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7일 토요일

지진아 아인슈타인 깨운 3가지… 나침반·바이올린·토론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말 배우는 것이 늦어 세 살까지 한마디도 못 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독일어가 어눌하고 약간의 자폐 증상이 있어 왕따가 되었다. 다섯 살 무렵 입원한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무료해하는 아들에게 ‘나침반’을 사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나침반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움직임을 관찰하며 바늘을 끌어당기는 우주의 힘이 숨어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는 우주의 힘이 어떻게 자기한테까지 오는지 궁금했다.

아인슈타인은 학업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지진아로 분류되었다. 담임은 성적기록부에 ‘이 아이는 나중에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기록했다. 이를 본 어머니는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너는 세상의 다른 아이들에게는 없는 훌륭한 장점이 있단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너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길을 찾아가야 한다.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아들을 격려했다.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 바이올린 연주하며 알게 됐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망명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1932년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1년쯤 바이올린을 배우다 그만뒀지만, 몇 년 뒤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바이올린을 배웠다. 스스로 원했기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집중력은 훗날 그가 위대한 과학자로 명성을 얻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 바이올린 연주하며 알게 됐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망명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1932년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1년쯤 바이올린을 배우다 그만뒀지만, 몇 년 뒤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바이올린을 배웠다. 스스로 원했기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집중력은 훗날 그가 위대한 과학자로 명성을 얻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넌 특별하단다” 어머니의 믿음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이 남보다 잘하길 바라지 않았다. 무언가 남과 다른 특출한 재능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녀는 아들에게서 ‘Best’가 아닌 남과 다른 ‘Unique’한 재능을 찾으려 노력했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에게 여섯 살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배우기 싫어해 1년쯤 배우다 그만두었다. 이때 어머니는 강요하지 않았다. 몇 년 뒤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다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기가 원해 다시 시작했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에게 놀라운 집중력이 발견되었다. 그는 어느 날 모차르트 음악이 수학적 구조로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에 진리가 숨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깨닫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장점 찾아준 어머니 코흐 -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파올리네 코흐.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아들에게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격려했다. /위키피디아
아인슈타인의 장점 찾아준 어머니 코흐 -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파올리네 코흐.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아들에게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격려했다. /위키피디아

독서를 즐기는 아버지 덕에 아인슈타인도 책 읽기를 좋아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가난한 신학생을 대접하며 자녀를 돌봐주게 하는 대신 학비를 지원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열 살 때 부모는 막스 탈무드라는 의대생을 목요일마다 초대했다. 막스는 아인슈타인이 ‘자연의 움직임’에 호기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각종 과학책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21권짜리 자연과학 시리즈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막스는 아인슈타인이 12세가 되자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이끌어 함께 읽고 질문을 던져 스스로 원리를 깨우치도록 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기하학의 규칙성과 논리에 빠져들었다. 유대인 교육에 있어 이처럼 ‘호기심’ 자극과 ‘답을 스스로 찾는 해결법’은 가장 중요한 학습 방법이다. 이후 막스는 아인슈타인의 관심을 철학으로 넓혀주어, 뉴턴, 스피노자, 데카르트의 책들을 섭렵하게 했다. 13세 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한 구절, 한 구절 같이 읽으며 몇 시간씩 토론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토론의 즐거움에 빠져들면서 토론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가족은 1895년 뮌헨에서 밀라노로 이사했다. 막스도 의대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위해 혼자 뮌헨에 남았으나 주입식 교육이 싫었다. 결국 역사·지리·어학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갔다. 16세 때 독학으로 미적분을 뗐고, 17세 때 ‘나는 평생 술 대신 인문학에 취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고전 읽기에 빠져들었다. 아인슈타인은 밀라노에서 대학을 가려 했으나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가 없어 불가능했다. 그러다 취리히 연방 공대는 입학 시험에 졸업 증명서가 필요 없음을 알게 되어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이때 그의 탁월한 수학 성적에 주목한 학장의 배려로 아인슈타인은 페스탈로치가 설립한 고등학교에서 1년간 더 공부하는 조건으로 이듬해 입학했다. 대학 시절 아인슈타인은 수업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여러 주제로 친구들과 토론하며 즐겁게 보냈다.




