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8일 화요일

이어령의 젊은이에게 바치는 마지막 이야기'




투병 중인 이어령 선생과 오는 26일과 27일 이틀에 걸쳐 오전 9시 30분 '헤어질 때 몰래 하고 싶었던 말-이어령의 백년서재에서'를 방송한다고 25일 예고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 시대의 젊은이에게 바치는 마지막 이야기 시대의 지성, 모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이어령 선생은 2017년 간암 판정을 받은 후 치료 대신 글쓰기를 선택하며 ‘헤어지기 전 몰래 하고 싶었던 말-이어령의 백년 서재에서’ 인생을 마주하고 있다.


또한, 다큐멘터리 (기획 신예리 보도제작국장·연출 최영기PD)를 작별을 준비 중인 선생이 청년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가 설 연휴 아침을 따뜻하게 채워줄 예정이다.

한편, 이어령 선생은 4년전 딸 이민아 목사(1959∼2012)의 3주기를 맞아 딸에게 건네지 못했던, 가슴속에만 묻어뒀던 이야기를 담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열림원)를 출간했다. 《1960년대 초 아버지는 네다섯 살인 딸과 단둘이 기차를 타고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딸에게 바다 냄새를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걷다가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을 우연히 만났다. 밤이 되자 아버지는 해수욕장 모랫바닥에 세운 판자 방에 딸을 재우고선 바로 옆 텐트로 옮겨 친구들과 문학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딸 생각이 나서 헐레벌떡 달려갔다. 껌껌한 방에서 잠이 깬 딸은 가냘픈 목청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달려갔을 땐 목이 쉰 채로 지쳐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너와 나에게 완벽한 행복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텐데”라며 후회했다.》

뉴스프리존

이어령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 생각할 때 삶이 농밀해진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만났다. 호적상 85세다. 실제 한국 나이는 올해 87세다. 호적에 이름이 뒤늦게 올라갔다고 했다. 항간에 투병설이 있었지만 안색도 좋고, 표정도 밝고, 열정도 넘쳤다. 그에게 ‘이어령의 삶과 종교, 그리고 문명론’을 물었다.  













이어령 교수는 "탯줄을 끊기 전에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인가, 아니면 배 밖으로 나와 탯줄을 끊을 때부터 나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하신가.
“우리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투병한다. 4㎝도 안 되는 좁은 산도(産道)를 필사적으로 나오지 않나. 그때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그건 목숨을 건 모험을 하는 거다. 그렇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또 이별을 한다.”

무엇과 이별인가.
“태중에서는 엄마와 한 몸으로 존재한다. 탯줄을 끊으면서 엄마와 이별해야 한다. 그러니까 만남이 먼저인가, 이별이 먼저인가. 그렇다. 이별이 먼저다. 그러니 삶의 시작은 ‘헤어짐’에서 비롯된다. 삶은 끝없는 헤어짐의 연속이다.”  

이 교수는 문득 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렸다.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했다. “나는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 길을 가고 있었다. 화사한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대낮의 정적, 그 속에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부모님 다 계시고, 집도 풍요하고,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었다. 슬퍼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먹먹하게 닥쳐온 그 대낮의 슬픔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내게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였다.”  

이어령 교수는 "우리가 죽음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삶은 더욱 농밀해진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이어령 교수는 "우리가 죽음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삶은 더욱 농밀해진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인가.
“그렇다. 내가 병을 가진 걸 정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부분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의사가 내게 ‘암입니다’라고 했을 때 ‘철렁’하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경천동지할 소식은 아니었다.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암이야. 어떻게 할까?’ 여섯 살 때부터 지금껏 글을 써온 게 전부 ‘죽음의 연습’이었다. ‘나는 안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너 죽어’이러면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 죽어’ 이런다고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이 교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 보라. 손바닥과 손등, 둘을 어떻게 떼놓겠나. 뒤집으면 손바닥이고, 뒤집으면 손등이다.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나. ‘나는 살아있다’는 생명의식은 ‘나는 죽어있다’는 죽음의식과 똑같다. 빛이 없다면 어둠이 있겠나. 죽음의 바탕이 있기에 생을 그릴 수가 있다. 의사의 통보는 오히려 내게 남은 시간이 한정돼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이 교수는 방사선 치료도, 항암 치료도 받지 않는다. 석 달 혹은 여섯 달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 체크만 할 뿐이다. 그는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친병(親病)’이라고 불렀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서양사상은 영혼과 육체를 둘로 나눈다. 영혼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육체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다. 동양사상은 다르다.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본다. 상호성이 있다고 본다. 의사가 ‘당신 암이야’ 이랬을 때 나는 받아들였다. 육체도 나의 일부니까. 그래서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

