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913년 닐스 보어(Niels Bohr, 1871∼1937)가 제안한 새로운 원자론은 현대물리학의 한 축을 이루는 양자역학 출현에 커다란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원소의 주기율표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를 하는 데 초석이 된 이론이었다. 이 보어의 원자론은 고전전자기학적 논의와 새로운 양자론적 논의가 서로 혼합된 것으로서 훗날 양자 상태 개념과 파울리의 배타원리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원자의 분광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더 없이 좋은 도구가 되었다. 1923년부터 보어와 좀머펠트에 의해 발전된 고전양자론은 위기를 맞이하고 그 뒤 1925년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1926년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보어의 원자론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과도기적 이론이었던 것이다.
19세기말부터 과학자들은 원자의 구조와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모형을 개발했다. 1903년 5월 도쿄 대학에서 열린 도쿄수학물리학회에서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郞, 1865∼1950)는 소위 토성 원자 모형을 발표했다. 하지만 양전하가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전자들이 고리 모양으로 돌고 있는 이 토성 원자 모형은 역학적 불안정성 때문에 나오자마자 심한 비판에 부딪혀 폐기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말부터 다양한 형태의 원자 모형을 고안해나가고 있었던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이 토성 원자 모형이 지니는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와는 다른 새로운 원자 모형을 찾아나갔다. 우선 그는 양전하가 원자 전체에 걸쳐 있고, 전자들이 양전하 안과 밖으로 돌아다니며 돌고 있는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이 모형을 흔히들 건포도 모형이라고 부르는데 톰슨이 받아들였던 여러 모형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톰슨의 원자 모형은 토성 원자 모형에 비해 역학적인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톰슨은 자신의 이 원자 모형으로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 등 화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1911년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 ∼1937)는 섬광계수기를 이용한 알파 입자 산란 실험을 통해서 톰슨의 모형과는 다른 소위 러더퍼드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러더퍼드 원자 모형은 나카오카 한타로의 토성 원자 모형을 다시 부활시킨 것으로 이 모형이 지니고 있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인 역학적인 불안정성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하는 보어는 러더퍼드 모형이 지니는 이 역학적인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안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톰슨의 원자 모형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러더퍼드 원자 모형을 옹호하는 개념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상 상태 개념과 양자화된 궤도를 가정하는 보어의 원자 모형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어의 원자 모형과 초기 반응
닐스 보어는 수소의 스펙트럼에 관한 놀라운 주기적 법칙인 발머 계열에 관한 식이 나타난 해인 1885년 10월 7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1903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보어는 1907년 물의 표면장력에 관한 논문으로 덴마크 왕립 과학 및 인문 아카데미에서 금메달을 받는 등 학창 시절부터 물리학 분야에서 탁월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코펜하겐 대학에서 보어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금속내의 전자이론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시작했고, 이것을 확대해서 1911년 자신의 박사논문을 완성했다. 이 연구에서 보어는 당시 맥스웰과 로렌츠에 의해서 대표되었던 고전 전자기학만으로는 금속 내의 전자이론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 해 보어는 전자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는 J. J. 톰슨과 물리학에 대해서 토론해 보기 위해서 박사 연구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로 갔다. 케임브리지에서 톰슨은 보어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서투른 영어 실력과 톰슨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보어는 톰슨과 함께 연구를 하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할 수 없이 맨체스터에 있던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1913년 보어는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의 새로운 원자모형과 플랑크,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그리고 선스펙트럼에 관한 발머 계열식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원자모형을 제안하게 됐던 것이다.
톰슨의 원자모형에 대한 보어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원자모형은 기본적으로 톰슨의 연구계획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톰슨은 멘델리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주기율표에 의해서 표현되는 화학원소의 주기적 성질에 관한 설명을 찾고 있었는데, 보어의 원자모형도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추구되었던 것이다. 톰슨의 열광적인 숭배자였던 보어는 화학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관한 설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13년 초에 우연히 발머계열에 관한 식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매우 형식적이고도 실용적인 입장에서 원자 내의 전자들은 양자화된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궤도만을 허용한다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자신의 원자모형을 제안했던 것이다.
