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들의 교육기부 사례는 많다. 기업의 사회공헌이라는 차원에서 웬만한 대기업들은 대부분 장학재단 등을 세워 학자들 비롯해 빈곤층을 지원해 왔다. 여기에는 창업자의 명예심도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는 기업의 이미지 홍보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일종의 자선행위인 교육기부는 마치 기업의 필수활동으로까지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생명 및 의료분야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자선재단의 활동 및 지원금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지는 순전히 이러한 사실만을 특집으로 실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은 독지가들에 의해 건설돼”
미국은 독지가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말이 있다. 독립 당시의 미국인들은 정치가 프랭클린의 촉구에 따라 공공도서관과 의용소방소를 세웠다. 새로운 국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에 익명의 독지가들이 앞장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부와 북부지역 의용군들은 각자 채권 판매를 통한 기부금 모금을 전개할 정도로 사회공헌에 헌신적이었다.
기부행위의 사회 전반적으로 정착된 계기는 1889년 철강 사업가 카네기가 그의 에세이 ‘부의 복음’에서 전통적으로 가족과 친지에의 상속대상이었던 부를 사회적 환원대상으로 강조한 가치체계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수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철강왕이 된 카네기. 그러나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을 빛나게 한 것은 막대한 부가 아니었다. 은퇴 후 그는 카네기 공과대학(현 카네기멜론 대학)을 지원한 것을 비롯 카네기 교육진흥재단에 3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음악인이라면 한번쯤 서보고 싶어하는 카네기 홀을 지은 것도 그였다. 그가 어렵게 모은 재산을 많은 이들에게 선뜻 돌려 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책상에 앉아 한 해의 행적을 정리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1868년 12월, 세인트 니콜라스 호텔, 서른세 번째 해가 끝나려 하고 있다. 올 한해 나는 5만 달러의 수입을 거두었다. 최근 2년 동안 나는 최소한 연간 5만 달러를 번다는 목표로 열심히 사업을 해왔다. 이제 그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목표량을 늘려야 할까? 이제부터는 이 이상으로는 절대 벌지 않을 것이다.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겠다. 대신 매년 생활하고 남는 돈은 선행을 위해 쓸 것이다. 남을 도우며 살겠다.”
이후 관습적이고 윤리적인 정착에 이어 제도적 뒷받침까지 더해짐으로써 미국에서 기부활동의 전통은 한층 더 공고해졌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1년, 경제 붐 조성 차원에서 민간영역의 기부행위를 독려하고자 기부에 대한 면세조처가 제도화된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장치는 대공황 이후 대기업의 기부와 자선활동을 본격화시키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1870년 미국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을 설립한 록펠러는 격변하는 산업화 사회에서 소외된 인류의 행복 추구와 삶의 질 향상,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과학자를 비롯한 학자들의 지식이 활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철강의 카네기 재단, 자동차의 포드 재단과 더불어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록펠러 재단은 1913년 설립 이래 기아 근절, 인구문제의 해결, 대학의 발전, 기회균등 및 문화적 발전 등을 그 주요 과제로 수행해 오고 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과학기술연구 후원자로서의 역할이다.
유럽의 근대과학의 혁명을 주도한 솔베이 회의
그러나 이에 앞서 근대과학 혁명을 이루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재단이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물리학과 화학자 등 기초과학자들을 지원한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만큼 큰 역할을 한 기관도 없다.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포드 재단이 미국 장학재단인데 비해 솔베이 회의는 유럽의 과학자들을 지원했다. 그런 탓인지 그에 대해서도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롯해 양자역학 등 소위 거대 물리학이 탄생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 솔베이 회의다.
3년에 한번씩 솔베이의 초청에 따라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 솔베이 회의는 열릴 때마다 굵직굵직한 새로운 이론들이 나왔다. 참석자들 사이에도 열띤 논쟁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솔베이는 과학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 이 회의의 유일한 여성이자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마리 퀴리도 그 중 한 회원이었다.