이어령 교수가 요즘 사용하고 있는 노트와 펜을 보여주었다. 노트에 필기를 하면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되는 첨단 방식이었다. 최승식 기자
이어령 교수가 요즘 사용하고 있는 노트와 펜을 보여주었다. 노트에 필기를 하면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되는 첨단 방식이었다. 최승식 기자
이어령 교수가 필기한 지점을 펜으로 꾹 누르자 녹음해 두었던 메모가 흘러나왔다. 이 교수는 집필 작업에 스마트 노트와 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최승식 기자
이어령 교수가 필기한 지점을 펜으로 꾹 누르자 녹음해 두었던 메모가 흘러나왔다. 이 교수는 집필 작업에 스마트 노트와 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최승식 기자

많은 사람이 죽음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로 생각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한다.  
“영원히 살면 괜찮다. 그런데 누구나 죽게 돼 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삶이 중요하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정월 초하루에, 그 좋은 새해 첫날에 왜 죽음에 대한 노래를 부르겠나.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삶이 더 농밀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삶이 가장 농밀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나. 요즘이다.”

왜 요즘인가.
“사람 만날 때도 그 사람을 내일 만날 수 있다, 모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농밀하지 않다. 그런데 제자들 이렇게 보면 또 만날 수 있을까.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면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저 꽃을 또 볼 수 있을까. 그럴 때 비로소 꽃이 보이고, 금방 녹아 없어질 눈들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너는 캔서(암)야. 너에게는 내일이 없어. 너에게는 오늘이 전부야’라는 걸 알았을 때 역설적으로 말해서 가장 농밀하게 사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나쁜 일만은 없다.”  

이 교수는 7년 전에 소천한 딸(이민아 목사) 이야기를 꺼냈다. 이 목사도 생전에 암 통보를 받았다. “암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딸도 당황하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하면 1년, 안 하면 석 달’이라고 했다. 딸은 웃었다. ‘석 달이나 1년이나’라며 수술 없이 암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진단한 의사가 당황하더라. 그게 무슨 큰 도를 닦아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뉴스’가 아니다. 그냥 알고 있던 거다. 그때부터 딸은 책을 두 권 쓰고, 마지막 순간까지 강연했다. 딸에게는 죽음보다 더 높고 큰 비전이 있었다. 그런 비전이 암을, 죽음을 뛰어넘게 했다. 나에게도 과연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의 비전이 있을까.” 그는 그게 두렵다고 헀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을 생각하며 염두에 두고 살았던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이어령 교수는 "죽음을 생각하며 염두에 두고 살았던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생각하시는 비전이 뭔가.
“우선 비전의 바탕, 내 삶을 그리는 바탕을 말하고 싶다. 먼저 ‘인법지(人法地)’다. 인간은 땅을 따라야 한다. 땅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어디에 사나. 지구에 살지 않나. 다음은 ‘지법천(地法天)’이다. 땅은 하늘을 따라야 한다. 땅에 하늘이 없으면 못 산다.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자리도 있으니까. 그럼 그게 전부냐. 아니다. ‘천법도(天法道)’. 하늘은 도(道)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럼 도(道)가 끝인가? 아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道)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

마지막의 ‘자연’이란.
“우리는 그동안 ‘인법지’할 때 ‘지(地)’가 자연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게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된 것이다. 자연스러움. 이 세상에 스스로 된 게 있나. 의존하지 않는 게 있나. 의지하는 뭔가가 없다면 그 자신도 없어진다. 그러니 ‘절대’가 아니다.”

그럼 ‘스스로 된 것’은 뭔가.
“누군가 예수님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의 아들인가?’ 그러자 예수는 ‘예스, 에고 에이미(ego eimi·그리스어). 즉 예스, 아이 엠(Yes, I am)’이라고 답했다. ‘아이 엠(I am)’이 뭔가. ‘나는 나이다’ ‘나는 스스로 있다’는 말이다. 그건 무엇에 의지해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거다. 스스로 있는 것은 외부의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게 ‘자연’이다. 그게 ‘신(神)’이다.”

