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나 각종 종목별 세계대회 등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들은 첨단 스포츠과학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테니스나 배드민턴 선수들이 사용하는
라켓, 육상선수들이 착용하는 운동화, 그리고 축구공, 골프공 등 각종 스포츠용품에는 첨단과학기술이 접목되어 선수들의 기록 단축과 경기력 향상을
돕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첨단 스포츠용품의 발달은 경기 결과가 선수 개인의 기량보다는 과학기술에만 더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몸 전체를 감싸는 전신수영복인데, 이는 상어비늘의 원리를 적용하여 물의 저항감소와 부력 증가의 효과가 크다. 수영선수들이 앞 다퉈 전신수영복을 착용한 2000년 이후 올림픽과 수영선수권대회마다 세계신기록이 쏟아져 나오자, 결국 세계 수영연맹은 2010년 이후 전신수영복을 금지하게 되었다.
매우 오래 전에도 이러한 첨단기술에 힘입어 대회에서 압도적으로 우승을 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1895년의 영국 자전거 경주대회였다. 15대의 자전거가 동시에 출발선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선수의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들을 훨씬 앞질러서 쏜살같이 내달렸다. 마치 어린 아이와 어른의 경주처럼 다른 선수들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광경을 본 관중들과 선수들은 다들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 모두 당당한 실력과 관록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므로, 기량 차이가 그토록 심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승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선수의 차지였고, 경기가 끝난 후 그 비결을 묻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비로소 자신이 탔던 자전거의 비밀을 털어 놓았다. 다른 선수들의 자전거바퀴는 모두 타이어 속까지 고무로 차 있었으나, 그의 자전거바퀴는 공기타이어를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빨리 달리는 것은 당연하였던 것이다.
공기타이어를 발명하고 널리 실용화시킨 인물은 기계기술자나 관련 분야의 과학자가 아니라, 뜻밖에도 수의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영국의 던롭(John Boyd Dunlop; 1840-1921)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에 걸맞게, 마차로 왕진을 자주 다녔던 그는 보다 안락한 왕래를 위한 방안을 고심하던 중, 공기타이어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수의사 던롭은 에든버러 어빈즈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1862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가축병원을 개업하였는데, 가축들의 병을 고쳐 주려고 먼 곳까지 왕진을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험하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릴 때마다 쇠바퀴를 단 마차는 크게 흔들렸고, 던롭은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한번은 마부에게 바퀴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서 안전하게 달릴 수 없겠느냐고 묻자, 마부는 바퀴가 딱딱하지 않으면 쉽게 부서져 버리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이후로 던롭은, 안전하고 부드럽게 달릴 수 있으면서도 튼튼한 바퀴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자주 생각하게 되었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는 못하였다.
던롭이 수의사로 일한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 어느 집에 왕진을 갔다가 우연히 집주인으로부터, 런던에서는 고무를 단 바퀴가 자전거에 쓰인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바퀴에 대해 생각해 오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아들의 세발자전거를 꺼내어 자전거바퀴를 고무호스로 감아 보는 실험을 하였으나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는 다시 고무호스 안을 헝겊으로 채워 보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역시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탄력 있고 부드러운 바퀴를 만들기 위하여 고무 안을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아들의 축구공에 바람을 넣어 주다가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바로 공기를 고무호스 안에 가득 채우면 될 거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던롭은 고무 튜브를 이용하여 공기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매달렸고, 처음에는 튜브가 쉽게 터지는 등, 어려움도 많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오늘날과 같은 공기타이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가 보다 나은 바퀴를 처음 구상한지 26년만인, 1888년의 일이었다. 사실 공기타이어의 원리 자체는 톰슨(Robert William Thomson; 1822-1873)이 오래 전에 구상하여 1845년에 특허까지 취득한 상태였으나, 던롭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독자적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공기타이어를 개발, 제작한 것이다.
던롭의 친구들은 공기타이어와 같은 훌륭한 발명품을 사업화하면 크게 성공할 거라고 조언하였고, 그것을 받아들인 던롭은 자신이 발명한 공기타이어의 특허를 신청하고 던롭러버회사를 설립하여 공기타이어의 보급에 힘썼다. 당시에는 주로 자전거 바퀴용으로 보급하였는데, 광고를 위한 매스미디어 등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대중적으로 빠르게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반, 자동차발명의 선구자 벤츠(Karl Benz; 1844-1929), 다임러(Gottlieb Wilhelm Daimler; 1834-1900) 등이 가솔린자동차를 개발하던 초기에도 쇠바퀴가 그대로 쓰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1895년의 영국 자전거 경주대회를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공기타이어의 우수성이 입증되자 가솔린 자동차에도 공기타이어를 이용하게 되었고, 특히 미국의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자, 공기타이어 역시 널리 대중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던롭러버회사는 그 후 말레이지아,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고무농장을 경영하는 등, 세계적인 타이어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교통수단의 혁명의 시대에도 공기타이어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부품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첨단 스포츠용품의 발달은 경기 결과가 선수 개인의 기량보다는 과학기술에만 더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몸 전체를 감싸는 전신수영복인데, 이는 상어비늘의 원리를 적용하여 물의 저항감소와 부력 증가의 효과가 크다. 수영선수들이 앞 다퉈 전신수영복을 착용한 2000년 이후 올림픽과 수영선수권대회마다 세계신기록이 쏟아져 나오자, 결국 세계 수영연맹은 2010년 이후 전신수영복을 금지하게 되었다.