솔베이(Ernest Solvay 1838~1922)는 브뤼셀에서 태어난 벨기에 공업화학자다. 유리와 비누, 직물 등을 비롯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알칼리성 물질인 소다회(탄산나트륨 Na2CO3)와 가성칼리(K2CO3)의 효과적인 제조법을 개발해 많은 돈을 벌었다.
화학자 출신으로 암모니아-소다 법을 개발해 돈 많이 벌어
21세 때 삼촌과 함께 브뤼셀 근처 가스 공장에서 일하다가 암모니아-소다 법을 개발했다. 암모니아-소다 법은 1811년 이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공업화학자들은 유용하고도 경제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일명 솔베이 법이라고도 부른다.
이 과정이 50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대량생산의 문제를 해결했다. 1861년 형 알프레드와 함께 회사를 세우고 1863년 공장을 지었다.
1865년 생산을 시작했으며 1890년경에는 외국에도 진출할 정도였다. 몇 개의 회사를 설립했다.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는 점차 솔베이법을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1820년대부터 써온 식염(소금)을 탄산나트륨으로 바꾸는 르블랑법 대신 이 방법을 쓰게 되었다.
그 결과 솔베이는 돈을 많이 벌었으며, 물리학과 화학 분야를 연구하는 국제과학연구소를 짓는 등 많은 자선사업에 자신이 번 돈을 썼다. 물리학에 관한 솔베이 회의는 특히 양자역학과 원자구조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솔베이 회의는 세계 최초의 물리학 학회로 초청 받은 과학자로만 구성되었다. 이 기구는 학회와 워크숍, 세미나를 비롯해 특정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고 토론을 전개하는 콜로키엄도 주관해 왔다.
이 회의는 물리학과 화학의 중요한 미해결 문제를 위해 1911년 개최되었다. 이 학회는 3년마다 열린다. 물리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토론으로 기록되는 것은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이다. 걸출한 두 사람의 자존심의 대결이기도 했다.
20세기 거대물리학으로 물리학의 또 다른 경지를 안겨준 양자역학을 두고 설전을 벌인 이 논쟁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각 회의마다 어떤 논쟁이 오고 가고 어떤 이론들이 결실을 맺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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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에는 기업의 이미지 홍보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일종의 자선행위인 교육기부는 마치 기업의 필수활동으로까지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생명 및 의료분야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자선재단의 활동 및 지원금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지는 순전히 이러한 사실만을 특집으로 실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은 독지가들에 의해 건설돼”
미국은 독지가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말이 있다. 독립 당시의 미국인들은 정치가 프랭클린의 촉구에 따라 공공도서관과 의용소방소를 세웠다. 새로운 국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에 익명의 독지가들이 앞장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부와 북부지역 의용군들은 각자 채권 판매를 통한 기부금 모금을 전개할 정도로 사회공헌에 헌신적이었다.
기부행위의 사회 전반적으로 정착된 계기는 1889년 철강 사업가 카네기가 그의 에세이 ‘부의 복음’에서 전통적으로 가족과 친지에의 상속대상이었던 부를 사회적 환원대상으로 강조한 가치체계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수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철강왕이 된 카네기. 그러나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을 빛나게 한 것은 막대한 부가 아니었다. 은퇴 후 그는 카네기 공과대학(현 카네기멜론 대학)을 지원한 것을 비롯 카네기 교육진흥재단에 3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음악인이라면 한번쯤 서보고 싶어하는 카네기 홀을 지은 것도 그였다. 그가 어렵게 모은 재산을 많은 이들에게 선뜻 돌려 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책상에 앉아 한 해의 행적을 정리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1868년 12월, 세인트 니콜라스 호텔, 서른세 번째 해가 끝나려 하고 있다. 올 한해 나는 5만 달러의 수입을 거두었다. 최근 2년 동안 나는 최소한 연간 5만 달러를 번다는 목표로 열심히 사업을 해왔다. 이제 그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목표량을 늘려야 할까? 이제부터는 이 이상으로는 절대 벌지 않을 것이다.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겠다. 대신 매년 생활하고 남는 돈은 선행을 위해 쓸 것이다. 남을 도우며 살겠다.”