이어령 교수는 "예수를 믿는 것과 종교를 믿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최승식 기자
이어령 교수는 "예수를 믿는 것과 종교를 믿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최승식 기자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건 무얼 뜻하나.
“우리는 ‘너 예수교 믿어?’하고 묻는다. 그건 교(종교)를 믿느냐고 묻는 거다. ‘너 신을 믿어?’ 하는 물음과는 다른 이야기다. 교를 믿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다르다. 기독교든, 불교든, 도교든 모든 종교의 궁극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와도 같은 게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절대의 존재다. 인간은 단 1초도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자율자동차라는 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데우스’ 같은 말처럼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없다.”

이어령의 삶,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인간이 죽기 직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유언이다. 나의 유산이라면 땅이나 돈이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 묻어두었던 생각이다.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유언 같은 책을 완성하고 싶다.”  

무엇에 대한 책인가.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을 썼다. 책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그렇다면 한번 당사자에게 물어봐라. 지금쯤  ‘제4의 물결’은 무엇인가. 요즘 툭하면 웹이니 산업이니 하는 키워드에 ‘2.0’ ‘3.0’ 번호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엔 “생명 3.0”까지 들고나오는 이들도 있다. 문명이 그렇게 1ㆍ2ㆍ3ㆍ4 번호 달고 순서대로 오는 것이라면 걱정할 게 없다. 4차 산업혁명 뭐 걱정하나, 다음에 5차 혁명이 올 텐데. 그건 실없는 사람들 소리다.”  

그럼 문명은 어떻게 가는 건가.
“문명은 고속도로처럼  일직선으로 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앨빈 토플러의 큰 잘못은 인류 문명의 물결을 농경시대부터 계산해 정보시대의 도래까지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유전자나 두뇌 등 모든 조건은 수렵ㆍ채집 시대 때 형성된 그대로이다. 인간 문화ㆍ문명의 텃밭부터 계산했어야 한다.”

이어령 교수는 "문명의 출발점은 수렵채집 시대다. 거기에 대우주의 생명질서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이어령 교수는 "문명의 출발점은 수렵채집 시대다. 거기에 대우주의 생명질서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농경 시대’가 아닌 ‘수렵ㆍ채집 문명’이 출발점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아이가 태어날 때 언제부터 나이를 세나. 서양에서는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간은 치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 탯줄을 끊을 때부터 한 살이다. 인간이 만든 문화ㆍ문명이 아이를 키운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다. 태아는 자신이 알아서 태반을 만들고, 호르몬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뱃속에서 나갈 때를 결정한다. 인간의 문화는 학습 이전의 상태다. 누가 가르친 게 아니다. 태아에게는 태생기의 거대한 생명 질서, 우리가 모르는 대우주의 생명 질서가 있다. 그러니 태중의 아이를 한 살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그건 자연과 단절된 문화ㆍ문명으로 사느냐, 아니면 대우주의 생명질서를 바탕으로 오늘의 문명과 연결하며 사느냐의 문제다.”  

이 교수는 한국 사람은 그걸 연결하며 산다고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안고 잔다.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하게 한다. 그게 뭔가. 엄마 뱃속의 환경과 이어주려는 거다. 산모가 미역국 먹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태중의 양수는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하다. 과학은 생명이 바다에서 육지로 왔다고 말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요람에 재운다. 다시 말해 엄마 뱃속, 자연과의 단절이다. “한국 문화에는 그런 요람이 없다. 그러니 ‘생명 자본’이 누구에게 가장 많겠나. 서양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채집시대의 나물 문화를 바탕으로 정보시대의 선두까지 그대로 이어온 한국인에게 가장 많다.”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교수는 "호칭을 장관으로 하지 말아달라. 그냥 글 쓰는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교수는 "호칭을 장관으로 하지 말아달라. 그냥 글 쓰는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정보화 시대, 그다음은 어떤 시대인가.
“나는 디지로그와 생명 자본을 썼다. 정보화 시대 다음에는 생명화 시대가 온다. 인공지능(AI)이 산업 시대와 연결되면 재앙이지만, 생명화 시대의 기술로 사용되면 달라진다. 인류가 가장 행복한 시대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인적 자본, 사회 자본, 문화 자본, 자연 자본. 그다음에 오는 것이 ‘생명 자본’이다. 그걸 제일 많이 갖고 살아온 이들이 한국인이다. 인류 문명이 태동한 태생기를 품고 사는 한국의 생활문화 속에 그게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다들 ‘돼지’라고 하면 살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돼지 다리가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돼지에 개 정도의 다리만 달아줘도 비대해 보이지 않는다. 다리가 짧으니까 몸집이 뚱보로 보인다. 시점을 바꿔 보면 대상이 달라진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알려면 검색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려면 사색하고, 미래를 알려면 탐색하라. 검색은 컴퓨터 기술로, 사색은 명상으로, 탐색은 모험심으로 한다. 이 삼색을 통합할 때 젊음의 삶은 변한다.”


