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성격이나 건강 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유전자(DNA)임이 알려진 다음부터, 과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내 유전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매우
궁금증을 가졌다.
유전자의
역할이 너무 강조되다 보면, 과학적 운명론에 빠질 위험이 높아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유전자가 나빠서 똑똑해질 수 없고, 유전자가 나빠서 저절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아니면 가난한 유전자 때문에 일생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런 ‘운명론’ 말이다.
물론
우리들은 경험으로 느낀다. 그것이 다가 아닐 것이라고.
너무나
막강한 이 유전자의 굴레에서 서서히 벗어나려는 시도가 나타났으니 이름 하여 후성유전학이다. 후성유전학(後成遺傳學, epigenetics) 또는
후생유전학(後生遺傳學)은 DNA는 같아도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서 엄청나게 변화할 수 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후성유전학을 소개하는 서적들이 하나씩 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네사 캐리 (Nessa Carey)가 지은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이다. 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다소 길지만, 원제는 ‘후성유전학 혁명’ (The epigenetics
Revolution)이다.
이
책을 보통 독자가 읽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너무나 많은 전문용어와 영어 약자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한두 장 넘기기가 어려울 정도로
학문적이지만, 그래도 위안을 받는 것은 과학의 문외한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설명들을 도처에 뿌려놓았다.
네사
캐리가 금과옥조처럼 사용하는 비유가 있다. 저자는 유전자는 금형이 아니라 연극 또는 영화의 대본이라고 설명한다. 금형은 거푸집에 쇳물을 부으면
조금도 오차 없이 똑같은 물건이 찍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대본은 다르다. 같은 대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도 엄청난 차이가 생길 뿐 더러,
감독에 따라서는 결말 부분을 비극에서 희극으로 또는 반대로 바꿀 수도 있다.
또
하나 독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후성유전학의 대표적인 사례는 꿀벌에서 나타난다.
꿀벌이
애벌레일 때는 유전적으로 모두 똑같다. 운명이 바뀌는 것은 생후 3일째부터이다. 애벌레는 3일째 되는 날까지 모두 로열젤리를 먹는다.
로열젤리에는 아미노산과 지방 단백질 비타민과 아직도 알 수 없는 영양분이 포함됐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부터 애벌레에게 먹이를 주는 보모벌은 선택받은 극소수의 애벌레에게는 계속 로열젤리를 주고, 나머지에게는 꽃가루와 꿀을
준다.
로열젤리를
계속 먹는 애벌레는 여왕벌이 되고 일벌은 생식능력이 없는 일벌로 운명이 정해진다. 꿀벌에서 보는 이 현상은 유전자 보다 더 중요한 핵심 요인이
영양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여왕벌과
일벌의 먹이가 다른 것을 다른 말로 식이요법이라고 한다면, 식이요법에 의해 수명이 20배나 차이가 나는 이유를 단순히 유전자로만은 설명이
안된다.
물론
인간도 유사하다. 임신했을 때 영양분 공급이 충분하지 않으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몸집이 작아지거나 비만이 쉽게 온다.
후성유전학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쌍둥이에서 찾을 수 있다. 유전적으로 매우 흡사한 쌍둥이지만, 이들의 성격이나 차이점은 크게 나타나는 것을
과학자들은 많이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천적으로 유전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린 시절에 학대와 방임을 경험한 어른이 자살할 위험은 일반인에 비해 3배나 높고 학대를
경험하면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50% 높으며 회복하기도 어렵다.
대체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후성유전학자들은 과연 어릴 때 분자차원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특히 학대받거나 방임된 아동의
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뇌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탐구하는 일이야 말로 난제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뇌는 충분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린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해도 어른이 돼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우리
뇌에는 신경세포(뉴런)가 약 1,000억개 있고 이들 신경세포는 다른 신경세포 약 1만개에 연결돼 있으므로 전체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이
1,000조개가 될 뿐 더러 아주 복잡한 3차원 구조로 되어 있다.
이렇게
방대한 세포들의 연결망 속에서 어떤 유연성이 나타나는지 짐작할 수 없으므로 유전자에 의한 기계론적인 운명론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많이 읽는 단어는 ‘DNA 메틸화’이다. 후천적인 유전자의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요인이 바로 ‘DNA 메틸화’이다.
성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이 단어가 앞으로 빈번하게 나올 것이다. 상식으로 익혀둬야 할 용어이다.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 방문교수인 네사 캐리는 10년 넘게 생명공학과 제약분야에서 일하면서 하버드 의학대학원, MD앤더슨암센터 등 후성유전학 분야
연구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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