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도 다람쥐도 따뜻한 봄을 기약하며 깊은 잠에 빠져드는 이 추운 겨울, 왜 사람만 유독 손발을 오들오들 떨면서 바쁘게 일해야 할까. 사람도 개구리랑 다람쥐랑 함께 겨울잠을 자다가 따뜻한 봄바람이 불 때쯤 일어나면 안 될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겨울잠을 못 자는 걸까 안 자는 걸까. 좀 더 과학적으로 질문해보자. 우리는 아예 겨울잠 유전자가 없는 걸까, 아니면 유전자는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안 쓰고 있는 걸까.
사람도 겨울잠 유전자 갖고 있다
답부터 말하자면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쿠아줄루-나탈대 생물보존학부의 배리 러브그루브 교수는 겨울잠을 자는 포유류를 분석한 결과 겨울잠 능력이 공통조상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2012년 ‘기후에 적응하는 삶(Living in a Seasonal World)’이라는 책을 통해 발표했다. 비버부터 주머니쥐까지 72개 과(科)에 속한 먼 친척 포유류 사이에 겨울잠과 관련된 생물학적 특성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근거다. 세분화되기 전 원시 포유류에서부터 겨울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현재 겨울잠을 자지 않는 포유류도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겨울잠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도미니코 튜폰 교수팀은 실험쥐의 뇌에 아데노신이라는 물질을 투입해 일시적으로 겨울잠과 같은 상태(가동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2013년 9월 ‘뉴로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원래 겨울잠을 자지 않는 쥐를 인공적으로 겨울잠에 빠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쥐에게 잠자고 있는 겨울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튜폰 교수는 “겨울잠 능력을 에어컨이라고 보면 내부 전자회로도 멀쩡하고 스위치도 온전히 있는 상태”라며 “다만 전기 플러그만 빠진 상태”라고 비유를 들어 표현했다.
겨울잠 회로가 멀쩡하다는 말은 체온 저하, 물질대사 저하 등 겨울잠에 필요한 신체변화 기능들이 무사히 작동한다는 말이다. 뇌에 있는 아데노신 수용체(A1AR)가 바로 이 겨울잠 회로를 가동하는 스위치다. 스위치를 켜려면 전원이 필요하다. 체내 에너지 저장고인 아데노신 3인산(ATP)에서 고에너지 인산결합이 떨어지면 나오는 ‘아데노신’이 전원 역할을 한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포유류에게는 지금 전원을 올리는 장치가 멈춰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까. 물론이다. 지방대사를 조절해 겨울잠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PL이나 PDK-4 유전자가 사람 몸에도 버젓이 존재한다. 다만 아데노신 같은 물질이 대량생산되지 않는다. 유럽우주기구(ESA)는 2007년 국제우주대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람에게도 겨울잠 능력이 있지만 겨울잠 유도물질을 만드는 유전자 발현만 억제된(block) 상태”라고 밝혔다.
도대체 누가 겨울잠 플러그를 뽑은 걸까. 이를 알기 위해선 왜 겨울잠 능력이 포유류에게 필요했는지부터 되짚어봐야 한다. 사실 기온이 낮은 겨울에는 체온 유지에 에너지가 많이 들고, 먹을 만한 식물도 줄어들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게 더 유리하다.
그런데 숨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안 잡아먹히기 위해서’다. 겨울잠을 자는 포유류는 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형 포유류다. 포식자보다는 잡아먹히는 피식자 신세가 많다. 춥고 배고파 번식을 하기도 어려운 겨울에 굳이 돌아다니며 먹이감이 될 필요가 없다. 유럽과 아시아에 사는 다람쥐꼬리겨울잠쥐는 겨울잠을 자는 기간 생존률이 98%로 활동기의 77%보다 월등히 높다. 공룡이 활개 치던 중생대에도 겨울잠을 자던 포유류는 대부분 1kg 미만의 소형 포유류다. 따라서 겨울에도 충분히 생존이 가능하고 포식자의 위협 없이 번식할 수 있는 대형 포유류가 굳이 겨울잠을 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도 이에 속한다. 겨울잠 플러그를 뽑은 것은 바로 사람 자신이었다.
사람이 진화과정에서 스스로 잠재운 겨울잠 능력을 최근 다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생명 연장이나 비만 치료, 저체온 수술, 또는 우주여행(2파트 참조)을 위해서다. 다만 현재는 사람 몸 안에서 스스로 겨울잠 물질을 분비하지 못하므로 외부에서 투입해 겨울잠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겨울잠 유도물질로 거론되는 후보는 많지만 아직 결승선을 통과한 물질은 없다. 1968년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외과의사였던 헨리 스완이 겨울잠에 필요한 신체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체내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지금까지 6가지 유도물질 후보가 발견됐다. 이 중에서 현재 튜폰 교수팀이 연구하는 아데노신과 최인호 연세대 교수팀이 연구하고 있는 T1AM이라는 물질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과연 이 연구가 성공해 사람이 다시 겨울잠을 자는 날이 오게 될까. 겨울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단언컨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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