이후 관습적이고 윤리적인 정착에 이어 제도적 뒷받침까지 더해짐으로써 미국에서 기부활동의 전통은 한층 더 공고해졌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1년, 경제 붐 조성 차원에서 민간영역의 기부행위를 독려하고자 기부에 대한 면세조처가 제도화된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장치는 대공황 이후 대기업의 기부와 자선활동을 본격화시키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1870년 미국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을 설립한 록펠러는 격변하는 산업화 사회에서 소외된 인류의 행복 추구와 삶의 질 향상,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과학자를 비롯한 학자들의 지식이 활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철강의 카네기 재단, 자동차의 포드 재단과 더불어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록펠러 재단은 1913년 설립 이래 기아 근절, 인구문제의 해결, 대학의 발전, 기회균등 및 문화적 발전 등을 그 주요 과제로 수행해 오고 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과학기술연구 후원자로서의 역할이다.
유럽의 근대과학의 혁명을 주도한 솔베이 회의
그러나 이에 앞서 근대과학 혁명을 이루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재단이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물리학과 화학자 등 기초과학자들을 지원한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만큼 큰 역할을 한 기관도 없다.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포드 재단이 미국 장학재단인데 비해 솔베이 회의는 유럽의 과학자들을 지원했다. 그런 탓인지 그에 대해서도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롯해 양자역학 등 소위 거대 물리학이 탄생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 솔베이 회의다.
3년에 한번씩 솔베이의 초청에 따라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 솔베이 회의는 열릴 때마다 굵직굵직한 새로운 이론들이 나왔다. 참석자들 사이에도 열띤 논쟁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솔베이는 과학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 이 회의의 유일한 여성이자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마리 퀴리도 그 중 한 회원이었다.
솔베이(Ernest Solvay 1838~1922)는 브뤼셀에서 태어난 벨기에 공업화학자다. 유리와 비누, 직물 등을 비롯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알칼리성 물질인 소다회(탄산나트륨 Na2CO3)와 가성칼리(K2CO3)의 효과적인 제조법을 개발해 많은 돈을 벌었다.
화학자 출신으로 암모니아-소다 법을 개발해 돈 많이 벌어
21세 때 삼촌과 함께 브뤼셀 근처 가스 공장에서 일하다가 암모니아-소다 법을 개발했다. 암모니아-소다 법은 1811년 이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공업화학자들은 유용하고도 경제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일명 솔베이 법이라고도 부른다.
이 과정이 50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대량생산의 문제를 해결했다. 1861년 형 알프레드와 함께 회사를 세우고 1863년 공장을 지었다.
1865년 생산을 시작했으며 1890년경에는 외국에도 진출할 정도였다. 몇 개의 회사를 설립했다.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는 점차 솔베이법을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1820년대부터 써온 식염(소금)을 탄산나트륨으로 바꾸는 르블랑법 대신 이 방법을 쓰게 되었다.
그 결과 솔베이는 돈을 많이 벌었으며, 물리학과 화학 분야를 연구하는 국제과학연구소를 짓는 등 많은 자선사업에 자신이 번 돈을 썼다. 물리학에 관한 솔베이 회의는 특히 양자역학과 원자구조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솔베이 회의는 세계 최초의 물리학 학회로 초청 받은 과학자로만 구성되었다. 이 기구는 학회와 워크숍, 세미나를 비롯해 특정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고 토론을 전개하는 콜로키엄도 주관해 왔다.
이 회의는 물리학과 화학의 중요한 미해결 문제를 위해 1911년 개최되었다. 이 학회는 3년마다 열린다. 물리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토론으로 기록되는 것은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이다. 걸출한 두 사람의 자존심의 대결이기도 했다.
20세기 거대물리학으로 물리학의 또 다른 경지를 안겨준 양자역학을 두고 설전을 벌인 이 논쟁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각 회의마다 어떤 논쟁이 오고 가고 어떤 이론들이 결실을 맺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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