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Einstein)은 1933년 히틀러가 지배하는 독일을 떠나 미국 프린스턴대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양자역학을 거부했던 아인슈타인은 이곳에서 다시 공격의 포문을 연다. 1935년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과 함께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설명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한 것이다. 저자들 이름의 알파벳 첫 글자를 모으면 EPR이 되는데, 이 때문에 EPR 논문이라 불린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 4광년 떨어진 별에서 알약은 무슨 색일까
1935년 발표된 이른바 ‘EPR 논문’의 초판본 - the Physical Review 제공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측정하는 순간 색이 정해진다. 측정이라는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측정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입 닥치고 계산이나 하라”는 답이 돌아온다. 측정이야말로 양자역학이 가진 기이한 부분이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 EPR 논문이 정의한 실재는 양자역학의 측정 개념과 양립할 수 없는 듯 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EPR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상자 안에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넣자. 보지 않은 채로 알약 하나만 꺼내어 아주 멀리 가져간다. 빛의 속도로 4년 걸리는 알파 센타우리 별까지 갔다고 하자. 알파 센타우리에서 알약을 보니 파란 색이었다. 그렇다면 지구의 상자에 남은 알약은 빨간 색일 거다. 관측은 알파 센타우리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지구에서는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고 결과를 확실히 아는 셈이다. 지구에서 알약의 색깔은 실재적이라는 말이다.
알약의 색깔 대신 위치와 운동량을 사용하면, 이들의 실재성 역시 알파 센타우리에서의 관측결과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다. 위치나 운동량을 측정하는 행위가 서로를 교란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실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구에서 위치와 운동량의 실재성 여부는 알파 센타우리에서 무엇을 측정했는지가 결정한다. 알파 센타우리에서 위치를 측정하면 지구에서 위치가 실재적이 되고, 운동량을 측정하면 운동량이 실재적이 되기 때문이다. 알파 센타우리는 지구에서 4광년이나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측정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즉, 한 입자의 특성이 실재적일 수도 있고 실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EPR은 이런 상황이 잘못된 것이며 이는 양자역학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 양자 정보가 빛보다 빠른가
보어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EPR 논문에 담긴 더 미묘한 문제를 제기한다. 지구에 있는 알약의 색깔은 어느 순간 실재가 되는가? 알파 센타우리에서 파란색이라고 알게 되는 순간, 지구의 알약은 빨간 색이 된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표준해석이다. 하지만, 우주에서 어떤 정보도 빛보다 빨리 이동할 수 없다. 알파 센타우리의 관측 결과는 빛의 속도로 진행하더라도 4년 뒤 지구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4년이 지날 때까지 지구의 알약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1/2의 확률로 나오는 걸까?
양자역학의 ‘얽힘’을 이용한 양자전송 - 네이처 물리학 제공
이건 말도 안 된다. 지구에서 파란 알약이 나왔는데 4년 뒤에 알파 센타우리의 결과가 파란 색이라면 우주가 모순을 일으키는 셈 아닌가? 양자역학적 상호관계는 빛의 속도보다 빨리 전달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다른 말로 ‘관계가 비(非)국소적’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 때문에 양자역학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슈뢰딩거는 이런 괴상한 양자역학적 상호관계를 ‘얽힘’이라고 부르고, 양자역학에 내재된 성질이라 생각한다.
만약 양자역학의 주장과 달리 관측하기 전에 물리량이 미리 결정돼 있다면 EPR이 제기한 실재성의 역설은 사라진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변수가 있어서 매 순간 모든 물리량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어떨까? 그러면 모든 것은 고전역학처럼 완전히 결정된다. 단지 숨은 변수를 모르기 때문에 측정 전에는 결과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양자역학의 기이한 결과는 자연이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서다.
1952년 데이비드 봄은 숨은 변수를 이용해 양자역학과 완전히 동일한 결과를 주는 고전역학적 이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얽힘을 제대로 나타내기 위해서 이 숨은 변수는 빛보다 빠른 정보전달을 허용해야 했다. 즉 비국소적 숨은 변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봄의 이론은 학계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여기엔 봄의 특이한 이력도 한몫 했다. 1950년대 초 미국은 공산주의자를 마녀사냥하는 매카시즘의 시대였다. 봄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았고, 결국 1951년 프린스턴대를 떠나 브라질 상파울 로대에 몸을 숨긴다. 논문은 이 기간 중 출판된 것이다. 물론 외면당한 진짜 이유는 이렇다. 당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게 양자역학은 의심할 여지없이 잘 작동하고 있었고, 해석에 대한 이런 철학적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면 “입 닥치고 계산이나 하라”는 것이다.
EPR역설에 종지부를 찍은 존 스튜어트 벨 - 위키미디어 제공
● 두 입자는 우주적으로 얽혀 있다
벨의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상자 속에 있는 두 개의 알약을 다시 생각해보자. 국소적 실재성이 있다는 말은 알약을 골라 멀리 가져가기 전에 색깔을 이미 안다는 것이다. 사실 벨이 생각한 것은 스핀이라 불리는 한층 복잡한 것이다. 알약이 자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알약은 색깔만 보면 되지만, 스핀의 경우 측정할 수 있는 상황의 수가 많아진다. 이때 국소적 실재성은 두 알약이 마치 지시사항이 담긴 리스트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구현될 수 있다. 지시사항이란 이렇게 측정하면 이런 결과를 보여주라는 내용이다. 사실 이 리스트가 바로 국소적 숨은 변수다.
김연아처럼 회전하는 전자의 물리량을 스핀이라 한다 - 위키미디어 제공
벨이 찾은 부등식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모든 리스트, 어려운 말로 ‘모든 국소 적 숨은 변수이론’에 대해 만족돼야만 한다. 하지만 스핀을 그냥 양자역학적으로 다루면 이 부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스핀 실험을 통해 만약 벨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면 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이 틀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982년 알랭 아스페는 두 개의 광자를 이용해 벨의 부등식이 틀렸음을 보인다. 양자역학이 맞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주가 국소적 실재성을 갖지 않음을 의미한다. 논리적으로는 국소성과 실재성 둘중의 하나만 틀려도 된다.
양자세계에서 하나의 입자가 동시에 두개의 구멍을 지날 수 있다. 근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양자세계에서는 두 입자의 스핀이 전 우주적으로 얽혀있을 수도 있고,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트릭스에 사는 걸까, 실제 세계에 사는 걸까?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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