주년 기념식을 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혁명적인 행렬역학이 탄생한 때를 고려하면, 2025년이 100주년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것은 괴팅겐대의 주장이다.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에 괴팅겐대에 있었고, 플랑크는 베를린대 교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 싸우는지 알 수 있다. 양자혁명의 횃불을 켠 사람은 분명 플랑크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간파한 기성 과학자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빛이 입자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플랑크만큼 비극적인 인생을 산 과학자도 드물다. 아내는 폐결핵으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큰 아들 칼은 베르덩 전투에서 전사했다.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마지막 남은 아들인 에르빈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반나치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플랑크는 히틀러에게 탄원을 했지만, 끝내 1945년 에르빈의 사형이 집행됐다. 플랑크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과학을 재건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과학자 대부분이 국제과학계로부터 왕따를 당한 반면, 끊임없이 나치에 저항했던 플랑크만은 예외였다. 그의 이름을 딴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이제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연구소가 됐다.
양자역학은 뉴턴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달리 한 천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녹아있다. 기존의 물리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야했기에 모두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이론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진풍경이 벌이지도 했다. 물리학자들은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적으로 만나서 양자역학을 논했다. 몇십 년 동안 모두가 노력한 결과, 원자의 비밀을 알아낸 것이다.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동아사이언스
● 양자역학의 시작은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양자혁명이 언제 시작됐냐고 물으면 보통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물리학상)의 흑체복사이론부터라고 한다. 플랑크는 ‘빛이 입자일 수도 있다’는 이론을 1900년 10월 독일물리학회에서 처음 발표했다. 이 때문에 베를린대는 2000년에 양자역학 100주년 기념식을 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혁명적인 행렬역학이 탄생한 때를 고려하면, 2025년이 100주년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것은 괴팅겐대의 주장이다.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에 괴팅겐대에 있었고, 플랑크는 베를린대 교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 싸우는지 알 수 있다. 양자혁명의 횃불을 켠 사람은 분명 플랑크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간파한 기성 과학자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빛이 입자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독일의 플랑크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양자역학은 뉴턴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달리 한 천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녹아있다. 기존의 물리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야했기에 모두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이론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진풍경이 벌이지도 했다. 물리학자들은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적으로 만나서 양자역학을 논했다. 몇십 년 동안 모두가 노력한 결과, 원자의 비밀을 알아낸 것이다.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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