1912년 7월 6일 보어가 러더퍼드에게 보낸 소위 '러더퍼드 비망록'(Rutherford- Memorandum)을 살펴보면 이때부터 보어는 막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복사 메커니즘을 다양한 화학 원소에 관한 실험적 사실과 연결시킬 수 있는 가설을 선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보어는 전자의 복사 에너지를 전자의 회전 주기와 연결시키는 식을 찾기 시작했다. 애초에 보어는 무한히 먼 곳에서 전자가 날아와 원자의 주위 궤도에 포획되면서 빛 에너지가 방출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착상으로 보어는 전자의 운동에너지가 복사에너지의 1/2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1913년 내내 출판된 "원자 및 분자들의 구성에 관해서"라는 삼부작의 성격의 논문은 보어의 원자 모형의 역사적 발전에 내포된 다양한 단계들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맨 처음 논문인 제 1부에는 우리가 현재 물리학 개론 교과서에서 보고 있는 형태의 논의가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보어는 발머 계열식을 이용하는 방법 뿐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방식으로 복사에너지와 운동에너지와의 관계에 대한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우선 첫 번째 방법은 1912년에 러더퍼드 비망록에서 논의했던 방법에 의해서 자신의 결과를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보어가 제안한 양자화된 궤도에 대한 논의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어가 고전적인 방법에 의해 자신의 결론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즉 발머 계열식을 이용한 방법은 양자화된 궤도를 이용한 현대적인 방법에 의한 합리화였다면, 러더퍼드 비망록 방법은 고전적인 전자기학에 입각한 합리화였던 것이다. 토머스 쿤(Thomas S. Kuhn, 1922∼1996)은 보어가 초기 자신의 원자 모형을 창안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고전과 현대를 무의식적으로 오간 것을 보고, 마치 과학혁명기에 케플러가 전통과 혁신 사이를 오간 것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 번째 방법을 보면 전통과 혁신을 오가는 보어의 태도가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어는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양자화 조건에 의해 계산한 값이 양자수를 무한대로 크게 할 때 고전적인 양으로 계산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였다. 이 방법은 훗날 보어의 대응이론이라는 형태로 일반화되는데, 양자화 조건을 이용한 결과를 항상 그 극한에서 고전적인 양과 비교했다는 점에서 보어의 보수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쿤이 말한 전통과 혁신 사이의 갈등 국면도 잘 보여주고 있다.
2부와 3부는 나중에 출판이 되었지만 사실상 먼저 쓰여진 원고였다. 이 부분에서 보어는 원소와 분자들의 주기율 체계를 다룬 톰슨의 연구 프로그램과 유사한 테마를 다루었는데, 이 부분의 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모형에 의한 설명을 강조했던 케임브리지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1부는 매우 정량적으로 쓰여진 데 반해서 2부와 3부는 정성적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따라서 모형에 의한 설명을 바탕으로 해서 정성적인 형태로 쓰여진 이 부분은 훗날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보어에 의해 시작된 고전 양자론의 위기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실제 내용상으로 볼 때 초기의 보어의 원자모형은 상당히 엉성한 것이었고, 따라서 정량적이라기보다는 정성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 마델룽(Erwin Madelung, 1881∼1972), 보른(Max Born, 1882∼1970)과 같은 당시 대륙의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이 보어의 원자모형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나타냈었다. 보어의 동생이며 1913년 가을 괴팅겐에 머물고 있었던 하랄 보어(Harald Bohr, 1887∼1951)는 자신의 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은 형의 논문에 대해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 --- 힐베르트는 제외하고라도 --- 보른, 마델룽과 같은 젊은 과학자들은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가정이 너무 '대담하고' '환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머펠트 역시 1913년 9월 4일 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도 몇 년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왔지만 현재로서는 보어의 시도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좀머펠트의 일반화된 양자조건
이렇게 초기에 맞은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원자 모형이 수용되는 데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전쟁이 터지자 많은 과학자들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어 정상적인 과학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 와중에 많은 약점을 내포하고 있던 보어의 원자 모형은 자신의 체계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게 되었던 것이다. 보어의 원자 모형이 재정비되는 데에는 처음에는 보어의 원자 모형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좀머펠트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좀머펠트는 나이가 많아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고, 대학에 남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좀머펠트는 보어의 원자론에 타원궤도와 자신의 새로운 양자조건을 도입하여 수소원자의 미세구조를 해명하고, 수소 스펙트럼 문제를 거의 환상적일 정도로 정확히 풀어내었다. 보어의 원자이론은 이런 다음에야 비로소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보어-좀머펠트 모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되게 된다.