매우 오래 전에도 이러한 첨단기술에 힘입어 대회에서 압도적으로 우승을 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1895년의 영국 자전거 경주대회였다. 15대의 자전거가 동시에 출발선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선수의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들을 훨씬 앞질러서 쏜살같이 내달렸다. 마치 어린 아이와 어른의 경주처럼 다른 선수들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광경을 본 관중들과 선수들은 다들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 모두 당당한 실력과 관록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므로, 기량 차이가 그토록 심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승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선수의 차지였고, 경기가 끝난 후 그 비결을 묻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비로소 자신이 탔던 자전거의 비밀을 털어 놓았다. 다른 선수들의 자전거바퀴는 모두 타이어 속까지 고무로 차 있었으나, 그의 자전거바퀴는 공기타이어를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빨리 달리는 것은 당연하였던 것이다.
공기타이어를 발명하고 널리 실용화시킨 인물은 기계기술자나 관련 분야의 과학자가 아니라, 뜻밖에도 수의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영국의 던롭(John Boyd Dunlop; 1840-1921)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에 걸맞게, 마차로 왕진을 자주 다녔던 그는 보다 안락한 왕래를 위한 방안을 고심하던 중, 공기타이어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수의사 던롭은 에든버러 어빈즈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1862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가축병원을 개업하였는데, 가축들의 병을 고쳐 주려고 먼 곳까지 왕진을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험하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릴 때마다 쇠바퀴를 단 마차는 크게 흔들렸고, 던롭은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한번은 마부에게 바퀴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서 안전하게 달릴 수 없겠느냐고 묻자, 마부는 바퀴가 딱딱하지 않으면 쉽게 부서져 버리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이후로 던롭은, 안전하고 부드럽게 달릴 수 있으면서도 튼튼한 바퀴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자주 생각하게 되었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는 못하였다.
던롭이 수의사로 일한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 어느 집에 왕진을 갔다가 우연히 집주인으로부터, 런던에서는 고무를 단 바퀴가 자전거에 쓰인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바퀴에 대해 생각해 오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아들의 세발자전거를 꺼내어 자전거바퀴를 고무호스로 감아 보는 실험을 하였으나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는 다시 고무호스 안을 헝겊으로 채워 보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역시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탄력 있고 부드러운 바퀴를 만들기 위하여 고무 안을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아들의 축구공에 바람을 넣어 주다가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바로 공기를 고무호스 안에 가득 채우면 될 거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던롭은 고무 튜브를 이용하여 공기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매달렸고, 처음에는 튜브가 쉽게 터지는 등, 어려움도 많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오늘날과 같은 공기타이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가 보다 나은 바퀴를 처음 구상한지 26년만인, 1888년의 일이었다. 사실 공기타이어의 원리 자체는 톰슨(Robert William Thomson; 1822-1873)이 오래 전에 구상하여 1845년에 특허까지 취득한 상태였으나, 던롭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독자적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공기타이어를 개발, 제작한 것이다.
던롭의 친구들은 공기타이어와 같은 훌륭한 발명품을 사업화하면 크게 성공할 거라고 조언하였고, 그것을 받아들인 던롭은 자신이 발명한 공기타이어의 특허를 신청하고 던롭러버회사를 설립하여 공기타이어의 보급에 힘썼다. 당시에는 주로 자전거 바퀴용으로 보급하였는데, 광고를 위한 매스미디어 등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대중적으로 빠르게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반, 자동차발명의 선구자 벤츠(Karl Benz; 1844-1929), 다임러(Gottlieb Wilhelm Daimler; 1834-1900) 등이 가솔린자동차를 개발하던 초기에도 쇠바퀴가 그대로 쓰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1895년의 영국 자전거 경주대회를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공기타이어의 우수성이 입증되자 가솔린 자동차에도 공기타이어를 이용하게 되었고, 특히 미국의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자, 공기타이어 역시 널리 대중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던롭러버회사는 그 후 말레이지아,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고무농장을 경영하는 등, 세계적인 타이어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교통수단의 혁명의 시대에도 공기타이어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부품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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