학교의 평가는 “뭘해도 성공할 수 없음” - 아인슈타인의 어린 시절 모습. 말 배우는 것이 또래들보다 한참 늦었고, 학교에서는 왕따에 시달렸다. 병원에 입원했던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선물한 나침반을 보며 우주의 힘의 기원을 궁금해했다. 이 같은 호기심은 그를 성장시킨 중요한 힘이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대인 두뇌 계발의 비밀은 ‘호기심과 상상력’이다. 아인슈타인도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상대성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우주는 어떻게 작동하나’와 같은 추상적 의문에 매달렸다. 열여섯 살 어느 여름날, 공상에 잠겨 길을 걸으며 ‘인간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라고 상상한 것이 상대성원리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성적이 좋지 않아 취직이 힘들었다. 보험 회사에 취직했다가 잘린 뒤 물리학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신문 광고를 냈다. 이때 배우러 온 유대인 솔로비니에게 가르치기보다 함께 토론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이 모임에 수학자 하비 히트가 합류했다. 그 뒤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1902년 스위스 특허청에 취직했다. 직장 상사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근거한 사고 훈련을 받았다. 이에 자극받은 아인슈타인은 토론 모임을 ‘올림피아 아카데미’로 이름 짓고 퇴근 후 토론에 열중했다. 칼 피어슨의 ‘과학 문법’,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학 체계’ 등을 읽으며 토론했다. 책의 중요한 부분은 며칠씩 토론했다. 이때 의견들이 부딪치면서 불꽃 튀는 창의성이 발현되곤 했다. 이것이 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토론으로 단련된 그의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에 상상력이 더해졌다. 오로지 머릿속 실험으로 우주의 진리에 다가갔다. 1905년 26세의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상력이 발견한 보물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독일 물리학연보에 논문 다섯 편을 연달아 발표한 것이다.

머릿속 실험으로 우주에 다가가

3월에 ‘광전 효과’, 5월에 ‘브라운 운동’, 6월에 ‘특수 상대성 이론’, 7월에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 8월에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설’(E=mc²)을 게재했다.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주제였다. 1905년은 ‘기적의 해’였다. 그는 ‘광전 효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중력 이론이 포함된 이론으로 확대해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이 이론에서 “강한 중력장 속에서 빛은 구부러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옳은지는 개기일식 때 태양 바로 옆 별의 위치를 측정하면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별은 평소 위치에서 어긋나 보일 것이다. 1919년 5월 개기일식 때 영국 관측대에 의해 이것이 확인되어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가설들은 가히 혁명적이어서 아인슈타인에게는 ‘위대한 천재’라는 환호가 쏟아졌다. 오늘날 우리가 위성 텔레비전을 보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면서 한 번쯤은 아인슈타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게끔 인류에게 우주의 길을 열어준 과학자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이 본 교육의 목적]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 지식엔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세상을 감싼다”

“교육의 목적은 기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인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교육의 비결은 상호 존중의 묘미를 알게 하는 데 있다. 일정한 틀에 짜여진 교육은 유익하지 못하다.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에 대한 기쁨을 깨우쳐주는 것이 교육자 최고의 목표이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세상을 감싼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말로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그런 다음 말로 표현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했다.

창조란 ‘상상력’을 통해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상상력이 21세기의 화두이자 가장 중요한 경제 동력이 되고 있다. 상상력(想像力)이란 글자 그대로 ‘생각(想)한 것을 그려내는(像) 능력(力)’이다. 창조는 상상력과 꿈으로부터 나온다. 탈무드도 “당신의 꿈은 당신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최고의 옷”이라고 가르친다.

조선일보

2022년 8월 20일 토요일

서울대, 학과 구분없이 신입생 뽑는다… ‘통합선발’ 추진

 

서울대가 신입생 선발시 학과 구분없이 학생들을 뽑는 ‘통합선발’을 추진한다.

19일 교육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지난달 내놓은 ‘서울대 2022~2040 중장기 발전계획’에는 ‘전공·학과(부)·단과대학(원) 간 장벽 없애기’가 7개 중점 추진 과제 중 첫 번째 과제로 포함됐다.

서울대는 “전공 선택에 대한 제도적 경직성, 학생들의 실용적 문제해결 능력 배양의 문제는 국가와 사회의 수용에 부응하는 미래지향적 인재 양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 전공, 학과(부), 단과대학(원) 간 장벽 없애기를 제안한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대학 모집 단위를 없애고 학생을 모집할 때 문·이과 구분을 두지 않을 계획이다.

서울대는 “대학생활 초기 다양한 교양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각자의 적성과 흥미를 탐색하고 향후 자신이 지닌 잠재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전공을 특정 학과나 단과대학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가진 교과과정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해당 교과과정은 학생이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도록 제시된다.