좀머펠트가 새로운 양자 조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보어의 이론을 확장하는 양자 조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 논문들이 독일에서 유통될 수 없었다. 우선 1915년 4월 4일 일본 도호쿠 대학의 물리 연구소의 이시와라 준(石原純)은 도쿄 수리물리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좀머펠트 양자조건과 유사한 논의를 전개했다. 이보다 앞선 1915년 3월 런던의 킹스 칼리지의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1875∼1965) 역시 좀머펠트와 유사한 양자 조건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었다. 이들 논문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표되었고, 전쟁으로 인해서 서로 교류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이 세 논의 가운데 좀머펠트의 논의가 가장 체계적이고 확실하게 발전되어 새로운 양자 조건을 보어-좀머펠트 양자 조건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914년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52)와 구스타프 헤르츠(Gustav Hertz, 1887∼1975)는 전자를 수은 증기의 원자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서 프랑크와 헤르츠는 수은 원자가 4.9 eV 만큼의 에너지를 단계적으로 흡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소위 프랑크-헤르츠의 실험은 보어의 원자 모형을 확증하는 실험으로 많은 교과서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14년 당시 프랑크와 헤르츠는 보어의 정상 상태에 대한 개념을 알지 못한 채로 이 실험을 했다. 즉 프랑크와 헤르츠의 실험은 전자와 원자의 충돌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으로 보어의 학문적 네트워크와는 다른 연구 전통 내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 프랑크와 헤르츠는 보어의 원자 모형에 대한 논의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실험이 바로 보어의 원자 모형을 확증하는 실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1925년 프랑크와 헤르츠는 보어의 원자 모형을 실험적으로 확증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공간 모형과 보어의 두 번째 원자론
1914년 모즐리(H.G.J. Moseley, 1887∼1915)는 원자번호를 질량이 아닌 하전량에 의해서 재정의하면서 러더퍼드와 보어의 새로운 원자 모형을 이용했다. 모즐리의 분광학적 논의가 확산되면서 러더퍼드와 보어의 원자 모형도 함께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즐리는 X-선 분광학을 다루면서 주로 원자 내의 가장 안쪽의 전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K-고리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모즐리의 논의는 곧 발터 코셀(Walther Kossel, 1888∼1956)에 의해 그 다음의 전자 고리인 L-고리에 관한 논의로 확장되면서 보어의 고리 모양의 원자 모형은 점차로 발전되어 갔다. 더 나아가 코셀은 K-이중상태(doublet)와 L-이중상태의 차이가 서로 같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발견했는데, 코셀이 경험적으로 발견한 이 동등성은 곧 좀머펠트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되었다. 좀머펠트는 X-선의 진동수를 계산할 때 상대론적 보정을 고려해서 이 양이 서로 같음을 이론적으로 보일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좀머펠트는 각 전자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타원연합체'(Ellipsenverein) 방식의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전쟁 중 좀머펠트에 의해 보어의 원자 모형이 일반화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좀머펠트가 제안한 일반화된 양자 조건과 상대론적 논의를 이용해서 원자구조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믿음이 커가면서 문제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머펠트가 보어의 원자이론을 일반화하여 X-선 스펙트럼 분야에서 혁혁한 성공을 이루어 내자, 많은 과학자들이 보어-좀머펠트 모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어-좀머펠트 고리 모형이 지니는 새로운 문제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애초에 보어와 좀머펠트가 제안한 원자 모형은 2차원 평면 위해서 도는 고리 모형이었고, 아직 3차원적 모형은 고려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3차원적 모형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918년 막스 보른은 보어-좀머펠트의 원자 이론을 이용하여 염화나트륨(NaCl)의 압축률을 엄밀하게 계산했다. 이 때 보른은 계산과정에서 전자의 궤도가 평면상에만 위치하였던 보어-좀머펠트의 고리모형에 의한 압축률 계산이 실험치와 1/2씩 틀리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양이 정확하게 계산되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스핀 개념과 스핀간의 커플링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데, 그것은 양자역학이 완성된 1920년대 후반 이후에나 도입된 개념들이었다. 당시 보른은 보어-좀머펠트 모형이 지니고 있던 심각한 모순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 뒤 보른은 전자들이 평면상에만 자리잡고 있던 기존의 고리 모습의 원자모형을 폐기하고 3차원 공간에 퍼져 있는 공간적인 모형을 제기했다. 이런 시도를 구체화해서 1918년 보른은 루이스의 원자가 가설과 유사한 것으로 코셀이 1916년에 제안한 원자가 가설을 결합해서 8개의 전자가 외각에 위치하고 있는 소위 '주사위형 원자모형'을 발표했다.
보른과 함께 3차원적 공간 모형을 개발했던 알프레트 란데(Alfred Land, 1888∼1975)는 보른의 3차원적 공간 모형을 더욱 발전시켜서 좀머펠트의 타원연합체 모형과 유사한 '다면체연합'(Polyederverband) 전자 궤도 모형이라는 동역학적인 모형을 제안했다. 보른과 란데가 제안한 연구 프로그램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1919년 1월 괴팅겐에 있던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 등이 보른의 주사위형 원자 모형에 호감을 보였으며, 1919년 3월 17일 좀머펠트는 란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팬케이크와 같은 보어의 고리 모형보다는 란데의 주사위형 원자 모형을 더욱 좋아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좀머펠트는 란데가 제안한 공간 모형을 이용해서 자신이 그 동안 X-선 분광학에서 풀지 못했던 다양한 계산을 해보기도 했다.