중앙일보

2020년 1월 26일 일요일

20세기 최고의 지성 버트런드 러셀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한편으론 노벨 문학상을 받은 문필가이며 인류 평화를 위해 공헌하기도 했다.

러셀은 1872년 5월 18일 영국 몬머스셔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영국 총리를 두 차례 지낸 존 러셀이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러셀은 1895년부터 모교의 수학 교수로 근무했다.

러셀은 철학·수학·과학·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70여 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썼다. 그의 대표작은 1945년 발간한 《서양 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다.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현대 분석철학까지 서양철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의 사상을 당대 배경과 연결해 정리했다.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평화 운동에도 앞장섰던 러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인슈타인 등 유명 학자들과 함께 핵무기 감축과 전쟁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 1970년 2월 2일 98세의 나이로 영국 웨일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서전에서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고 회고했다
한국경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3가지 열정

이번 기사는 한 권의 책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위대한 인물을 소개하는 것으로 합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입니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러셀의 주요 저작은 하나하나 소개해도 될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말년에 쓴 자서전을 중심으로 알아보는 것이 더 뜻깊을 것 같아 이런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 러셀에 관심을 갖고 그의 저작을 읽는다면 큰 기쁨으로 알겠습니다. <기자의 말>

추천 도서 : <러셀 자서전, 상/하>(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 <서양철학사>(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 <결혼과 성>(김영철 옮김, 간디서원) / <행복의 정복>(이순희 옮김, 사회평론)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나는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내가 그를 제대로 안 때로부터 '나는 러셀처럼 살다가, 러셀처럼 죽고 싶다'는 꿈을 간직해 왔다. 오늘 나는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말은 오래전부터 우리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것이다. 러셀이 보내는 메시지다.

나는 학기 초가 되면 다음과 같은 러셀의 말로 수업을 시작한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이 말은 러셀이 나이 90이 넘어 쓴 <러셀 자서전, 상/하>(송은경 옮김, 사회평론)의 서문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래 러셀처럼 살아보라' '당신과 이 나라에 희망이 보인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금세기 미국의 지성이자 양심으로 불리는 노암 촘스키가 있는 미국 MIT 연구실에도 러셀의 이 말이 붙어 있다고 한다. 촘스키는 말한다. 러셀의 3가지 열정은 바로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버트런드 러셀.
▲  버트런드 러셀.
ⓒ nobelprize.org
1872년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존 러셀은 백작이며, 빅토리아 여왕 시절 두 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하였다. 부모인 존과 엠벌리 부부는 러셀이 어린 시절 모두 사망하였지만 당대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의 제자이자 친구였고, 어머니는 당대의 모든 철학자를 집으로 초청하여 대화를 즐겼다고 한다.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도덕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10년에 걸쳐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화이트헤드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에 필적하는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1910)을 출간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반전운동에 가담하였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러셀은 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문학가로서, 반전평화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1945년 쓴 <서양철학사>는 서양철학의 흐름을 알려주는 걸작이고, 이외에도 철학 수학 과학 윤리학 사회학 교육 역사 종교 예술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하였다. 1950년대에는 핵철폐 운동에 혼신을 다하였고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을 비판하는 러셀 민간법정을 조직하기도 했다. 러셀은 1970년 2월 2일 98세의 나이로 영국 웨일스에서 사망했다.

연인에 대한 사랑, 그 열정을 갈망하자


내가 러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사랑의 열정이 자신을 지배한 첫 번째 열정이었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만일 러셀의 생애가 그 뛰어난 지성만을 보여주었더라면 나는 그를 존경하기는 했겠지만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셀은 젊은 시절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의 귀족 집안에서 자랐다. 당시 영국사회의 도덕률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인간의 본능은 중시되지 않았고 이성의 통제 대상으로만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허위의식에 가득 찬 도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본능에 기초한 남녀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자유연애를 지지하였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어떤 가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도덕주의자들은 그가 몇 번이나 이혼을 하고 주변에 여러 연인을 거느린 것을 두고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몰아쳤지만 그는 인간의 사랑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도덕기준에 의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하였다. 러셀은 연인과의 사랑이야말로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려온 천국의 모습이라고 찬미했고 연인과 나눈 그 짧은 사랑마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큰사진보기  책 <러셀 자서전>(버트런드 러셀 저/송은경 역) 겉그림.
▲  책 <러셀 자서전>(버트런드 러셀 저/송은경 역) 겉그림.
ⓒ 사회평론
"사랑의 희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남은 여생을 모두 바쳐도 좋으리라 ... 생각했다."(<러셀 자서전, 상> 서문)
그러나 이것은 기억하자. 러셀이 무분별한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란 사실을.

