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건축물이다. 화려한 단청도 없을 뿐더러 나무와 하얀 회벽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오죽 했으면
일제강점기 때 비가 들이치는 것은 막기 위해 이 건물의 창 밖에다 비막이 판자가 설치됐을 정도다.
6.25사변
직후인 1955년에는 장경판전의 오래된 기와를 벗기고 구리 기와를 얹었다. 또 해인사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인 1972년에는 대통령
지시로 첨단공법의 콘크리트 건물이 건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팔만대장경의 보관에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으로 밝혀져 모두 철거되거나 취소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비막이 판자는 통풍 장애를
유발하는 것으로 지적돼 철거됐으며, 1955년의 구리 기와는 다시 진흙 기와로 바뀌었다. 구리의 열전도율이 높아서 건물 안의 온도 변화가 커졌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1972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은 스님들의 선방과 쉬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완공 후 시험 삼아 팔만대장경의 경판 몇 장을
옮겨 놨더니 뒤틀림과 결로 현상이 생긴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던 탓이다. 장경판전이 600여 년간 팔만대장경을 변형시키지 않고 온전히 보관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그 단순하고 평범한 구조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조선 초기의 전통 목조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과학적인 배치 및
규모, 목판 보존을 위한 기능성 면에서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목판
보관에 알맞은 과학적 구조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했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다. 이 두 건물 사이에는
사간판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 두 채가 들어서 있는데, 동쪽 건물은 동사간판전, 서쪽 건물은 서사간판전이라 한다. 즉, 장경판전은 네모 모양으로
배치된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목판은
나무의 특성상 습도나 온도가 조금만 안 맞아도 뒤틀리거나 곰팡이가 스는 등 보관하기에 매우 까다롭다. 따라서 목판의 보존에 적합한 환경은 온도
20℃ 내외, 습도 60~70%다. 그런데 해인사 주변의 습도는 인근지역에 비해 연중 6~10% 가량 높으며, 건물 내부의 겨울철 평균 온도도
2.74℃로 겨울 옥내 온도 기준치보다 매우 낮다.
이처럼
보존에 불리한 환경임에도 수백년간 대장경판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경판전의 과학적인 구조 덕분이다. 먼저 장경판전은 해인사 내에서도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어, 가야산의 지형 특성상 아래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자연 환기가 가능하다. 또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건물
전체가 서남향으로 배치돼 해가 떠 있는 동안 모든 경판에 한 번씩 햇빛이 고루 비친다.
건물에
배치된 창호 계획도 매우 과학적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각각 정면 15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칸 마다 위에 하나 아래에 하나씩 살창이
뚫려 있다. 살창이란 나무 창살이 여러 개 달린 창이다. 그런데 이 살창은 위 아래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
즉,
건물 앞면은 윗창이 작고 아래창이 큰 반면, 뒷면은 그 반대로 배치된 것. 이 같은 구조 덕분에 밖에서 들어온 공기가 건물 내부를 한 바퀴
돌아나가는 대류현상이 일어나, 자연적인 통풍과 환기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바람이 남쪽의 큰 창으로 들어와 경판 사이를 돈 다음 위로 올라가
북쪽의 큰 창으로 빠져 나가게 되는 것. 일명 굴뚝 효과다.
건물
바닥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땅을 깊이 파서 맨 밑에 모래와 횟가루, 찰흙을 깔고 중간에는 숯, 맨 위에는 소금을 섞어서 다져놓은 것. 이로
인해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할 때는 흙 속의 수분을 내보내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대장경판 표면의 습도를 조사한 연구 결과를 보면 더욱 놀랍다. 경판 한 장당 하루에 최고 60까지 습도량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드러난 것. 이는
판고 전체에 하루 5톤 가량의 물이 대장경판에 뿌려졌다가 마르는 효과를 내는 셈이다. 이 같은 작용은 한여름철 수분 증발 때 열을 빼앗는
온도조절기능을 해 곰팡이나 썩음, 균 등의 서식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대화재
속에서도 그대로 보존된 장경판전
고려
말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되었던 팔만대장경은 빈번한 외침으로 인해 1398년 해인사로 옮겨졌다.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은 거친 산세로 인해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겪어 왔던 숱한 전쟁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해인사도 화재는 피해가지 못했다. 해인사는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겪었는데, 현재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말엽에 중건됐다. 신기한 일은
여러 차례의 대화재를 겪으면서도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은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그
비밀은 장경판전이 주변 건물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사방으로 완벽하게 설치된 담장에서 찾을 수 있다. 목조건물이 몰려 있으면 바람을
타고 주변 건물로 불이 옮겨가는데, 장경판전은 다른 건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더러 담장 덕분에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처럼
장경판전의 진정성은 창건 당시의 건물 원형과 기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30년간 몇 차례 건물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유지관리 차원의 부분적 수리였을 뿐 건물의 전반적 배치에서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변형이나 파손 없이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5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7년에는 팔만대장경판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이 한 공간에서 지정된 것은 세계에서 해인사가 유일하다.
ScienceTime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