1920년 이후에는 보어 자신도 자신이 초기에 제안했던 고리 원자모형의 한계를 인정했고, 이에 따라 3차원적인 전자배치를 가지게 되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발전시키게 된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보어는 자신이 1913년에 출판한 3부작의 2부와 3부의 논의를 더욱 확장시켜서 소위 보어의 '두 번째 원자론'을 전개했다. 이 두 번째 원자론에서는 보어는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와 단열원리(Adiabatic Principle)를 더욱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보다 심화된 원자 모형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대응원리는 1920년을 전후하여 보어가 자신의 초기 원자론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스펙트럼의 진동수 뿐만 아니라 그 강도에 대한 논의까지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제안했던 것이다. 미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새로운 양자이론은 그 극한에 있어서 거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기존의 고전역학과 일치한다는 이 원리는 보어의 1913년 논문에서 이미 그 맹아가 보였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어는 1913년 논문에서 자신이 사용한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이것을 일반적인 논의로 확대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1920년 이후 보어가 세련된 형태로 제한한 이 대응원리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던 새로운 양자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아내는 데 좋은 도구가 되었다.
아무튼 1920년 보어가 전개한 두 번째 원자론은 고전양자론의 절정에 달하는 것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란데가 제안한 다면체연합(Polyederverband) 전자 궤도 모형도 보어의 이 두 번째 원자모형에 의해 흡수되게 된다. 이로써 1922년 말에 이르게 되면 보어-좀머펠트 고전 양자론은 원자 구조를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신뢰성 있는 이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하나의 이론이 절정기에 도달했다는 것은 곧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923년 초부터 보어-좀머펠트 모형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인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헬륨 문제와 고전양자론의 위기
우선 보어-좀머펠트의 고전 양자론은 헬륨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즉 보어의 원자론은 수소 원자 스펙트럼 문제는 아주 성공적으로 설명했으나, 이것이 그 다음으로 간단한 원소인 중성 헬륨 원자도 잘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1913년 보어의 초기 원자모형이 나올 당시 보어 자신도 중성 헬륨에 대한 논의를 했었지만, 그때에는 아직 그것을 확인할 실험적 결과가 충분하게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1920년경에 이르면 제임스 프랑크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헬륨원자의 이온화에너지를 비롯한 많은 실험적 결과들이 얻어졌다. 1920년대 초에 이러한 실험적 결과가 보어-좀머펠트의 고전양자론에 의한 이론적 결과와 부합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철저한 검토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런 연구 프로그램은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막스 보른에 의해서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보어의 원자론이 그 다음으로 간단한 원소인 중성 헬륨 원자도 잘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20년대 초에 보른은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58), 파스쿠알 요르단(Pascual Jordan, 1902∼1980) 등과 같은 자신의 공동연구자와 함께 푸앵카레의 천체역학을 이용해서 이 어려운 삼체문제를 꼼꼼하고 일반적인 해법으로 풀어나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결과는 보어의 이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다전자 원자 혹은 분자의 특성을 설명을 하는 데에는 보어의 원자론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면서 1923년 초부터 고전양자론 내에 위기가 닥쳐오게 된다.
고전양자론 내의 위기가 오기 직전인 1922년 보어는 자신이 예언한 원소인 하프늄(Hf)의 발견 소식을 스톡홀름에서 전해 듣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보어와 함께 고전 양자론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좀머펠트는 수상의 기회를 놓치고 노벨상 수상자의 대열에서 빠지게 되었다.
참 고 문 헌
[1] N. Bohr, Phil. Mag. 26, 1-25 (1913); 476-502; 857-875.
[2] A. Sommerfeld, Ann. d. Phys. 51, 1-94 (1915); 125-167.
[3] James Franck and Gustav Hertz, Verhandlungen der Deutschen Physikalischen Gesellschaft 16, 457- 467 (1914).
[4] James Franck and Gustav Hertz, Phys. Zs. 20, 132-143 (1919).
[5] J. L. Heilbron and T. S. Kuhn, HSPS 1, 211-290 (1969).
[6] Ulrich Hoyer, Die Geschichte der Bohrschen Atomtheorie (Weinheim: Physik-Verlag, 1974).
[7] J. L. Heilbron, Isis 58, 451-485 (1967).
[8] H. Kragh, HSPS 10, 123-186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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