그는 분명히 말한다. 연인 사이에 아이가 있는 경우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은 무한한 것이라고. 그러니 책임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는 말한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성적 관계는 두 사람의 모든 인격이 융합하여 새로운 공동의 인격을 형성하는 관계라는 것을.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깊은 친밀감과 굳센 일체감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할 수 없다. 우리가 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나이 90이 넘어 이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고백한다. 70이 넘어 마지막 연인으로 만난 이디스(Edith)에게 러셀은 자서전의 첫 장에서 감동적인 시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디스(Edith)에게오랜 세월
평온을 찾아 헤맸소
인생의 환희도, 고통도 만났다오
인간의 광기를 목도하였고
고독함이 무엇인지도 알았소
내 심장을 갉아 먹던 그 외로움의 고통도 느꼈다오
그러나 나는 결코 평온을 발견하지는 못하였소

이제, 나, 늙고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당신을 알아
인생의 환희와 평온을 찾았다오
그리고 쉼을 얻었소
그토록 외로운 세월 끝에
인생이, 사랑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았다오
나, 이제 잠든다 해도
여한은 없을 것이오.
(필자 번역)

죽기 전에 우리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 이런 시를 바칠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정녕 감사하라. 이런 연인이 없다면 어딘가에 있을 그 연인 찾기를 쉬지 마라.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별이 빛나는 이유를 알고 싶은가

 <러셀 서양철학사>(버트런드 러셀 저)
▲  <러셀 서양철학사>(버트런드 러셀 저)
ⓒ 을유문화사
러셀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진리추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누구나 진리추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왠지 의무감에서 나오는 소리로 들린다. 내게 큰 공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 러셀은 다르다. 그는 자서전에서 아주 어린 시절,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시절부터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왜 반짝이는지, 삼라만상의 이면에는 수의 원리가 있다고 말한 피타고라스의 말을 알고 싶었다"고 썼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 말을 각자의 가슴 속에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진리추구에 대한 열정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러셀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 드러난 것 이면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알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러셀을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는 본질적인 것을 수로써 풀어보고자 하는 러셀의 꿈을 그린 책이다. 그것은 뉴턴이 만유인력을 기술한 <프린키피아>에 도전하는 또 다른 <프린키피아>(원리)였다. 그는 이 책을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화이트헤드와 함께 썼는데 무려 1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하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책을 쓰는데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작업이었는지를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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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서 1910년까지, 나는 1년에 8개월 정도 매일 10시간에서 12시간씩 작업을 했다. 원고가 점점 방대해지자 산책길에 나설 때마다 집에 불이 나 원고가 타버리지 않을까 염려하곤 했다.... 마침내 그것을 대학 출판부로 옮겨가게 되었을 때, 양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낡은 4륜 마차까지 대령시켜야 했다." (<러셀 자서전, 상> 269쪽)

그의 지적 탐구는 나이 40을 넘기면서 철학으로 이어진다. 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본질을 탐구하는 그의 진리탐구는 우리가 영원한 명저로 이야기하는 <서양철학사>(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에서 볼 수 있다. 1천여 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책을 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의 지적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철학의 세계를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무인지대'라 정의하고 2천 년 철학의 역사를 유려한 필치로 그려 나갔다. 그는 어떤 대철학자에 대해서도 결코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다. 칸트마저 러셀에게는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없었다. 서양철학 전체를 뚫어 보는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러셀만의 자신감이었다.