서울대는 “학생이 선택하는 전공마다 이 전공을 포괄하는 기존의 잘 정립된 학문 분야들의 교과과정에 속한 최소한의 필수 교과목을 가이드라인으로 준다”고 설명했다.

재학 기간 동안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변경도 가능하다. 이에 맞춰 교수의 소속도 자율화해 학제 간 교육과 연구를 활성화하고 새로운 전공·교과과정을 도출한다는 계획이다.

서울대는 통합선발을 위한 핵심과제로 ‘관악 기숙대학 도입’도 포함했다.

그러면서 “통섭과 포영을 효과적으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과정 외에도 강의실에서 다뤄지는 것을 넘어 학생들이 실제 생활을 통해 관련 지식과 마음가짐을 체득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뉴시스]

2022년 8월 6일 토요일

‘필즈상’ 허준이 교수 “하루 4시간 연구…나머진 청소·육아 해요”

 올 초 ‘필즈상’ 선정 소식 처음 전해 들어

“아내 깨웠더니 ‘그럴 줄 알았어’ 다시 자”
“어릴 때 수포자 아냐…공동연구 즐거워”
롤모델 묻는 질문엔 “선생님과 친구들”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 온라인으로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 온라인으로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학의 매력은 공동연구에 있습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멀리 갈 수 있고 깊이 들어갈 수 있어서입니다. 공동연구 경험은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어서 십수년 동안 빠져 살고 있습니다.”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39)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 겸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6일 한국 기자들과 온라인으로 만난 자리에서 수학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허 교수는 “큰 상을 받아 무척 기쁘다. 주위 분들이 자기 일만큼 기뻐해줘 기쁨이 배가됐다. 부담감은 있지만 지금까지처럼 찬찬히 꾸준하게 공부해나가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는 지난 5일(현지시각)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2022 세계수학자대회’에서 대수 기하학을 이용해 조합론 분야에서 다수의 난제를 해결하고, 대수 기하학의 새 지평을 연 공로를 인정받아 필즈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 소식을 언제 알았는가’라는 물음에 “올해 초에 묘한 시간대에 국제수학연맹 회장이 전화 통화를 요구해 ‘혹시 필즈상 수상 때문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맞았다. 밤이어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울까 10분 고민하다가, (자던 아내를 깨워) 얘기했더니 ‘응 그럴 줄 알았어’ 하고는 다시 자더라”고 했다. 그는 가족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에 세계수학자대회 개최 예정지였던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함께 가려 했지만, 장소가 헬싱키로 바뀌면서 가족 여행이 무산돼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남긴 수학적 성과 가운데 기억에 남는 연구에 대해서는 “열 손가락 가운데 어느 손가락을 좋아한다 말하기 힘든 것처럼, 제가 한 연구 모두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며 “대부분 연구마다 공동연구자들이 있어서 그들과 어떤 식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끌어냈는지, 그 과정 모두가 소중한 추억”이라고 말했다.

“초·중·고교 때 다양한 친구들과 한 반에 사오십명씩 모여 종일 생활을 같이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지금의 저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수많은 경험을 제공해준 소중한 시기였다”

허 교수가 국내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데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한국 교육에 만족스러웠느냐는 물음에 그는 “한국에서만 교육을 받아 비교 대상이 마땅치 않지만, 개인적으로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초·중·고교 때 다양한 친구들과 한 반에 사오십명씩 모여 종일 생활을 같이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지금의 저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수많은 경험을 제공해준 소중한 시기였다”고 덧붙였다.

일부 언론에서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필즈상을 받았다고 표현한 데 대해서는 오해라고 밝혔다. 허 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얘기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구구단 외우는 것을 힘들어했다’고 했더니 (기사) 제목이 그렇게 된 것이다. 초·중학교 때는 아니지만 고교 시절에는 수학을 재미있어 했고, 성적도 중간 이상이어서 수포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허 교수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그는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떤 것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제가 타고난 재능이나 실력으로 글쓰기는 어림도 없는 것 같았다. 다른 글 쓰는 분들에 비해 과학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 과학 저널리스트를 할 생각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물리천문학부에 진학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 3~4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며 학업을 쉬었다가 복학 뒤 물리학 대신 우연한 기회에 수학 강의를 들으면서 수학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라는 물음에는 “하루 4시간 정도 연구에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거나 청소를 하며 다음날을 준비한다”고 했다. 롤모델을 묻는 말에는 “수학 문제를 풀거나 살아오면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마다 꼭 필요한 선생님과 친구들을 잘 만났다. 그때마다 정리하는 작은 수첩을 갖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롤모델”이라고 했다.