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4월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휴 에버렛 3세의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됐다. 에버렛은 이 논문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방법을 제시했다. 논문이 통과되기 1년 전, 지도교수였던 존 휠러가 양자역학의 대가 보어를 방문해 논문을 소개했다. 하지만 보어의 반응은 냉담 그 자체였다. 양자역학을 거부하던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새로운 논쟁거리 자체가 보어에게는 진절머리 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보어의 무시 때문이었을까, 에버렛은 졸업 후 학계를 떠나 군수산업회사에 취직해 버렸다.
● 입 닥치고 계산만 할 수는 없잖아?
휴 에버렛 3세는 양자역학의 모순적인 현상들이 각자의 우주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다세계 해석’을 제시했다. - 위키미디어 제공
용어가 좀 어렵지만, 유니타리 진행이란 물체가 양자역학이 허용하는 이상한 상태를 모두 가지며 운동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전자가 동시에 두 개의 구멍을 지나가는 것이 좋은 예다(양자 중첩). 이런 과정은 슈뢰딩거의 방정식으로 완벽하게 기술된다. 그 다음은 측정인데, 일단 측정을 하면 전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결과만을 보여준다.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날 때 측정을 하면,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나는 전자가 관측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측정하면 분명 전자는 어느 하나의 구멍만을 지난다. 처음에 전자는 하나밖에 없다고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렇다면 전자는 왜 동시에 두 장소에 있으면서 막상 측정하면 어느 한 장소에만 있어야 하는가? 측정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날 때 측정을 하면,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나는 전자가 관측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측정하면 분명 전자는 어느 하나의 구멍만을 지난다. 처음에 전자는 하나밖에 없다고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렇다면 전자는 왜 동시에 두 장소에 있으면서 막상 측정하면 어느 한 장소에만 있어야 하는가? 측정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코펜하겐 해석은 측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측정을 하면 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결과만 나오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 과정에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복잡한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뭐 측정하면 그냥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끝! 18세기 미국 남부의 한 백인 소년이 “왜 흑인은 노예로 살아야하죠?” 물었는데, “흑인이 노예인 것은 우주의 섭리야. 입 닥치고 공부나 해!”라고 답하는 거랑 비슷하다. 실제 ‘입 닥치고 계산(Shut up and calculate)’이나 하라는 것은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양자역학의 주요한 해석(?) 중 하나다.
양자측정이 야기하는 역설에 대해서는 이 코너에서 이미 몇 번 다룬 바 있다. ‘슈뢰딩거 고양이’와 ‘EPR 역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역설에 대해 필자가 제시했던 설명은 주류 물리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실험 증거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선호하는 이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버렛이 제시한 ‘다세계 해석’이다.
● 우주가 둘로 나눠진다
여러 개의 지구를 상상해 본 그림. 내가 그림을 보고 있는 세계와 동시에 그림을 보고 있지 않은 또 다른 지구가 공존 하는 것일까? - NASA 제공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만약 전자가 오른쪽 구멍을 지날 경우, 왼쪽 구멍을 지나는 상태는 더 이상 우주에 존재하지 않고 사라진다. 하지만 다세계 해석의 입장은 이렇다. 측정하는 순간 우주는 둘로 나눠진다. 전자가 오른쪽 구멍으로 지나는 우주와 왼쪽 구멍으로 지나는 우주로.
사실 다세계 해석에 측정은 없다. 우주는 그냥 ‘유니타리’ 진행할 뿐이다. 전자는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났을 뿐이다. 측정이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전자가 어느 구멍을 지나는지 알기 위해 각각의 구멍 옆에 작은 장치를 준비한다. 전자가 지나면서 만드는 자기장을 검출하여 불을 켜는 장치다.
전자가 오른쪽을 지나면 붉은색, 왼쪽을 지나 면 푸른색이 들어온다고 하자. 우주 전체가 유니타리 진행을 한다면 전자는 동시에 두 개의 구멍을 지나게 된다. 이 때 측정을 한다는 것은 전자가 오른쪽 구멍을 지나면 붉은색 불이 켜지고, 왼쪽 구멍을 지나면 푸른색 불이 켜진다는 말이다.
우주 전체가 유니타리 진행을 한다고 했으니 두 사건도 동시에 일어난다. 즉, 중첩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측정 결과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상당히 미묘해진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여기서 측정결과라는 것은 없다. 두 가지 경우는 여전히 동시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똑한 독자라면 슈뢰딩거 고양이의 상태와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챘을 거다.
● 무한히 늘어나는 우주
평행우주는 대중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소스코드(2011)와 열한시(2013)가 대표적인 영화들이다. - 서밋엔터테인먼트, CJ E&M 제공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지날 때, 유니타리 진행을 고려하면 관측자까지 포함된 중첩상태가 형성된다. 전자가 오른쪽으로 가고 붉은색 불이 들어오고 그것을 본 관측자가 있고, 전자가 왼쪽으로 가고 푸른색 불이 켜지고 이것을 본 관측자가 있다. 관측자만 추가됐지 앞에서 했던 것과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제 관측자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가지 경우가 생기게 된다.
다세계 해석의 주장은 이렇다. 두 관측자 가운데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다. 두 관측자 모두 옳다는 말이다. 모든 관성계가 동일하다는 상대성이론의 가정이 떠오르지 않는가? 결국 관측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두 개의 우주가 존재해야 한다. 우주는 전체적으로 유니타리 진행할 뿐이다. 이 과정은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완벽하게 기술된다.
붕괴니 확률이니 하는 따위는 모두 관측자라는 부수적인 존재가 자신의 양자상태를 이해하려고 할 때 생기는 허상 같은 거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실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고 “말도 안 돼!”하고 당신이 책을 덮어도 상관없다. 또 다른 우주의 당신은 책을 계속 읽고 있을 거니까.
다세계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낭비가 심하다. 측정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주가 나눠진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혹 떼려다 혹을 붙인 셈이다. 좀 더 미묘한 문제로 확률적 해석에 대한 것이 있다. 모든 가능성이 다 실재하는데 확률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다세계 우주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자신이 속한 우주밖에 볼 수 없으므로 확률이라는 개념이 이상해진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물리학자들이 다세계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양자 측정 문제를 간단히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냥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라 유니타리 진행할 뿐이다. 얼마나 단순한가! 비록 우주의 개수가 무한히 많아지기는 해도 말이다.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 현대 물리학은 허무한가
2013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한 양자물리학회에서 33명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했다. 지지하는 양자해석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코펜하겐 해석 42%, 정보이론 해석 24%, 다세계 해석 18%였다. 여전히 코펜하겐 해석이 가장 많지만, 지지자가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이 이채롭다. 솔직히 이런 투표는 재미는 있지만 별 의미는 없다. 아무도 다세계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 우주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과학에서 진리는 투표로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 태양은 아보가드로 수 보다 많은 별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이 광활한 우주마저 무한히 많은 평행우주의 하나일 뿐이라니. 다 세계 해석이야말로 현대 물리학이 제시하는 허무주의의 종결자라 할만하다.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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