러셀의 진리추구는 그를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만들었다. 어떤 것도 그 앞에서는 권위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사상에는 머리를 저었고 자신의 이성을 믿으며 책임 있는 행동을 강조하였다. 그럼, 그가 추구한 자유주의자란 무엇일까. 그는 자유주의자 10계명이라고 하는 글로 이것을 정리한 적이 있다. 이 중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 자서전 (하)>(송은경 역)
▲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 자서전 (하)>(송은경 역)
ⓒ 사회평론
1.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말라....
4. 반대에 부딪힐 경우, 설사 반대자가 당신의 아내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권위가 아닌 논쟁을 통해 극복하도록 노력하라. 권위에 의존한 승리는 비현실적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5. 다른 사람의 권위를 존중하지 마라. 그 반대의 권위들이 항상 발견되기 마련이니까.
...
7. 견해가 유별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인정하고 있는 모든 견해들이 한 때는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았으니까.
...
9.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10. 바보의 낙원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라. 오직 바보만이 그것을 행복으로 생각할 테니.
(<러셀 자서전, 하>, 286-287쪽)

러셀의 진리추구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 자체의 지적 탐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철학 하는 자세였다. 우리나라에는 흔히 철학교수는 많은 데 철학자는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철학 하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러셀은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 하는 자세를 가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젊은이여, 본질을 보라, 본질을 꿰뚫라, 그것을 위해 고뇌하라, 그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이니라.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러셀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세 번째 열정인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나타난다. 그는 감옥에도 갔다 왔다. 그는 양심범이었다. 백작 러셀이 어찌하여 그런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였는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반전평화 운동에 뛰어든다. 무의미한 전장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대신하여 병역에 반대하는 글을 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2차 대전이 미국의 가공할 원자탄으로 끝을 맺자 그는 핵철폐 운동을 주도한다. 90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그것은 인류의 양심에 반한 전쟁이라 선언하고 세계의 양심을 모았다. 이름 하여 러셀 민간법정이다. 그는 이 법정을 통하여 이 전쟁에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하여 전범의 딱지를 붙인다.

이런 삶은 참으로 쉽지 않다. 어린 시절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을 가진 대저택에서 자라났다. 현직 수상이 저택을 방문하여 자고 가는 그런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수상을 두 번이나 지낸 분이고 아버지는 <자유론>의 저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그의 어머니는 당대의 최고 철학자들을 집안으로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가문에서 배출된 그가 귀족의 영화를 누리지 않고 인류의 고통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연민을 갖고 산 것을 단순히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였다는 것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즘 '강남좌파'라는 말이 유행한다. 진보적 성향을 갖는 지식인 중 강남에서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조금은 비꼬는 말로도 들리지만, 나는 제대로 된 강남좌파가 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믿는다. 비록 가난한 사람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느끼겠지만 언제나 가슴을 열고 민중에게 다가가는 지식인, 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그것까지 다 내놓으라고 하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참된 인생의 길을 나보다 어려운 사람과 더불어 가고자 하는 사람, 그런 강남좌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 러셀을 보면서 느끼는 바람이다.

큰사진보기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버트런드 러셀 저)
▲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버트런드 러셀 저)
ⓒ 사회평론
러셀의 세 번째 열정을 이야기할 때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영국 국교회, 장로교 및 유니테리언파라고 하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누구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찌감치 기독교와 결별한다. 그 이유는 그가 평생 추구한 자유주의적 회의론에서 찾을 수 있지만 기독교가 현실적 책임을 다하지 못해 왔다는 데도 큰 원인이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할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그것을 극복할 것을 유난히 강조했다. 이 말에 대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동의하기 힘들어 하겠지만 기독교가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은 새겨들을 만하지 않는가. 세계에서 가장 십자가가 많은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경고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지금 현실에서 행동해야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라. ... 우리는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하게 직시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다해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41쪽)

러셀의 비전이 우리 젊은이의 비전으로

나는 간단하게나마 러셀의 삶을 그의 좌우명을 통해 그려 보았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여, 러셀의 생애가 어찌 보이는가. 러셀의 비전이 우리 젊은이들의 비전이 될 수는 없을까. 그리할 수 있다면 이 나라, 대한민국은 분명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전을 좇아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을 좋아했고, 더욱 더 세속화된 시대에 지혜를 줄 수 있는 통찰의 순간들을 두고자 했다.  사회적으로는 개인들이 거리낌 없이 성장하는 사회, 증오와 탐욕과 질시가 자랄 토양이 없어 죽어버린 사회의 탄생을 그렸다."(<러셀 자서전, 하>, 563쪽)

바로 이것이 '사랑으로 고무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을 살아온 러셀의 비전이다. 이 비전이 우리 젊은이들의 비전이 될 것을 고대하며 펜을 놓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 교수이며 변호사이다.

2020년 1월 23일 목요일

청년아, 수포자는 되지 마라… 미래는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도 되는 식의 '빨리빨리' 획일화 시대는 갔다
다가오는 AI시대는 결과보다 과정을 풀어낼 줄 아는 사고 능력이 중요해지는 시대
순수 우리말에 '내일'은 없지만 모레, 글피, 그글피란 말은 있다
늘 위기설 속에 살아온 한민족… 위기감이 오늘보다 나은 미래 불러

이어령(86) 전 문화부 장관이 다음 100년 우리 사회의 주축이 될 청년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전 장관과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가 문화·교육 분야에서 한국·한국인의 미래 과제를 이야기했다.



이어령(왼쪽) 전 문화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 서재에서 정과리 연세대 교수와 문화 분야를 주제로 한국의 미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북돋는 교육으로 청년 세대에게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늘 한국적인 것이 세계에 통하는 미래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100년을 준비하는 관점에서 우리 문화와 세계성(世界性)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어령-내가 젊었을 때 우리말에 절망했던 적이 있다. 그제, 어제, 오늘은 다 우리말인데 '내일(來日)'만 한자어더라. 과거를 가리키는 말은 다 있는데 정작 내일이라는 고유어가 없다. 내일을 빼앗긴 민족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모레, 글피, 그글피가 있더라. 우리 말고 그글피라는 말까지 있는 나라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한국 문화가 늘 이렇다. 위기설 속에서 살지 않았던 날이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위기감 때문에 오히려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불러왔다.

원숭이들은 아침에 먹이를 넷 주고 저녁에 셋을 주어야 좋아하는 조사모삼(朝四暮三)파다. 하지만 반대로 저녁을 위해 아침을 덜 먹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은 허리띠를 조일 줄 알았기 때문에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과거 대학을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비웃던 시절이 있었지만, 소를 판 아버지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N포 세대'라고 하는 지금 젊은 층은 현실에 자신들이 정당하게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절망하고 좌절한다.

-나는 N포 세대보다 오히려 제대로 포기할 줄조차 모르는 젊은이들이 더 걱정스럽다. 하려거든 엄살이 아니라 철저하게, 치열하게 포기하라. 그러면 마지막 남는 것이 있다. n이라는 수학 기호와 포기라는 언어 기호이다. 그게 수학과 문학이다. 내가 6·25 전란의 바닥에서도 살아남았던 철학이다. 당시 외우고 다닌 시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바닷가의 무덤'이었다. "바람이 인다. 살아야 한다." 무덤은 죽음이다. 그런데 바다와 무덤 사이에 무엇이 있었나. 바람이 있었다. 이상(李箱)의 단편소설 '날개'에서 마지막 구절의 '날자'를 '살자'로 바꾸면 "살자, 살자, 한 번만 더 살아 보자꾸나"이다. 그런데 발레리도 이상도 수학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문학과 수학이 하나로 연합하는 활동은 정신의 첨단을 추구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났다. 시인과 과학자들이 함께 내는 프랑스 문학잡지 '울리포(Oulipo)'가 좋은 예다.

-방금 말한 발레리는 시단(詩壇)에 등장한 다음 절망적인 침묵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때 그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정신을 단련하고 재기했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는 되지 말아야 한다. 과거 우리 세대를 구한 것이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었다면 오늘날 청년 세대의 앞날을 좌우하는 것은 인공지능(AI)의 알고리즘이다. 영국 시인 바이런의 피를 받은 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어머니로부터 수학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됐다. 우리 젊은이들이 주의 깊게 봐야 할 대목이다. 피가 뜨거울수록 냉정함을 요구하게 되고, 에이다는 그것을 '포에틱 사이언스(poetic science)'라고 불렀다. 과학과 인문학을 함께 구축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갈 다음 100년의 문명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수학·물리와 문학·음악을 공통 기초 교과목(liberal arts)으로 다룬 고대 교육의 초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순히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와 같은 시류를 좇으라는 말이 아니다. 수학의 해답은 하나지만 푸는 방법은 수천 가지이다. 정답보다 그 풀어가는 과정, 요즘 말로 하면 알고리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난해한 시의 은유(metaphor)도 언어에 숫자를 대입해 집합론으로 풀면 쉽게 그 구조를 밝힐 수가 있다. 앞으로 오는 미래는 과정을 풀어가는 사고(思考)의 알고리즘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라 전체가 수포자다. 우리 교육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결과만을 보려고 한다. 한국의 바둑과 반도체가 세계를 제패한 원인이 무엇이냐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정부 관료들이 바둑과 반도체가 뭔지 몰라서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맞는 말 같다. 기원(棋院)을 학원 다루듯 규제했다면 알파고와 이세돌이 대결하는 일이 있었겠나. 그리고 세계 사람들이 삼성 스마트폰으로 그 중계 화면을 보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은 계산을 잘하지만 깊은 수학의 원리는 모른다.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 중시하게 되고, 결국 '빨리빨리'와 획일화에 대한 조급증을 낳는다.

-가까운 예로 지명(地名)을 보면 안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지은 지명들은 진고개, 동평마을 등 길고 짧은 말이 다양하다. 가장 긴 지명의 하나로 '도야지둥그러죽은골'의 9글자짜리도 있다. 이걸 행정관리들이 복잡하게 그대로 놔두겠나. 그래서 나라가 지은 지명은 두 글자로 통일돼 있다. 북쪽의 함흥·원산·평양·개성부터 시작해 한양(서울)·대전·대구·부산·광주·목포, 그리고 남단의 제주·한라까지 모두 두 자이다. 원조는 한자 종주국 중국이다. 그 큰 땅덩이의 지명들이 놀랍게도 대부분 두 글자다. 덩달아 일본은 한자를 수입하면서부터 법령으로 도쿄(東京)·교토(京都) 등 두 글자로 획일화했다. 이런 관료적 획일주의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아시아의 시대가 오겠는가. 우리 지식인들은 지금도 두 글자를 겹쳐 만든 '사자 숙어'의 사고 프레임에 갇혀 지낸다.

-그래도 한국인이 21세기에 자랑스러운 문화로 내놓은 '한류(韓流)'가 있다. 한국 문화의 기성 중심인 문학이나 예술에 연결되지 않는 신종이다. 이게 전통의 새로운 분출인지, 세계 대중문화의 극단적 프레임인지 궁금했다.

-한류는 그동안 우리가 천시하고 부정적으로 소외시킨 '막' 자 붙은 토착문화에서 나온 것이 많다. 국내에서는 개 밥그릇으로 천대받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 찻잔으로 국보가 됐다. 관광버스 춤이라고 비웃는 촌부의 막춤이 싸이의 말춤이 되어 세계 50억 명이 내려받아 함께 추는 기록을 세웠다. BTS(방탄소년단)의 랩을 따라 하려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글을 배운다. 막걸리·막사발·막춤·막국수 등 그동안 천시하고 부정하던 '막 문화'가 지금은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를 만들고 있지 않나.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 줄 모른다.

-전통은 옛것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옛날에 억눌렸던 것이 새롭게 부상하고, 옛 지배문화는 밑의 토양으로 돌아간다는 게 김현의 '단절과 감싸기'론이다.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 이론에서 '아우프헤벤(Aufhebe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내에서는 한자로 양기(揚棄)라고 번역하지만, 버린다는 뜻과 보존한다는 정반대의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리 토박이말에는 "버려둬"라는 아주 흔한 말이 있다. 버리다와 두다의 반대말이 한데 합쳐져 다이내믹한 개념을 만들어 낸다.

어릴 때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는 놀이를 한 적이 있다. 늘 보던 풍경이 낯설고 아름답게 보이더라. 젊어서 엉거주춤이라는 말을 싫어했는데 그것도 다시 보니 경직된 서양식 부동자세보다 훨씬 유연하고 가변성이 있다. 기마 자세나 스키 탈 때가 바로 엉거주춤한 오금에 중심을 둔 자세이다. 한국 사람은 오금이 풀어져야 행동할 수 있다. 앉거나 서는 진퇴(進退)를 마음대로 하는 가장 융통성 있는 자세이다.

-결국 상극(相剋)이 통하는 게 한국 정신의 기본이고 새로운 세기의 모본(模本)이라는 얘기로 들린다. 선생님은 청년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우리 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일까.

-시를 비롯한 우리말 교육, 더 높게는 새로운 문학 교육이다. 시대마다 유토피아(Utopia) 문학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리스말로 '유'는 노(no)라는 부정사이고 '토피아'는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아무 곳에도 없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유토피아가 아닌 유크로니아(Uchronia)의 문학과 사고가 나와야 한다. 100년의 가상세계를 만드는 소설이다.

인공지능 시대 혹은 양자컴퓨터 시대의 기술을 이용하면 과거의 역사나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시뮬레이션해 정밀한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다. 

가령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20세기 초 일본이 대륙 진출을 하지 않고 해양 쪽으로 역사의 진로를 잡았다면 아시아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러면 내일이라는 한자어가 아닌 토박이말 '할재(轄載)' 또는 '날새(飛鳥)' 같은 말을 복원할 수가 있다. "미래는 과거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는가.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